73화 약혼자? 누구 마음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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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약혼자? 누구 마음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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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약혼자? 누구 마음대로?
2023.06.12.
그리고 루시우스는 그런 르네브의 사정 따위는 하나도 고려하지 않고 있는 셈이었고.
“정말 제 상황을 이해한 게 맞으신지 의심스럽네요.”
“그저 약혼자가 될 뻔했던 사람으로서 르네브 너의 안위가 걱정돼서 그래.”
루시우스가 타이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약혼자? 누구 마음대로?’
르네브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은 종이 한 장 차이다. 격하게 루시우스를 거부하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야말로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기에, 르네브는 최대한 초연하게 말했다.
이제는 너 따위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걸 루시우스가 똑똑히 알았으면 했다.
“전하. 제 걱정은 저 혼자만 해도 충분한 것 같네요.”
그러니 제 걱정을 하지 말라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르네브의 뜻을 바로 알아들었는지 루시우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뭐……?”
“그리고 황자 전하. 부디 주변의 오해를 살 만한 발언은 주의해 주시길 당부드립니다.”
“르네브…….”
루시우스가 르네브의 손을 붙잡으려 했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애? 혹시 거기 계신 분은 세이렌 후작 영애 맞으십니까?”
***
벨케인 소공작은 건국제 참석을 위해 그레이트 홀로 연결된 계단을 오르던 중 드한을 발견했다.
그는 계단에 서서 시종에게 무언가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드한 경, 좋은 밤입니다.”
벨케인 소공작이 인사를 건네자, 드한이 마주 인사를 해 왔다.
“아, 좋은 밤입니다.”
어딘지 바빠 보이는 드한을 스쳐 지나려는 순간이었다.
드한 쪽으로 달려온 경비병이 말했다.
“파라디움의 귀빈들이라면 보지 못했습니다. 방금 교대를 마친 참이라…….”
벨케인 소공작은 몸을 돌려 드한 쪽으로 다가갔다.
“세이렌 후작 영애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벨케인 소공작의 물음에 드한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저 얼마 전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으니, 오늘처럼 사람이 많이 모일 때는 조금 조심하려는 것뿐입니다.”
드한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으나, 벨케인 소공작은 조금 신경이 쓰였다.
“그러셨군요.”
벨케인 소공작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만 가 보겠다며 드한에게 눈인사를 건넨 벨케인 소공작은 몸을 돌렸다.
“그런데 어디에 가십니까?”
곧 등 뒤에서 드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레이트 홀로 향하려던 벨케인 소공작이 돌연 몸을 돌리는 게 의아했던 모양이었다.
“마차에 두고 온 게 갑자기 생각이 나서 말입니다.”
“아…….”
드한이 가 보라는 듯 벨케인 소공작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에 다시 시종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떼어 낸 벨케인 소공작은 황제의 탄신일과는 또 다르게 꾸며진 정원을 걸었다.
평소 르네브는 정원 산책을 즐겼다.
신선한 공기를 쐬러 정원으로 나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산책로를 조금 걷던 벨케인 소공작은 우연히 흙바닥에 찍힌 발자국을 발견했다.
하나는 굽이 뾰족했고, 다른 하나는 발자국이 제법 컸다.
‘남녀 한 쌍이 이쪽으로 걸어간 모양인데.’
벨케인 소공작은 잠시 망설였다.
으레 남녀가 홀을 몰래 빠져나와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했을 때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을 테니까.
가령, 밀회를 한다든지 그런 것 말이다.
괜히 방해하는 건 아닌가 싶어 벨케인 소공작이 왔던 길을 되돌아가려던 순간이었다.
조금 격앙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저 약혼자가 될 뻔했던 사람으로서 르네브 너의 안위가 걱정돼서 그래.”
벨케인 소공작은 빠르게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르네브라고? 게다가 약혼자라니?’
그때 또다시 말소리가 들려왔다.
“황자 전하. 부디 주변의 오해를 살 만한 발언은 주의해 주시길 당부드립니다.”
익숙한 르네브의 목소리였지만, 제가 알던 것보다는 훨씬 더 싸늘했기 때문에 벨케인 소공작은 순간 잘못 들었나 싶었다.
‘게다가 황자 전하라니?’
자신이 알기론 바슈케르엔 황제 이카르를 제외하면 다른 황족은 없었다. 그러니 황자라 하면 적어도 바슈케르 황족은 아닐 터였다.
‘타국의 황자라…….’
근거리의 제국으로는 파라디움이 있었고, 자연히 벨케인 소공작은 르네브와 함께 있는 사람이 파라디움의 황자일 거라고 추측했다.
벨케인 소공작은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의 말소리가 가까워졌다.
몰래 대화를 엿듣고 싶지는 않았기에, 벨케인 소공작은 부러 인기척을 내기 위해 목소리를 냈다.
“영애? 혹시 거기 계신 분이 세이렌 후작 영애 맞으십니까?”
곧 여자가 벨케인 소공작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여기 계셨군요. 대화 중에 제가 방해한 건 아닌지…….”
벨케인 소공작은 그렇게 말하며 남자의 얼굴을 바라봤다.
자신도 어딜 가도 빠지는 외모는 아니었지만, 확실히 미남이었다. 바슈케르의 황제 이카르와 견줄 만큼이나.
그리고 남자는 방해받은 것이 못마땅한 듯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말씀 중에 끼어들어 실례했습니다. 드한 경께서 급하게 영애를 찾고 계시더군요.”
벨케인 소공작은 남자에게 사과한 뒤 용건을 꺼냈다.
“드한 경께서요?”
“무슨 일로 영애를 찾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간 급한 일인 것 같아 보였습니다.”
“말씀 전해 주셔서 감사해요.”
르네브가 가볍게 눈인사를 건네곤 황급히 자리를 뜨려 했다.
“르네브. 잠깐만!”
그러자 남자가 르네브를 붙잡으려는 듯 손을 뻗었다. 벨케인 소공작은 살짝 몸을 틀어 남자와 르네브 사이를 가로막았다.
“지금 뭐 하자는 거지?”
남자가 잔뜩 낮아진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한낱 미물을 보는 듯한 시선은 덤이었다.
“그러고 보니 제 소개가 아직이었군요. 저는 베니스탄 왕국의 벨케인 공작가의 사람입니다.”
빠르게 자기소개 한 벨케인 소공작은 남자에게 눈짓했다. 네 신분을 밝히라고.
사실 르네브가 남자를 황자 전하라고 불렀기 때문에 그의 신분은 알았다.
황자를 도발한 건 약간의 치기였다.
파라디움 황자의 한쪽 입매가 삐뚜름히 올라갔다.
“하…… 별.”
그가 이내 벨케인 소공작을 지나쳐 갔다.
‘세이렌 후작 영애를 붙잡으려는 거구나.’
제가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한 게 맞는다면 세이렌 후작 영애는 황자를 거부하는 것 같았다.
벨케인 소공작은 걸음을 빨리해 앞서 걷고 있는 세이렌 후작 영애 옆으로 갔다.
“저녁이 되니 조금 쌀쌀하군요. 괜찮으십니까?”
“저는 괜찮아요. 그러는 소공작님은 추우신가요?”
“저는 몸에 열이 많은 체질이라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때 등 뒤에서 헛웃음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벨케인 소공작은 힐끔 뒤를 돌아봤다. 가다 말고 멈춰 선 파라디움의 황자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찌나 눈빛이 살벌한지 한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조금 춥군요. 괜찮으시다면 제게 팔을 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벨케인 소공작은 절도 있게 팔을 굽혀 세이렌 후작 영애 쪽으로 내밀었다.
잠시 의아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던 세이렌 후작 영애가 거부하지 않고, 벨케인 소공작에게 팔짱을 꼈다.
등 뒤에서 계속 살벌한 기운이 느껴졌지만, 벨케인 소공작은 개의치 않고 걸었다.
한편 루시우스는 르네브와 자신 사이에 끼어든 베니스탄의 귀족을 못마땅한 시선으로 뜯어봤다.
뚫어질 듯한 시선을 느꼈는지 베니스탄의 귀족이 힐끗 루시우스를 돌아봤다.
눈이 마주치자, 베니스탄의 귀족이 옅게 미소 지었다.
남자의 인상은 제법 선한 느낌을 가져다주었으나, 지금 루시우스에겐 저리 치워 버리고 싶을 뿐이었다.
르네브와는 정말 오랜만에 다시 만난 것이었고, 아직 충분한 대화를 나누지도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마치 가로채다시피 르네브를 데려가다니.’
루시우스는 속으로만 이를 갈았다.
***
이후 건국제는 별다른 사건 사고 없이 끝났고, 르네브는 며칠간 휴가를 냈다.
쉴 수 있을 때 쉬어야 한다는 건 르네브가 이전 삶을 통해 배운 것 중 하나였다.
르네브는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쬐는 창가 앞 소파에 앉아 한가로이 책을 읽었다.
책 내용은 바슈케르의 신화와 종교를 쉽게 풀어낸 것으로 바슈케르의 문화를 알아가는 데 제법 도움이 되었다.
상징성을 가지는 동물이나 물건들에 대해 흥미롭게 읽고 있을 때였다.
“아가씨. 밖에서 이런 걸 받아 왔는데요…….”
앰버가 난처한 얼굴로 쪽지를 내밀었다.
“누구한테?”
“처음 보는 얼굴이었어요. 혹시 황궁에 새로 인력을 추가한 건가요?”
그간 황궁 구석구석을 돌며 누구네 침실에 이불이 몇 채 있는지까지 파악해 온 앰버였다.
‘그런 앰버가 모르는 얼굴이라니?’
르네브는 의아해하며 고개를 저었다.
“황궁 내 추가 인력에 관한 이야기는 들어 본 적 없는데.”
“수상한 사람은 아닌지 싶어서 아가씨께 쪽지를 건넬지 말지 조금 고민했는데요. 그래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가씨께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
지난번 에시카와 잘츠 후작의 일이 있고 나서부터 황궁 보안은 더욱 철저해졌다.
더군다나 아무나 황궁에 들어올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조금 찜찜했지만, 르네브는 일단 쪽지를 받아 들었다.
작은 쪽지에는 시간과 장소만 간략하게 적혀 있을 뿐 다른 내용은 적혀 있지 않았다.
“휴…….”
르네브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미간을 찌푸렸다. 필체를 보고 누가 보냈는지 단박에 알았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는 건국제가 끝났음에도 파라디움으로 돌아가지 않고, 자신을 괴롭히는 건지…….
“아가씨, 무슨 내용인데 그러세요?”
앰버의 물음에 르네브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응. 별일 아니야.”
르네브는 자연히 꺼지도록 놔두었던 벽난로 안에 루시우스에게서 온 쪽지를 던져 넣었다.
곧 잿더미 속의 작은 불씨가 쪽지에 옮겨붙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앰버가 물었다.
“또 같은 사람이 뭔가 건네거나 말을 걸어오거든 무시해 버릴까요?”
“응. 그렇게 해.”
르네브는 쓴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우스는 회귀 전에도 이번 생에도 참 도움이 안 되었다.
‘한참 흥미로운 부분을 읽고 있던 참이었는데.’
르네브는 한숨을 삼키며 내려놓았던 책을 집어 들었다.
다행히 잠깐의 흐름이 끊긴 것이 무색하게도 책의 내용은 흥미로웠고, 르네브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페이지를 넘겼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책장을 덮었을 때는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슬슬 저녁을 먹으면 될 것 같았다.
르네브가 막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앰버가 다급하게 말했다.
“아가씨. 손님이…… 찾아왔는데 어떡할까요?”
이 시간에?
르네브는 어두워지기 시작한 하늘을 올려다봤다.
“시간이 늦었으니 오늘은 그만 돌아가시라고 전할까요?”
“누구신데?”
르네브의 물음에 앰버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루시우스 전하세요.”
르네브는 눈을 질끈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