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1화 베인의 작전 (71/148)


#71화 베인의 작전
2023.06.10.


‘루시우스와 이카르는 분명 다른 사람이야. 그러니 선택 또한 다르겠지.’

그제야 잔뜩 좁아져 있던 시야가 확 트이는 느낌이 들었다.

호숫가에서의 일, 탄신일에서의 일, 그 외에도 많았던 이카르와의 기억들이 불안해하던 르네브에게 확신을 가져다주었다.

이카르는 분명 루시우스와 다른 사람이라는 걸.

게다가 이카르는 언제나 의심 없이 자신을 믿어 주었다.

이는 전후 관계나 사실 확인이 가능할 때만 선택적으로 르네브를 믿어 주던 루시우스와는 확연한 차이였다.

“그래. 루시우스와 이카르는 다른 사람이야…….”

그러니 이카르와 함께하면 회귀 전과는 다른 미래를 기대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

드한은 굳게 닫힌 집무실 문을 힐끔 돌아봤다.

‘너무 몰아붙였나?’

불안했다.

당장이라도 집무실 문을 열고 세이렌 후작 영애가 괜찮은지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반, 절대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반이었다.

잠시 망설이다 드한은 가던 길을 계속 가기로 했다.

만약 세이렌 후작 영애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는 사실을 이카르가 알면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게 분명했다.

드한은 불안한 마음을 떨쳐 내고는 빈방으로 들어갔다.

창가로 다가간 드한은 휘슬을 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창틀에 검은 새 한 마리가 내려앉았다.

드한은 품에서 쪽지 두 개 중 하나를 꺼냈다.

하나는 베인의 작전이 실패했을 때를 대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 새의 다리에 묶어 보낼 것이었다.

‘베인, 아무래도 네 작전은 성공한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며 드한은 푸른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검은 새를 바라봤다.

제법 뿌듯한 미소를 지은 채로.

‘폐하, 앞으로 제게 잘하세요.’

***

식사를 챙겨 테이블로 걸음을 옮기던 이카르의 눈에 베인이 들어왔다.

최근 들어 베인의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이따금 이카르의 얼굴을 보며 히죽거릴 때가 종종 있었는데, 그 낯짝을 보고 있노라면 왜인지 울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이카르는 참지 않기로 했다.

이카르는 통돼지 구이를 열심히 뜯고 있는 베인의 동그란 뒤통수를 가격했다.

이카르의 손은 남성 중에서도 크고, 힘도 엄청났다.

“아악!”

힘 조절을 해서 살짝 때렸음에도 베인이 괴성과도 같은 비명을 질러 댔다.

“대체 어떤 새…….”

잠깐 통증을 호소하던 베인이 고개를 돌렸다. 걸리면 가만 안 두겠다는 험악한 표정으로.

“……폐하?”

그러나 곧 제 머리를 때린 사람이 이카르라는 걸 깨닫고는 분노를 꾹꾹 눌러 참는 모습이 제법 가여웠다.

“왜, 대체 왜! 제 뒤통수를 때리신 겁니까?”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베인이 빽 소리쳤다.

“동대륙에 이런 속담이 있다더군.”

“무슨 속담입니까?”

“예쁜 놈 뒤통수 때린다.”

물론 어느 대륙에도 그런 속담은 없다. 함께 여러 대륙을 다녀 본 베인 또한 그 사실을 잘 알 것이었다.

“폐하 손은 흉기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지금 저를 죽일 뻔하신 겁니다! 저처럼 유능한 부하를 잃을 뻔하셨단 말입니다.”

“과장하지 마.”

이카르는 무감하게 툭 내뱉고는 베인의 옆에 앉았다.

“폐하야말로 식사할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 동대륙의 속담 못 들어보셨습니까?”

베인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아팠는지 눈가에는 눈물방울이 도롱도롱 맺혀 있었다.

‘심했나.’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조금 불쌍했다.

이카르는 베인의 접시에 제 몫의 작은 고기 한 덩이를 옮겨 놓았다.

베인이 힐끔 제 접시를 바라보더니 먹던 고기를 쥔 채로 새 고기를 집어 들었다.

뒤통수의 아픔이 제법 가셨는지 베인이 갑자기 히죽 웃었다.

그 웃는 얼굴이 또 꼴 보기 싫어서 이카르는 고개를 돌렸다.

“황궁에서 전령 새는 안 왔습니까?”

“갑자기 전령 새는 왜.”

베인이 양손에 통돼지 구이를 야무지게 잡고 한쪽씩 뜯으며 이죽거렸다.

“분명 폐하께서는 제게 고마워하게 되실 겁니다.”

이카르는 가늘어진 눈을 하고 베인을 쳐다봤다.

“내가 왜.”

“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지만, 때가 되면 제가 큰 역할을 했다는 걸 아시게 될 겁니다. 그때 가서 오늘 절 때린 걸 후회하지나 마시죠.”

“지금 말해.”

이카르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협박에 가까운 뉘앙스였기에, 베인은 얼른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오래 이카르와 함께했던 만큼 베인은 피해야 할 때를 잘 알았다.

그리고 자신을 잘 알기에 자리를 뜨는 베인 때문에 이카르의 기분은 조금 더 나빠졌다.

***

르네브는 건국제 준비로 어느 때보다 바쁜 오전을 보내던 중이었다.

‘수치를 잘못 적었네.’

슬슬 집중력이 떨어지는 모양이었다.

‘차라도 마시며 잠깐 쉴까?’

그런 고민을 하는데 드한이 집무실로 들어왔다.

“영애, 잠깐 시간 괜찮으십니까?”

“마침 쉬려던 참이었어요.”

“오, 그거 잘 됐군요. 이전에 말씀드렸던 분이 오늘 황궁에 오셨습니다. 한번 만나 보시겠습니까?”

드한이 말하는 이가 누군지 르네브는 바로 알아차렸다.

‘벤더펠트 공작 부인이 왔나 보구나.’

건국제 준비는 본래 황후의 일이었고, 황후는 보통 제 일을 도울 시녀를 여럿 두는 게 보통이었다.

이카르에게 바슈케르의 황후가 되어달라는 청혼을 받긴 했지만, 대답도 돌려주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니 아직 르네브는 황제의 약혼녀도, 예비 황후도 아니었다.

르네브는 그간 바슈케르의 귀족들과 교류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런 그녀가 이제 와 갑자기 시녀를 들이는 것도 조금 애매했다.

큰 행사인 건국제를 혼자 준비하던 르네브에게 드한은 얼마 전 꿀 같은 제안을 해 왔다.

일을 도울 시녀를 들이라고.

“좋아요.”

르네브는 흔쾌히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한과 함께 집무실을 나오자, 문 앞을 지키고 있던 황실 기사가 르네브를 보며 싱긋 웃었다.

“좋은 오후입니다. 레이디.”

마주 인사를 건네려던 르네브는 흠칫했다.

드한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기사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르네브는 기사에게 가볍게 눈인사만 건네고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여깁니다.”

“안내 감사해요. 드한 경.”

르네브는 안으로 들어가려다 바로 떠나지 않고 미적거리는 드한을 쳐다봤다.

“왜 그러세요?”

“서로 초면이시니, 제가 함께 있는 편이 나을지 아니면 독대가 편하신지, 여쭤보고자 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바쁜 드한의 시간을 빼앗을 수는 없었기에, 르네브는 곧장 대답했다.

“귀부인과 단둘이 대화를 나눠 보고 싶어요.”

“알겠습니다.”

그제야 드한이 집무실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응접실 안에는 우아하게 찻잔을 든 귀부인이 앉아 있었다. 회귀 전에 봤을 때보다 한참 더 어려 보이는 모습이 낯설었다.

벤더펠트 공작 부인이 테이블 위에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 뵙는군요. 반가워요. 세이렌 후작 영애.”

“반갑습니다. 벤더펠트 공작 부인.”

***

길지 않은 대화를 통해 르네브는 확신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벤더펠트 공작 부인은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사람을 무장 해제 시킨달까?

그녀와는 회귀 전에 몇 번 대화를 나눠 본 게 다였지만, 귀족 사회에서 진정성을 가지고 타인을 대하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공작 부인이라는 대단한 신분을 가지고도 오랜 기간 주변에 휩쓸리지 않고, 변치 않는다는 건 그녀의 내면이 단단하다는 방증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사람을 곁에 두는 건 행운이었다. 르네브는 확신하며 곧 결정을 내렸다.

‘벤더펠트 공작 부인의 도움을 받는 게 좋겠어.’

집무실로 돌아가자 서류를 보고 있던 드한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떠셨습니까?”

“즐거운 대화였어요.”

“마음에 드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사실 전부터 폐하께서…….”

거기까지 말한 드한이 제 입을 턱 막았다.

“……전부터 폐하께서, 그다음은 뭔가요?”

르네브가 추궁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드한이 입을 틀어막은 손을 은근슬쩍 내리며 말했다.

“말씀드릴 테니, 폐하께는 부디 비밀로 부탁드립니다.”

드한이 공손하게 양손을 모으고 고개를 조아렸다.

“그럴게요.”

이카르에게 함구하겠다는 르네브의 약속을 받아 낸 뒤에야 드한이 사실을 털어놓았다.

바슈케르 귀족과 전혀 교류가 없는 르네브에게 누군가를 소개해 주고 싶어 했다고.

겉돈다 이건가?

“…….”

르네브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드한이 얼른 덧붙였다.

“역시 영애의 마음씨는 젠느 강 못지않게 넓으십니다.”

젠느 강은 바슈케르에 있는 강으로 제법 큰 규모를 자랑했다.

그리고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인데, 바슈케르에서는 마음씨가 넓은 이들에게 젠느 강 같은 마음씨를 가졌다고 한다고 했다.

그러니 드한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찬사를 한 셈이었다.

‘이러다간 이카르에게 말 못 할 비밀이 너무 쌓여 버리는 건 아닌지.’

잠깐 그런 생각을 했지만, 이편이 오히려 좋을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다. 차곡차곡 둑을 쌓듯 드한의 약점을 쥔 쪽은 르네브였으니까.

더 큰 문제는 이카르가 미리 짜 놓은 계략을 알면서도 그 속에서 놀아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게 전부 르네브를 위한 일이라고는 해도 말이다.

“그럼 ‘단기’로 영애를 도울 분은 벤더펠트 공작 부인으로 괜찮으시겠습니까?”

드한이 확인 사살에 나섰고, 르네브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벤더펠트 공작 부인같이 내면이 단단한 사람을 곁에 둘 수 있다는 건 르네브에게도 좋은 일이었으므로.

“그럼 내일부터 귀부인께서 황궁으로 출근하실 수 있도록 조치를 하겠습니다.”

***

전략 회의를 마친 이카르는 막사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푸드덕거리며 검은 새가 날아왔다.

“드한에게서 답장이 온 모양입니다.”

곧 검은 새가 베인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베인이 서둘러 새의 다리에 묶인 쪽지를 풀어서 펼쳤다.

“……!”

내용을 확인한 베인이 요란스럽게 헛숨을 들이켰다.

“무슨 일 있나?”

자연히 이카르의 고개가 베인 쪽으로 돌아갔다.

베인은 최근 들어 이카르의 얼굴을 보며 자주 히죽거렸는데, 지금은 그보다 더했다.

빙글빙글 웃는 베인의 낯짝을 보고 있자니 이카르의 미간에 절로 주름이 잡혔다.

그러나 그런 이카르의 반응에도 베인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폐하!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한껏 으스댈 분위기 만발인 베인 때문에 이카르의 미간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베인.”

“예. 폐하.”

“여기가 전장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도록.”

이카르가 낮게 경고하자 그제야 베인이 주변을 힐끔거렸다.

한동안 잠잠하던 솔티군에서 기습 공격을 해 온 게 불과 며칠 전 일이었다.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한 병사들의 안색은 초췌했고, 눈빛은 퀭했다.

하늘로 치솟았던 베인의 얼굴 근육도 중력의 흐름을 따라 제자리로 돌아왔다.

“시정하겠습니다. 폐하.”

베인의 히죽거리던 표정도 이내 무감하게 돌아왔다.

이카르는 만족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인데?”

“뭐…… 별일 아닙니다. 그저 폐하의 상처에 관한 이야기를 전했을 뿐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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