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
(66/148)
68화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
(66/148)
#68화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
2023.06.07.
르네브가 황제의 집무실에서 드한을 돕게 된 건 이카르가 출정한 이후 몇 달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르네브의 건강을 확인하려 멜리타가 찾아왔을 때의 일이었다.
“이번에도 건강에는 아무 이상이 없는 것 같네요. 영애는 매우 건강하세요.”
멜리타가 시원스럽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르네브도 그녀를 따라 마주 미소 지었을 때였다.
키어넨이 디저트와 차를 내왔다.
차는 키어넨이 직접 우린 것이었으나, 디저트는 이번에도 황제 전속 요리장의 솜씨였다.
멜리타는 진료가 끝났음에도 돌아가지 않고, 키어넨이 내온 찻잔을 들었다.
“차 맛 좋고.”
그간 몇 차례 같이 디저트도 나눠 먹고, 대화를 나눴더니 이제는 검진이 끝나면 자연스럽게 이런 흐름으로 이어졌다.
“역시 디저트도 맛있네요.”
구겔호프를 한 입 떠먹은 멜리타가 엄지를 척 들어 올리며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다행이네요.”
르네브는 작은 접시에 키어넨과 앰버의 몫을 조금 덜어 낸 뒤에야 구겔호프를 조금 떠먹었다.
“영애 최근 드한 경을 본 적 있으세요?”
멜리타의 말에 르네브는 고개를 저었다.
“최근엔 뵌 적 없었어요. 그건 왜 물으세요?”
“말도 마세요. 피골이 상접한 몰골이라니까요. 곧 과로사로 죽지는 않을지…….”
멜리타의 말에 르네브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고 꿀을 넣은 달달한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이카르가 베인과 함께 출정한 뒤 모든 업무는 드한이 떠맡은 모양이었다.
“뭐, 하지만 처음도 아니니 잘하시겠지만요.”
“처음이 아니라고요?”
“폐하께서는 황제가 된 직후 직접 군사들을 이끌고 주변국들을 정리하셨죠. 그러니 드한 경이 혼자 업무를 떠맡은 것도 이번이 처음은 아니에요.”
원작의 이맘때 이카르는 없는 인물이었다. 루시우스의 열등감을 자극하고, 성장시키는 인물로 그 역할을 다했으니까.
회귀 전 르네브는 루시우스와 결혼 후에도 한동안은 외교 문제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루시우스가 황위에 욕심을 내면서 어쩔 수 없이 주변국의 상황에 관심을 두게 되었지.
그리고 아직은 원작의 시작 전이었다.
“그랬겠네요.”
“드한 경은 폐하께서 출정을 나가실 때마다 활기와 생기를 불어넣은 묘약을 제게 부탁하시고는 하세요.”
“묘약이요?”
“불법 약물이나 그런 건 아니에요. 단지 피로를 조금 풀어 주도록 혈액 순환을 돋는 정도니까요. 하지만 플라시보 효과가 제법 있었는지 드한 경이 계속 묘약을 찾으시더라고요.”
르네브는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 드한의 고충을 모르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요즘엔 그것도 별 효과가 없는지…….”
멜리타가 잠깐 말을 멈추고 르네브를 흘낏 보며 말을 이었다.
“살려 달라고 하시지 뭐예요?"
멜리타는 조금 남은 구겔호프 조각을 입에 넣고 우물거렸고, 르네브는 홍차로 입안을 헹궜다.
그리고 멜리타가 왜 제게 이런 말을 했는지 의도를 파악했다.
‘별 의미 없이 한 말일까? 아니면…….’
그냥 최근 자신 주변의 일을 이야기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말을 꺼낸 것일 수도 있었다.
르네브는 후자라고 판단했다.
사실 얼마 전 앰버도 비슷한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가씨. 요즘 드한 경의 일이 정말로 바쁜 모양이더라고요.’
그때는 그냥 앰버가 황궁을 돌아다니며 들은 이야기를 했겠거니 싶었지만.
“멜리타 양. 혹시 드한 경께 뭔가 부탁을 받으셨나요?”
지긋한 르네브의 시선에 홍차를 마시던 멜리타가 화들짝 놀랐다.
“……너무 티가 났을까요?”
“네, 좀 많이요.”
“눈치채셨다니 그냥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게 낫겠네요.”
멜리타가 손수건으로 입을 닦으며 덧붙였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다면서, 일 잘하는 사람이 있다면 추천 좀 해 달라고 하시더라고요.”
“그게 저인 건가요?”
르네브는 검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네.”
직접 부탁하지 않고, 은근히 주변 사람을 통해 제 어려움을 토로하다니.
조금 괘씸했지만, 르네브는 드한을 찾아갔다.
그 결과, 조금 돕기로 했던 게 이제는 거의 매일 집무실에 출근 도장을 찍게 되었다.
다행히 드한이 요구한 것들은 회귀 전 황후의 일과 비슷했고, 르네브는 큰 어려움 없이 죽음의 문턱에서 허덕이는 드한을 도울 수 있었다.
“영애. 곧 있을 건국제 말입니다.”
드한의 절절한 목소리와 표정에서 르네브는 뜻 모를 불안을 느꼈다.
“사실 제가 폐하의 일만으로 너무너무 바빠서 그런데, 영애께서 도맡아 주실 수 있으십니까?”
거의 애원하는 듯한 드한을 보며 르네브는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드한의 업무는 과중했다.
그가 빠른 두뇌 회전과 현명한 일머리를 가지지 못했다면 지금쯤 청년 과로사를 당했을 거라는 생각이 합리적일 만큼.
“제발! 영애. 제발, 부탁드립니다.”
대답하지 않고, 망설이는 르네브를 보며 드한이 거의 울부짖듯 말했다.
“사람 하나 살리는 셈치고…….”
“……알겠어요.”
르네브의 입에서 허락이 떨어지자, 드한의 표정이 싹 변했다. 일견 감격에 젖은 듯도 했고, 구원자를 목도한 신도 같기도 했다. 그게 좀, 소름 돋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영애. 제가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고, 갚겠습니다.”
르네브는 속으로만 한숨을 삼켰다.
‘설마, 이것도 이카르의 계략은 아니겠지?’
자신을 황후로 만들기 위해 미리 황후의 일을 맡기는 것으로 말이다.
보통은 황태자와 약혼한 시점부터 황후가 될 준비를 시작한다.
황후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물론이고, 귀족들을 대하는 방식, 말투, 예법 등등.
기존의 것을 모두 버리고 거의 새롭게 태어나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대체로 황태자의 약혼녀는 일찍이 결정하는 것이 관례였다. 어릴 때부터 황후로서의 교육을 받아 두는 편이 좋으니까.
하지만 르네브는 바슈케르에서 나고 자라지도 않았고, 황후의 교육 같은 건 받아 본 적이 없었다.
물론 회귀 전에는 속성으로 황후 교육을 받긴 했지만.
“정말 감사합니다. 영애. 영애는 제 구원자십니다!”
그 후로도 수차례 드한에게 감사 인사를 들은 뒤에야 르네브는 책상에 앉아 오전 업무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이카르는 잘 있으려나.’
***
언제나 그랬듯 전장은 참혹했다. 의무실로 사용되는 막사에는 어제의 전투로 부상을 입은 병사들이 간이침대에 누워 있었고, 의무병들이 돌아가며 부상자들을 돌봤다.
이카르는 의무병에게 사망자와 부상자의 상황을 확인하고는 죽음의 냄새가 나는 막사를 빠져나왔다.
“오늘은 잠잠하군.”
이카르는 저 멀리 보이는 솔티의 군영을 바라봤다. 베인 또한 이카르와 같은 곳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의 전투로 타격이 클 테니, 오늘은 얌전히 있으려는 모양입니다. 이 틈에 식사라도 하시죠, 폐하.”
이카르는 개인 막사로 돌아와 마른 육포와 단단한 비스킷을 조금 먹고는 포도주로 마른 목을 축였다.
배가 부르게 먹으면 전투에 지장을 줄 수 있기에 죽지 않을 정도로만 먹고, 쓰러지지 않을 정도로만 약간의 잠을 자야 했다.
물론 그나마도 적의 공격이 없을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마찬가지로 제 몫의 식사를 마친 베인이 염려 섞인 눈빛으로 이카르를 쳐다봤다.
“폐하,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저도 조금은 자 둘 생각입니다.”
황궁에서는 곤란하기만 하던 불면이 전장에서는 오히려 득이었다.
잠을 자지 않고도 크게 피로를 느끼지 못하는 강인한 몸 덕에 이카르는 바슈케르의 지휘관으로서 솔티군의 공격에 재빨리 대처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뭐든 지나치면 독이 되듯이, 가수면이라도 취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머리는 살짝 멍했고, 귀에서도 미약하게 이명이 들려왔다.
“병사들이 교대로 쉴 수 있도록 지시를 내리도록.”
“예, 폐하.”
꾸벅 허리를 숙인 베인이 막사를 떠났다.
이카르는 간단히 씻고, 다시 막사로 돌아와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황궁에 있는 침실과는 비교도 되지 못할 만큼 침대는 딱딱했다.
하지만 몸을 뉘자마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이카르는 잠기운이 내려앉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살짝 틀어 옆을 쳐다봤다.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도 옅은 빛을 머금은 작은 장식품이 보였다.
르네브에게서 받은 생일 선물이었다.
다른 문화권에서는 드림 캐처와 같은 역할을 하는 물건으로, 최근 이카르는 침대맡에 놓인 르네브의 선물을 바라보다 잠드는 습관이 생겼다.
오늘도 쉽게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전쟁을 치르며, 이카르는 혼자가 되면 종종 솔티와의 종전 후를 그렸다.
황후가 된 르네브와 그녀를 꼭 닮은 예쁜 딸.
상상으로밖에는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가족이 생긴다는 게 정확하게 어떤 느낌일지.
하지만 그 생각을 하고 있으면 극도로 예민해진 신경이 조금은 편안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아…….”
르네브를 떠올리자, 얼른 전쟁을 끝내고 황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절실해졌다.
또 자연스럽게 몸이 반응을 보였다.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 힘들 만큼 피곤한데도 말이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이카르는 치솟은 열기를 달래야 했다.
***
새 지저귀는 소리에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있던 정신이 돌아왔다.
약간의 수면만으로도 정신이 맑아지고, 내내 귓가를 맴돌던 이명도 사라진 상태였다.
이카르는 다시금 수면의 중요성을 깨달으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거울에 비친 얼굴도 혈기를 되찾은 상태였다.
“면도해야겠군.”
전장에 잘 보일 사람은 없었지만, 멀끔한 지휘관의 모습을 유지하는 편이 다른 병사들의 사기에도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이카르는 거품 칠을 한 턱선을 따라 면도날을 미끄러뜨렸다.
그때 청량한 새벽 공기에 실린 고소한 냄새가 풍겨 왔다. 어제 하루 쉰 덕에 취사병들이 솜씨라도 발휘하는 모양이었다.
며칠 만에 식사다운 식사를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찰나였다.
“……?”
밖에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흠칫 놀란 탓에 날카로운 면도날에 살갗을 긁혔다.
금방 흰 거품 위로 핏방울이 옅게 배어 나왔다. 상처 부위로 비누 거품이 스며들었다.
쓰라린 감각에 이카르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이카르는 깨끗한 수건으로 거품을 닦아 내고는 베인 살갗을 꾹 눌러 지혈했다.
막사 밖으로 나가자 검을 뽑아 들고 어딘가로 달려가는 병사가 보였다.
“무슨 일이지?”
“폐하! 음식 냄새를 맡고 울프 무리가 몰려든 것 같습니다.”
“저쪽인가?”
“예! 폐하.”
이카르는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고 병사들이 향하는 쪽으로 달려갔다.
“수가 제법 많군.”
취사병들은 애써 만든 요리를 지키기 위해서, 전투병들은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 저마다의 방식으로 울프 무리와 싸우고 있었다.
“폐하!”
소식을 듣고 달려온 베인이 이카르의 앞을 막아섰고, 황실 기사단 여럿이 보호하듯 이카르 주위를 에워쌌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황실 기사단장의 물음에 이카르는 코웃음 쳤다.
‘그까짓 짐승 몇 마리 나타났다고 이 소란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