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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이카르 없는 건국제 (72/148)


#72화 이카르 없는 건국제
2023.06.11.


이카르는 속으로만 혀를 찼다.

분명 면도날에 살짝 뺨을 베인 것 정도로 호들갑을 떨었으리라.

“그게 전부인가?”

“하루빨리 황궁으로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도 조금 곁들였습니다.”

베인의 말에 주변에 있던 기사 몇몇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황궁을 떠나온 지 벌써 수개월이 흘렀다. 따뜻한 음식과 푸근한 가족의 품이 그립지 않을 리 없었다.

“다들 오늘은 푹 자 두도록.”

이카르는 그렇게 말하곤 막사로 들어갔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폐하.”

기사들을 따라 꾸벅 허리를 숙인 베인은 제 막사로 돌아왔다.

그리고 작은 양피지를 꺼내 깨알 같은 글자를 적어 넣었다.

「폐하, 부상 완쾌!」

베인은 책상 위에 먹이를 쪼아 먹는 검은 새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잘했다. 언젠간 네 공로를 인정받게 해 주마.”

***

건국제 당일.

차례차례 그레이트 홀로 입장하는 귀족들을 바라보는데 벤더펠트 공작 부인이 말했다.

“시작이 반이라고, 반은 했으니 이제 저희도 좀 쉴까요?”

“그러죠. 이 틈에 식사도 좀 하고요.”

르네브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홀 안쪽으로 몸을 틀었다.

르네브와 함께 걸으며 벤더펠트 공작 부인이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왜 그러세요?”

“사실 저는 한참 전부터 배가 고파서 혼났는데, 영애는 너무 멀쩡해 보이셔서 말을 꺼내기가 어렵더라고요.”

“아…….”

르네브는 머쓱하게 뺨을 긁적였다.

이카르 없는 건국제를 무사히 끝마쳐야 한다는 긴장감 때문인가?

속에 뭔가 들어갈 것 같지 않았기에, 아침부터 쫄쫄 굶었다.

그 탓에 배가 많이 고픈 건 르네브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긴장이 풀리자 잊고 있던 감각이 밀려든 것일 뿐.

“저도 그래요. 일찍이 배려하지 못해 죄송스럽네요.”

르네브가 미안한 표정으로 말하자, 벤더펠트 공작 부인이 손사래 치며 말했다.

“아뇨, 아뇨. 저도 이런 건국제처럼 큰 행사 준비는 처음이라 내심 긴장했던 모양이에요. 뭔가 입에 넣으려 했더라도 금세 소화 불량이 왔을 걸요.”

말을 하거나, 웃지 않으면 벤더펠트 공작 부인은 제법 냉담한 분위기를 풍겼다. 파라디움의 황후가 떠오를 정도로.

그래서 더더욱 실수 없이 건국제를 완벽하게 준비해야 한다는 강박을 가졌던 모양이었다.

건국제의 평판이 곧 르네브의 평가가 될 테니까.

하지만 그런 그녀도 자신처럼 긴장했었다는 말을 들으니 조금 더 긴장이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럼 이제 뭘 좀 먹을까요?”

“좋아요.”

르네브의 제안에 벤더펠트 공작 부인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르네브는 벽면 한쪽에 준비된 음식들을 쭉 둘러봤다.

‘뭐부터 먹을까.’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홀 입구가 조금 소란스러웠다.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때마침 벤더펠트 공작 부인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 또한 소란이 신경 쓰였는지 미간을 약간 모은 채였다.

그러나 이내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대단한 분이라도 오셨나 보네요.”

르네브는 이번 건국제의 총 책임자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가능한 맡은 일은 큰 문제없이 마무리 짓고 싶었다.

“제가 가서 확인해 보고 올게요.”

르네브가 들고 있던 접시를 내려놓자, 벤더펠트 공작 부인도 들고 있던 접시를 시종에게 건네려 했다.

“같이 가요.”

“금방 다녀올게요. 먼저 식사하고 계세요.”

르네브는 함께 가겠다는 벤터펠트 공작 부인을 만류하고 입구로 걸어갔다.

그리고 르네브가 입구에 가까워졌을 때였다. 시종의 외침에 르네브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파라디움의 황자 전하 입장하십니다.”

‘파라디움의 황자라고?’

그 말을 듣자마자 르네브가 곧바로 떠올린 건 루시우스였다.

하지만 시종은 파라디움의 황자 전하가 입장한다고만 했을 뿐이었다.

건국제 초대장은 파라디움의 황실로 들어간 것이었으니, 1황자나 2황자가 왔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런데도 파라디움의 황자라는 소리에 심장이 빠르게 쿵쿵 뛰기 시작했다.

“잠시, 지나갈게요.”

파라디움에서 왔다는 황자가 누군지 확인하기 위해 르네브는 귀족들을 헤치고 앞쪽으로 나아갔다.

“……!”

주변 사람들보다 반 뼘은 큰 키, 남자 주인공답게 수려하고 잘생긴 얼굴.

흰색 제복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남자가 바로 눈에 들어왔다.

“오랜만이네, 르네브.”

루시우스가 유려하게 눈매를 휘어 웃었다. 반면 르네브는 눈살이 찌푸려지는 걸 막지 못했다.

***

이카르를 대신해 초대객들과 인사를 나누던 드한에게 시종이 다가와 귀엣말을 건넸다.

“전령 새가 도착한 모양입니다.”

드한은 시종의 시선을 좇아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창을 부리로 열심히 쪼고 있는 검은 새의 모습이 보였다.

“잠시 자리를 비워야겠습니다. 말씀들 나누고 계시죠.”

모여 있던 귀족들에게 양해를 구한 드한은 검은 새가 있는 창가로 걸어갔다.

그레이트 홀을 가로지르는 와중에도 몇몇 귀족들이 알은척을 해 왔지만, 가볍게 눈인사만 건네고 곧바로 창가로 향했다.

전령 새 다리에 묶인 쪽지 내용을 확인한 드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얼른 이 기쁜 소식을 세이렌 후작 영애에게 알려야겠다.’

드한은 많은 사람들 속에서 르네브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어렵지 않게 르네브를 찾아낸 드한이 그쪽으로 다가가려 몸을 틀었을 때였다.

‘누구지?’

르네브의 옆에 건장한 체격의 남성이 함께였다.

두 사람이 그레이트 홀을 빠져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드한은 빠르게 홀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드한은 초대장 확인 절차 중인 시종에게 다가갔다.

“세이렌 후작 영애와 함께 있던 사람은 누구였지?”

“파라디움에서 오신 황자 전하십니다.”

“파라디움?”

드한의 한쪽 눈썹이 비죽 솟았다.

그러자 시종이 재빨리 테이블 위에 쌓인 초대장 틈에서 금색 편지 봉투를 찾아 내밀었다.

“이게 건네받은 초대장입니다.”

황궁에 침입한 괴한들이 세이렌 후작 영애를 납치하려던 것이 불과 몇 달 전 일이었다.

드한이 미간을 모르자, 덩달아 시종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뭔가……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아니, 별일 아닐세.”

드한은 옅게 미소 지으며 시종의 등을 툭툭 두드리고는 몸을 돌렸다.

파라디움의 황자가 어째서 세이렌 후작 영애와 함께 있는지 먼저 알아보는 게 중요했다.

건국제에 참석한 황자가 하필 3황자 루시우스였고, 그는 이전에도 세이렌 후작 영애에게 강압적으로 신체 접촉을 한 전적이 있으니.

드한은 빠르게 그레이트 홀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벌써 어디로 사라졌는지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

르네브는 귀찮은 티를 팍팍 내며 루시우스와 조금 떨어져 걸었다.

루시우스는 황자이고 언젠간 파라디움의 황제가 될 사람이며 이 소설의 남자 주인공이었다.

하지만 르네브에게 이제 더는 그런 것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이번 생엔 루시우스와 결혼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그럼 회귀 전처럼 비참한 끝을 맞을 일도 없었다.

“어디까지 가실 작정이세요?”

“다른 사람이 들어서는 안 되는 이야기거든. 조금만 참아 주겠어?”

르네브는 루시우스를 따라 걸으며 주변을 살폈다.

황궁 정원엔 보석이 박힌 가로등이 늘어서 있었다. 그 덕에 해가 진 지금도 사위가 그리 어둡지는 않았다.

순찰을 돌고 있는 보초병의 모습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르네브는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루시우스는 강제로 제게 입을 맞춘 전적이 있었으니까. 그것도 제일 안전한 곳이라 생각했던 세이렌 후작 저에서.

‘대체 무슨 말을 하겠다는 건지.’

르네브를 보자마자 루시우스는 중요하게 할 이야기가 있다며 밖으로 불러냈고, 지금이 그 결과였다.

“할 이야기가 있다면 여기서 하시죠.”

“르네브, 내가 널 해치기라도 할까 봐서 그래?”

루시우스가 돌연 걸음을 멈추고는 르네브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 말씀 좀처럼 믿기 어렵네요.”

르네브는 불신이 한가득 담긴 눈을 하고서 부러 차갑게 말했다.

내심 파라디움 황궁으로 보낼 초대장을 작성하면서 아무도 초대에 응하지 않거나, 오더라도 다른 사람이길 바랐다.

지난 생에 루시우스를 만나 거지 같은 삶을 살았었기에, 가능한 그와는 얼굴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다.

르네브는 바슈케르에 있었고, 루시우스가 직접 건국제를 맞아 바슈케르에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으니까.

“세이렌 후작 저에서의 일 때문인가?”

“잘 아시네요.”

“그때는 내가 지나쳤어. 미안해.”

루시우스의 입에서 순순한 사과의 말이 나오자 당황한 건 오히려 르네브였다.

‘……사과해? 사과를 했어? 루시우스가?’

회귀 전에는 결혼 생활하는 내내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루시우스의 사과에 르네브는 어안이 벙벙했다.

하지만 당황한 건 잠깐이었다.

“그렇게라도 널 잡고 싶었어. 네가 날 떠날까 봐……. 잘못된 선택이었지만 말이야. 그날 이후로 네가 날 만나 주지 않았잖아? 이제 와 사과하는 날 용서해 줘.”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르네브는 팽팽히 당겨지려는 입매를 애써 단속해야 했다.

‘또 내 탓이구나.’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걸 회귀 전 루시우스를 통해 절감했다.

그러면서도 약간의 기대를 품은 자신이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

결국, 꽉 다물린 잇새로 헛웃음이 비죽 튀어나왔다.

“……?”

그 반응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루시우스의 한쪽 눈썹이 비죽 솟았다. 르네브는 끓어오르기 시작하는 분노를 꾹꾹 눌러 삼키며 웃어 보였다.

“그럼 할 말은 이제 다 하신 건가요?”

루시우스가 빠르게 고개를 저으며 다급하게 말했다.

“르네브, 지금 국제 정세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알고 있지?”

르네브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루시우스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솔티와의 전쟁에선 바슈케르가 이길 거야.”

“그렇겠죠.”

“솔티가 바슈케르의 속국이 된 이후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어?”

할 말은 많았지만, 르네브는 최대한 말을 아끼기로 했다.

어찌 됐든 르네브는 파라디움 사람이었고, 아직 여긴 적진 한복판이나 마찬가지였다.

함부로 입을 놀리는 건 결코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그것도 인적이 드문 곳에서 파라디움의 황자와 함께 바슈케르의 미래에 대해 떠드는 건 더더욱 해선 안 될 일이었다.

“전하. 경각심이 있으신가요?”

“그게 무슨 소리야?”

“여긴 파라디움의 황궁이 아니라, 바슈케르 황궁이에요. 게다가 전하께서는 지금 파라디움의 대표로 이곳에 와 계시죠.”

루시우스가 골치 아프다는 듯 한숨을 내쉬더니 곧 입을 열었다.

“그래. 내가 생각이 짧았어. 조금 더 르네브 네 입장을 고려했어야 했는데 말이야.”

“…….”

“건국제 이후로도 며칠은 더 바슈케르에 머물 예정이야. 조만간 따로 만나서 이야기해.”

유학 혹은 서로의 문화를 체험해 보자는 취지로 좋게 포장했으나, 르네브는 인질이었다.

인질이 제 나라 사람과 함께 작당 모의를 했다?

아무리 르네브에게 호의를 보이고, 편의를 봐주고 있는 이카르라지만, 이 사실을 알고도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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