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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자각 (70/148)


#70화 자각
2023.06.09.


“레이디, 혹시 일이 많이 힘드신가요? 아니면, 오늘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키어넨이 르네브의 앞에 찻잔을 놓아 주며 물었다. 르네브는 잠시 눈을 깜빡이다 찻물을 들이켰다.

너무 뜨겁지도 그렇다고 차갑지도 않은 마시기 딱 적절한 온도에서 자신을 향한 키어넨의 배려가 묻어났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게 말씀해 주시겠어요?”

“의식하지 못했는데 조금 힘들던 걸지도 모르겠네요.”

사실 오늘 이상하게 마음이 답답했다. 불안한 것 같기도 하고, 긴장된 것 같기도 하고.

이런 적이 처음이라 뜻 모를 불안감이 생소할 따름이었다.

“사실…….”

키어넨에게 지금의 기분 상태를 말할까 하다가 르네브는 곧 그만두었다.

“그냥 계속 쉬다가 갑자기 큰일을 맡아서 조금 긴장했던 것 같아요.”

“단 음식이라도 드시면서 조금 쉬세요.”

키어넨이 속상한 표정을 지으며 은쟁반 위의 타르트를 가리켰다.

조금 출출했던 터라 르네브는 포크로 끝 표면을 살짝 떠먹었다. 혀끝에 설탕 특유의 단맛이 감돌았다.

평소 단 음식을 즐기지 않는 르네브였지만, 이건 제법 입에 맞았다. 르네브는 타르트를 조금 더 떠먹고는 물었다.

“앰버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나 봐요?”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마침 앰버가 돌아왔다.

“아가씨, 저 왔어요…….”

앰버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로 비적비적 걸어왔다.

“오늘도 고생 많았어요. 디저트와 차 좀 드세요.”

키어넨이 얼른 그런 앰버를 다독였다.

르네브는 사이좋게 디저트를 나눠 먹는 두 사람을 두고 욕실로 향했다.

이카르가 떠나고 없었지만, 황제의 욕실은 언제 어느 때든 사용할 수 있도록 온수를 돌리고 있었고, 르네브는 그 덕을 톡톡히 보고 있었다.

뜨끈한 욕조에 몸을 푹 담그고 있자, 하루의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았다.

르네브는 세차게 떨어지는 물소리를 백색 소음 삼아 고요한 정적을 즐겼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이런저런 생각들이 올라왔다.

과거의 일부터 오늘 있었던 일, 내일 해야 할 일. 그리고 그 모든 일 중에서 가장 신경 쓰이는 건 바로 이카르의 부상 소식이었다.

‘많이 다친 거면 어떡하지?’

점심 이후에도 내내 신경 쓰였기에 드한에게 살짝 물어봤지만, 그는 대충 얼버무리기만 할 뿐 제대로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게 더 르네브를 불안하게 했다.

‘아무래도 크게 다친 것 같은데…….’

답답했다. 그러다 불쑥 의문이 들었다.

대체 왜 자신이 온종일 이카르의 부상에 대해 신경 쓰는지.

그 답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이카르는 바슈케르의 황제이고, 자신은 바슈케르의 인질이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에라도 이카르가 크게 다쳐 죽기라도 한다면 앞일을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모르는 건 두렵기 마련이다.

아마 원작에도, 회귀 전에도 없었던 미래에 대한 불안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는데 가슴께에서 원인 모를 통증이 일었다.

이카르가 죽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자 또다시 날카로운 송곳으로 가슴을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그뿐이 아니었다.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었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르네브는 미간을 모았다.

“왜 이러지…….”

르네브는 멜리타와 상의를 해 보는 게 좋겠다고 판단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내일은 꼭 드한에게 이카르의 부상 정도에 대해 알아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다음 날 르네브가 막 집무실로 들어섰을 때, 드한이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척, 양피지를 내밀었다.

“드한 경. 이게 뭐예요?”

“많이 힘드신 것 같아서 영애를 도와줄 사람을 들일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단 제가 명단을 뽑아 봤습니다.”

르네브는 양피지를 받아 내용을 확인했다.

그 속에는 이름들이 적혀 있었는데 이름 옆에는 성격과 떠도는 소문, 특기 등이 적혀 있었다.

그뿐 아니라, 속한 가문의 바슈케르 내 영향력과 그 가문과 이카르의 관계까지도 상세히 적혀 있었다.

대체로 이카르와 우호 관계에 있는 가문의 사람들이었다.

“문서로만 결정하시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듯하여 초상화도 준비해 두었습니다.”

드한의 말대로 집무실 한쪽 벽면에는 귀족 여성들의 초상화가 쭉 나열되어 있었다.

“아…….”

처음에는 일손을 거들 사람이 생긴다는 사실에 조금 기뻤으나, 르네브는 이내 깨달았다.

‘지금 나 보고 시녀를 들이라는 거잖아!’

바슈케르 귀족 시녀를 들인 라이나의 레이첼 왕녀와 달리 르네브는 따로 시녀를 두지 않고 있었다.

어차피 곧 돌아갈 사람이니까.

자신이 한 번 인연을 맺으면 쉽게 끊어 내지 못하는 성격이라는 걸 잘 알기에 그렇게 했다.

그리고 지금 드한은 르네브가 바슈케르에 조금 더 정을 붙이도록 유도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자 드한을 바라보는 르네브의 눈초리가 절로 뾰족해졌다.

은근슬쩍 제 입맛대로 자신을 통제하려 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왜, 왜 저를 그런 눈으로 쳐다보십니까?”

드한이 당황하며 물었고, 르네브는 어찌할까 잠깐 고민했다.

혼자서 건국제를 총괄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르는 게 사실이었다.

게다가 르네브는 최근 들어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을 드한에게 보여 주고 말았다.

큰 실수는 아니었으나 자잘한 실수가 조금 있었다. 드한을 돕기 시작했을 때와는 분명 다른 모습을 보인 셈이었다.

그게 위태롭게 보인 모양이다.

그러니 서둘러 시녀를 들여 일을 분담하게 하려는 거겠지.

르네브는 할 수 없이 초상화 속 인물을 천천히 뜯어봤다.

“드한 경이 가장 추천하는 인물은 누구인가요?”

르네브의 긍정적인 반응에 드한은 베시시 웃으며 초상화를 하나씩 지목하며 설명을 덧붙였다.

찬찬히 드한의 설명을 듣고 르네브는 초상화 한 점을 가리켰다.

그녀는 벤더펠트 공작 부인으로,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이 떠난 바슈케르 사교계를 장악할 인물이었다.

“이분이 좋을 것 같네요.”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물론 추천 목록의 분들 모두 심사숙고해서 엄선한 분들이긴 하지만요.”

드한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제 뜻대로 된 것이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단, 조건이 있어요.”

르네브가 조건을 달자마자 드한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조건이라 하시면?”

“건국제 동안에만 단기로 일을 거드는 걸로 하죠. 황궁 소속 시녀로 말이죠.”

잠시 망설이던 드한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직접 만나 보실 수 있도록 당장 약속을 잡아 두겠습니다.”

마음이 급했는지 드한이 곧장 문 쪽으로 걸어갔다.

“드한 경? 잠깐만요.”

문손잡이를 잡은 채로 드한이 몸을 돌려 르네브를 쳐다봤다.

“폐하께서 어디를 얼마나 다치신 건지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완전히 르네브 쪽으로 몸을 돌린 드한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생명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크게 다치신 건가요?”

그 말을 함과 동시에 또다시 가슴께에 찌르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멜리타부터 만나 볼 걸 그랬나.’

르네브는 가슴께를 문지르며 드한의 대답을 기다렸다.

“대답해 드리기 전에 저도 영애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드한이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을 했다. 르네브는 조금 긴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폐하의 부상 소식에 그렇게 연연하시는 겁니까?”

예상치 못한 드한의 질문에 르네브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제가 왜 이토록 이카르의 부상을 신경 쓰는지 바로 답이 나오지 않았다.

“……당연한 게 아닐까요? 저는 바슈케르에 유학을 와 있고, 저를 초청한 분은 현 황제 폐하이시죠. 그러니 제 안위를 신경 써 주실 분 또한 현 황제 폐하시고요.”

드한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의 부상 소식이 영애를 불안하게 만든 모양이군요.”

확실히 르네브가 사소한 실수를 하기 시작한 건 이카르의 부상 소식이 들려온 다음부터였다.

드한은 원인을 정확하게 짚어 낸 셈이었고, 르네브도 딱히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이카르의 부상에 대해 곱씹는 시간이 많아진 건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무슨 일이 생기든 영애의 안위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폐하께서는 혹시 모를 만약의 사태를 미리 대비해 두셨거든요.”

“혹시 모를 만약의 사태라 하시면……?”

“가령, 폐하께서 전장에서 승하셨을 때를 말하는 게 되겠군요.”

드한이 제 주군의 죽음을 입에 담는 것치고는 상당히 담백한 표정으로 말했다.

르네브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때 다시 가슴께에 찌르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그때를 대비한 절차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그 부분에 대해선 염려 놓으셔도 괜찮습니다.”

“…….”

“세간에서 떠는 것과 달리 폐하께서는 초청한 귀빈들을 중시 여기고 계십니다. 자국을 위해 숭고한 희생을 했다고 생각하고 계시죠.”

드한이 빙긋 웃으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럼 이제 영애께서 이토록 폐하의 부상 정도에 관심을 가지시는지 그 이유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채근하는 듯한 드한의 눈빛에 르네브는 살짝 시선을 떨어뜨렸다.

‘이유라…….’

좀 전에 말한 대로라면 이카르가 죽더라도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 그러니 온종일 이카르의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그간 알게 모르게 정이 든 탓에 전장으로 떠난 이카르의 안녕을 바랄 수는 있겠지만.

‘그런데 왜 이렇게 계속 이카르가 신경 쓰이는 걸까.’

의외로 답은 간단히 나왔다. 아니, 사실 진즉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이미 이카르에게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그저 계속 부정하고 밀어내려 했을 뿐이라는 걸.

하지만 드한에게 그런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이거 제가 영애를 너무 몰아붙인 모양입니다. 실례했습니다.”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던 드한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저는 아까의 그 일정으로 잠시 자리를 비워야겠습니다.”

드한이 그대로 집무실을 나갔고, 혼자가 된 르네브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안 되는 걸 알면서 이미 이카르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는 걸 자각하고 나자 이전보다 훨씬 마음이 심란했다.

‘어쩌지.’

회귀 전과 같은 경험을 또 하고 싶지는 않았다.

루시우스와 이카르는 분명 다른 사람이라는 걸 잘 안다. 파라디움과 바슈케르의 문화가 다르다는 것도.

하지만 과거의 경험이 르네브의 발목을 잡았다.

전처럼 자신의 아이를, 카엘을 눈앞에서 빼앗기는 경험을 다시 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동시에 르네브는 그녀 자신을 잘 알았다.

한 번 마음을 주면 상대가 자신을 피폐하게 만들더라도 쉽게 잡은 손을 놓지 못한다는 것을.

‘방법을 찾아보자.’

황후가 되어서도 자신과 제 아이를 지킬 만한 방법을, 이카르의 마음이 변하더라도…….

“……!”

거기까지 생각하다 르네브는 문득 깨달았다.

자신이 루시우스와 이카르를 동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과거의 불행한 경험으로 오지 않은 미래까지 단정 짓고 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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