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화 폐하 부상, 심각 (69/148)


#69화 폐하 부상, 심각
2023.06.08.


이카르는 여러 객체 중 가장 몸집이 큰 놈을 눈으로 좇다 곧바로 놈을 향해 달려들었다.

날렵하게 날아오른 이카르는 정확하게 놈의 급소에 검날을 찔러 넣었다.

놈이 기이한 울음소리를 내며 이내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울프들이 빠르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카르의 예상대로였다.

울프들은 대장이 죽으면 퇴각하는 습성을 지녔다.

이로써 오늘 더는 막사를 습격하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무리로 합류한 울프들은 곧 새로운 왕을 뽑을 것이고, 이곳에 먹을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다시 모습을 드러낼 터였다.

그러니 지금 처리해 두는 편이 좋았다.

지혈이 부족했는지 뺨에서 미지근한 무언가가 흐르는 느낌이 났다. 이카르는 손등으로 그것을 찍어 누르며 말했다.

“추격해서 정리하도록.”

“예! 폐하.”

베인과 황실 기사단이 도망치는 울프 무리의 뒤를 쫓았다.

이카르가 막사로 돌아와 갑옷을 갖춰 입고 전투태세를 취했을 즈음, 베인과 황실 기사단이 돌아왔다.

“어떻게 됐지?”

“잘 처리했습니다. 본거지를 찾아내 남은 놈들도 정리하겠습니다.”

이카르와 함께 오랜 용병 생활을 해 온 베인은 후처리까지 확실했다. 이카르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은 정리됐다. 취사병들이 목숨을 걸고 지킨 식사니 배불리 먹도록.”

이카르는 짧게 상황이 종료됐음을 알리고는 몸을 돌렸다.

몸이 무거워질 것을 대비해 이카르는 병사들에게 적당량의 식사만 권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때 아닌 울프의 습격으로 아침부터 신경이 곤두선 병사들을 다독일 필요도 있었다.

“폐하. 설마 다치셨습니까?”

베인의 물음에 이카르는 손등으로 뺨을 찍어 누르며 몸을 돌렸다.

“별거 아냐.”

면도하다 벤 것이었지만, 혹여 조금 전에 상처를 입은 것으로 오인하면 큰일이었다.

베인은 이 일을 드한에게도 알릴 것이고, 이는 놀림감이 될 수도 있었다.

순간 베인의 눈빛이 기이하게 번뜩였으나, 이카르는 이를 보지 못했다.

막사로 돌아오자 취사병 하나가 음식이 담긴 접시를 내밀었다.

“폐하,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큼지막한 고기와 채소가 들어간 수프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고, 딱딱한 비스킷 대신 부드러운 빵이 곁들여져 있었다.

황제의 식사라기엔 소박했으나, 장기전을 대비해 이카르는 식량을 아껴 두어야 한다고 판단했고, 이는 그 결과였다.

“감사합니다. 폐하 덕분에 제 목숨도 지키고, 귀한 식재료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폐하.”

취사병이 연신 허리를 숙였고, 이카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베인이 그만 나가보라 눈짓을 보냈을 때가 돼서야 취사병이 막사를 빠져나갔다.

“폐하, 오늘 중으로 황궁에 전령 새를 보낼까 하는데, 따로 전달할 내용 있으십니까?”

어제 업무상 필요한 내용은 보낸 참이었다. 그러니 베인이 말하는 건 개인적인 내용일 것이었다.

“딱히 없군.”

이카르는 짧게 대답하고는 숟가락을 들었다.

“부상 소식을 전할까 하는데요…….”

이카르의 눈치를 살피며 베인이 말했다. 동시에 이카르의 한쪽 눈썹이 비죽 올라갔다.

“부상이라니?”

드한이 눈짓으로 이카르의 뺨을 가리켰다.

“폐하의 뺨에 난 상처 말입니다.”

“난 또 뭐라고.”

이카르는 대수롭지 않게 빵을 입에 넣었다.

드한과 베인은 이카르의 이기적일 정도로 강인한 체력과 압도적인 검 실력에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도 내심 의문을 품었다.

황가의 핏줄에는 뭔가 남다른 게 있다고 말이다. 그 때문에 흔한 감기 한번 앓지 않고, 상처를 입는 일 또한 없는 거라고.

물론 황실 추격대를 이카르 혼자서 맞닥뜨렸을 때를 제외하면 말이다.

이카르의 뺨에 난 상처가 여간 신기했는지 뺨에 와 닿는 베인의 시선이 뜨거웠다.

“마음대로 해.”

이카르는 별생각 없이 그렇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러나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베인의 얼굴이 싱글벙글했다.

그 표정을 보고 있자니 약간 불안했지만, 이카르의 생각은 곧 울프 토벌 문제 쪽으로 옮겨 갔다.

***

르네브는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샌드위치로 급하게 식사를 때우는 드한을 보며 물었다.

“항상 이런 것만 드시는 거예요?”

“아…….”

큼지막한 샌드위치를 입안으로 욱여넣으려던 드한이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이게 다 폐하 때문입니다!”

르네브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물론 르네브도 황후로 지낼 적에는 너무 바쁜 나머지 제때 식사를 챙기지 못하긴 했다.

대충 간단히 먹고 일을 하기 바빴지.

하지만 이카르가 제대로 먹지 말고 일만 하도록 종용하진 않았을 것 같았다.

만약 그랬다고 하더라도 지금 여기에 이카르는 없었다. 그러니 이카르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폐하 때문이라니요?”

“사실 말이죠, 폐하께서는 무언가에 한 번 집중하면 주변을 잘 돌아보지 않으시는 습관이 있습니다.”

르네브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그런 편이었기에, 이카르가 쉽게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 폐하께서 계실 때는 대부분 제시간에 맞춰 식사하는 게 어려웠죠. 그마저도 대충 빨리 먹고 일을 할 수 있는 것만 먹었고요.”

드한이 고자질 아닌 고자질을 하며 약간 울먹였다. 말하면서 서러운 모양이었다.

“그게 저도 습관으로 굳어 버린 모양입니다.”

“그럼 이제부터라도 그 습관을 바꿔 보죠.”

르네브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밖으로 따라 나오라고 눈짓했다.

먹으려던 샌드위치와 밀린 서류를 힐끔거리던 드한이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르네브는 드한을 데리고 다이닝 룸으로 향했다.

“균형 잡힌, 제대로 된 식사를 준비해주세요.”

르네브의 당당한 요구에 시종이 조금 당황한 듯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대답했다.

“금방 준비해 올리겠습니다.”

드한과 건국제 준비 이야기를 조금 나누고 나자 금세 테이블 위에는 저녁 만찬 못지않은 식사가 차려졌다.

“얼마 만에 제대로 된 점심을 먹어 보는지 기억도 잘 안 납니다.”

드한이 감격에 젖은 얼굴로 식기를 들었다.

그렇게 여유롭게 점심을 즐기고 있을 때였다.

툭툭.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뭐지?’

르네브는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볼이 빵빵해지도록 음식을 밀어 넣던 드한이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는 말했다.

“전령 새가 온 모양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드한이 창가로 다가갔다.

‘아, 저 소리였구나.’

검은 새가 부리로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드한이 창문을 열고 검은 새의 다리에 묶인 쪽지를 풀어내곤 먹이를 조금 챙겨 줬다.

창가에 앉아 먹이를 쪼아 먹는 새를 바라보는데 드한이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왜 그래요, 드한 경?”

“영애! 이것 좀 보십시오!”

드한이 다급하게 르네브 쪽으로 걸어오며 쪽지를 내밀었다. 그러곤 쪽지의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폐하 부상, 심각.」

르네브는 그 외의 다른 내용을 읽어 보려 했으나, 중요한 내용이라도 담겨 있는 건지 드한이 빠르게 쪽지를 거둬들였다.

어쩌다가 다쳤느냐는 물음은 무의미했다.

이카르가 있는 곳은 전장이었고, 전장은 하루에도 수십에서 수백의 생명이 꺼져 가는 곳이었으니까.

“어디를 얼마나 다치신 건가요?”

르네브의 물음에 드한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쪽지까지 보여 줘 놓고 이제 와 내외하는 드한의 모습에 조금 서운했지만, 르네브는 그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파라디움의 사람이었고, 황제의 부상 소식은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을 만큼이나 중요한 문제일 수 있었다.

이 소식은 절대로 솔티에 들어가서는 안 되었다.

“쪽지의 내용은 전부 확인하셨나요?”

“물론입니다.”

“그럼 태워 버리는 게 좋겠네요.”

르네브의 말에 드한이 곧장 쪽지를 벽난로 속에 던져 넣었다.

화르륵.

장작불이 옮겨붙은 쪽지가 금세 타들어 갔다. 이내 쪽지는 원래의 형체는 온데간데없이 재로 변했다.

그 모습을 함께 지켜보던 르네브는 드한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런데 드한의 시선이 마치 자신을 탐색하는 것 같았다.

‘왜 그러지?’

잠시 고민한 르네브는 드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입이 제법 무거운 편이에요. 이 일은 절대로 외부에 발설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황궁에서 듣지 말아야 할 것,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이들이 감쪽같이 사라지는 것을 제법 보았기에, 르네브는 빠르게 함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순간은 드한이 이카르의 부상이라는 뜻밖의 소식에 너무 놀라 르네브에게 이 사실을 전했을 수 있다.

하지만 곧 후회할 수도 있었다.

이런 중요한 소식을 외부인에게 알렸다고 말이다.

물론 말만 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기에, 행동으로 보여 줄 생각이었다. 이카르의 비밀 호위가 아직도 황궁 안에 있는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해 주시면 감사하지요.”

드한이 조금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마치 이게 아닌데? 하는 듯한 표정으로.

‘뭐지?’

***

드한과 점심을 먹고 나서도 한참, 건국제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를 보낸 끝에 르네브는 침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어서 오세요, 레이디. 오늘도 고생 많으셨어요.”

키어넨이 르네브를 반기며 편안한 슬리퍼를 가져왔다.

르네브는 소파에 앉아 예쁘지만 불편한 구두 대신 편안한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그것만으로도 발의 피로가 약간 가시는 기분이었다.

“고마워요.”

르네브는 싱긋 웃으며 키어넨을 쳐다봤다. 미소가 옮기라도 한 듯 키어넨도 활짝 웃으며 물었다.

“레이디, 식사는 하셨어요?”

“먹었어요. 키어넨은요?”

“저도요. 그럼 따뜻한 차를 준비해 올까요?”

“부탁해요.”

“금방 가져올게요.”

키어넨이 응접실을 나가자, 완전히 혼자가 된 르네브는 소파에 편히 뒷머리를 기댄 채로 눈을 감았다.

오늘 처리한 일에 빈틈은 없었는지 돌이켜 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실수는 없었다.

‘그럼 내일은…….’

내일 해야 할 일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는데 점심 식사 때의 일이 떠올랐다.

‘심각한 부상이라니.’

이카르의 부상 소식을 곱씹던 르네브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를 얼마나 다쳤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가벼운 상처는 아닐 게 분명했다.

‘쪽지에도 심각하다고 적혀 있었고.’

회귀 전의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회귀 전엔 이카르의 부상 소식을 전혀 접한 바가 없었다.

물론 이카르가 감추려 든다면 얼마든지 외부로 새어 나가지 못하도록 했겠지만.

‘어쩌면 회귀 전과 상황이 달라진 걸지도 모르겠어.’

일단 르네브부터가 회귀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으니 가능성 없는 추측은 아니었다.

‘크게 다친 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는데 키어넨이 다가와 물었다.

“레이디. 괜찮으세요?”

르네브는 키어넨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깜빡였다.

“뭐가요?”

“계속 한숨을 쉬시기에 여쭤봤어요.”

키어넨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찻잔에 찻물을 부었다.

“제가…… 그랬나요?”

“네.”

키어넨의 대답에 르네브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한숨을 쉬었다는 자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