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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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화 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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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화 빈집
2023.06.06.
솔티 왕국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은 접했지만, 황제가 직접 출정한다는 건 또 다른 이야기였다.
“뭔데 그러슈?”
“아이고, 깜짝이야!”
근처에 있던 허리 굽은 노인이 사내의 등 뒤로 다가와 양피지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놀라게 했다면 미안하네. 그런데 무슨 소식이요?”
“난 다 봤으니 할인해서 드릴 수는 있소.”
“얼마에 넘길 거요?”
사내가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였다.
“흥정은 안 합니다.”
그렇게 황제의 출정 소식은 나름의 방법으로 바슈케르 전역으로 번져 나갔다.
그리고 이 소식은 곧 다른 국가들에도 전해졌다.
“일이 꽤 재밌게 돌아가네요.”
파라디움의 황비 넬리아가 청포도 한 알을 황제의 입에 넣어 주며 말했다. 황제는 포도 알맹이를 씹으며 코웃음 쳤다.
“이럴 줄 알았지.”
“솔티? 아니면 바슈케르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뭐 솔티의 왕도 그렇지만 바슈케르의 건방진 황제 말이오. 말이 좋아 평화 협정이지 결국, 단순한 겁박이었잖소.”
황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포도주를 단번에 들이켰다. 어지간히 목이 탔는지 잔은 금세 텅 비어 버렸다.
황비는 얼른 곁에 선 시종에게 눈짓했고, 시종이 빈 잔에 포도주를 가득 따랐다.
“솔티 다음은 베니스탄일까요, 라이나 일까요?”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으며 황비는 청포도 한 알을 황제의 입가에 가져갔다. 황제가 황비의 얼굴을 힐끔 보더니 청포도를 낼름 받아먹었다.
“바슈케르의 건방진 황제가 솔티 다음으로 치려는 곳 말이요?”
“인질을 앞세운 평화가 오래갈 리 없지 않겠어요?”
황비와 나눌 대화 주제로는 적절치 않았지만, 어떻게든 정보를 알아보려 애쓰는 황비가 귀여웠기에 황제는 기꺼이 입을 열었다.
“사실 중요한 건, 솔티 다음이 베니스탄이냐 라이나냐 하는 게 아니오.”
“……?”
“바슈케르의 황제가 애초에 평화 협정을 제안한 이유는 굳이 무력을 쓰지 않고도 소국 정도는 손쉽게 제압할 수 있다는 걸 은연중에 드러내기 위함이었겠지만, 공격할 명분이 주어지자마자 돌변한 태도를 보면 그 본질은 날강도와 다름이 없지.”
황제가 혀를 쯧, 찼다.
“바슈케르 황제의 최종 목적지가 파라디움이라는 말씀이신 건가요?”
황비가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겠지만 그 부분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소. 바슈케르는 여전히 파라디움의 서부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있으니.”
“…….”
“그러니 어떻게든 솔티와 라이나를 먼저 점령한 다음 파라디움의 남부와 북부로 밀고 들어오겠다는 속셈이 아니겠소?”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황비가 돌연 의문을 제기했다.
“그런데 폐하. 세이렌 후작 영애가 바슈케르의 인질로 있는 동안은 변경백의 마음도 흔들릴 수 있지 않을까요?”
황비의 물음에 황제가 코웃음 쳤다.
“흥, 그런 일은 없을 거요. 세이렌 후작과 그 아들은 결코 주인을 물지 않을 테니.”
“어째서 그렇게 확신하시는 거예요?”
황제의 말을 믿지 못하기보다는 흥미롭다는 얼굴로 황비가 물었다.
“그대도 잘 알다시피, 난 오랜 시간 그들을 의심하고 또 의심해 왔소. 서부 방어선을 지켜 낼 다른 인재가 변경백 외엔 없기도 하지만…… 어쨌든. 지금의 변경백에겐 사병 수가 아주 많소.”
파라디움의 귀족들은 자신들의 성과 영지를 지킬 사병을 둘 수 있었다. 여차할 때 파라디움을 위해 싸울 수 있도록.
기사단이 사용하는 군마 및 무기와 갑옷 등은 엄청난 고가였고, 제대로 된 기사 한 명을 훈련하는 데는 어마어마한 금화가 들었다.
그래서 황제는 항시 많은 군사를 두기보다는 귀족 가의 자금으로 키워 낸 기사를 필요할 때마다 빌려 쓰는 방법을 택했다.
하지만 세력이 너무 강해지면 다른 마음을 먹기 마련이었기에 황제는 귀족들의 사병 수를 제한했다.
귀족들이 제각각 사병을 키우는 것은 허락하되, 너무 강한 세력으로 성장했을 때는 와해시키는 식으로.
하지만 세이렌 후작 가만은 달랐다.
지금도 황제를 위협할 정도의 많은 사병을 보유한 가문은 세이렌 후작 가가 유일했다.
처음에는 그저 바슈케르를 견제할 수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으나, 현 황제의 즉위 이후부터 바슈케르의 세력 자체가 어마어마하게 불어났다.
곧 파라디움 대제국을 먹어 치울 만큼이나.
황제는 부랴부랴 세이렌 후작 가를 지원했고, 이제는 황제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 버렸다.
만약 세이렌 후작이 포부가 큰 인물이었다면, 파라디움 황좌의 주인 또한 진작에 바뀌었을지 모를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황제에게 충성했다.
좋지 못한 소문을 퍼뜨려 그들의 명예를 깎아내렸음에도 말이다.
그리고 황제는 어느새 자신이 변치 않는 그들의 충성심에 감화되었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폐하께서는 그들을 믿으시나요?”
황비의 이 한마디가 또 한 번 황제 안에 숨겨져 있던 불안을 자극했다.
황제는 언젠가 세이렌 후작과 그의 아들이 제 목을 노리는 순간을 이따금 가정하곤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세이렌 후작 가의 세력을 줄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을 없애고 나면 이번엔 바슈케르의 황제가 자신의 몫을 노릴 테니까.
“흠…… 오늘 그대는 그다지 재미가 없군.”
황제는 대화 주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걸 노골적으로 내비쳤다.
“제가 눈치 없이 굴었나 보네요.”
황비가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눈을 휘어 웃었다.
그리고 그녀가 한마디 더 건네려던 찰나,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3황자 전하께서 폐하를 뵙기를 청하셨습니다.”
시종의 말에 황제는 물론이고 황비 또한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루시우스 황자가요?”
“그렇습니다. 황비 전하.”
“그대가 미리 계획한 일이요?”
황제의 물음에 황비가 자신은 무관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포도주를 입에 조금 더 털어 넣은 황제가 이내 명했다.
“들라 하게.”
“예, 폐하.”
곧 루시우스가 안으로 들어와 예를 갖춰 인사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래. 오랜만이구나. 이리 가까이 오거라.”
황제는 자식들에게 큰 애정을 쏟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입안에 혀처럼 구는 황비의 아들만은 조금 특별한 축에 속했다.
“제가 한잔 따라 드리겠습니다.”
시종이 포도주 병을 내밀었다. 루시우스는 황제의 잔과 황비의 잔에 차례로 포도주를 따라 주었다.
“앉아라.”
“예, 폐하.”
“……그러고 보니 너도 이제 슬슬 반려를 맞이할 나이가 되었구나.”
황제가 꺼낸 갑작스러운 주제에도 루시우스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폐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런데 마땅히 눈에 들어오는 영애가 없더군요.”
가까이에 아들이 있다는 것도 개의치 않는 듯 황비가 황제에게 바짝 몸을 붙였다.
자신이 이토록 황제와 친밀하다는 사실을 루시우스에게 과시하기라도 하듯이.
황후처럼 정실은 아니라지만, 파라디움에선 황비 또한 정부와는 엄연히 다르게 취급했다.
그러니 그에 맞게 행동해야 했다. 정부처럼 굴 게 아니라.
‘쯧.’
루시우스는 속으로만 혀를 찼다.
황비의 눈이 초승달처럼 곱게 휘어졌다. 그녀도 이제는 중년에 접어드는 나이였지만, 타고나길 뛰어난 유전자 때문인지 여전히 젊어 보였다.
이제는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황제의 옆에 있으니 황비가 아니라 젊은 정부로 보일 정도였다.
“그렇지 않아도 트레이더 백작 영애가 어떻겠냐고 몇 번이나 말을 했는데, 우리 황자께선 통 듣지를 않으시지 뭔가요.”
황제가 생각에 잠긴 듯 시선을 내렸다.
아들은 트레이더 백작 영애와의 혼담을 원치 않는 것 같고, 부인은 두 사람을 엮어 주려 한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황제는 가능한 황비의 편을 들어 주는 게 원만한 해결책이라 결론을 내렸다.
“트레이더 백작 영애라면 괜찮은 짝 같구나…….”
황제의 말이 끝나기 전에 시종이 안으로 들어왔다.
“폐하.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황비와 있을 때는 가능한 방해하지 말라고 일어둔 터라, 황제는 급하고 중요한 일이라 판단했다.
황제는 시종에게 다가오라 손짓했다.
시종이 황비와 루시우스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다 황제에게 귀엣말을 건넸다.
“스읍…….”
시종의 말을 다 듣고 나자 황제가 잇새로 헛숨을 들이켰다.
“기어코 일을 치는군.”
황제가 고개를 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 할까요, 폐하?”
“귀족들을 소집하게.”
“예.”
떠나는 황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황비와 루시우스도 서둘러 상황을 알아보러 나섰다.
그리고 곧 바슈케르가 솔티에 전쟁을 선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폐하께선 어떻게 하시려나.”
황비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고, 루시우스가 말했다.
“좋은 기회 같습니다.”
“기회라니?”
“솔티로 군사를 대거 이동시킬 테니, 정작 바슈케르의 본진이 비어 있을 게 아닙니까.”
“그 말은…….”
빈집을 털겠다는 뜻임을 황비는 바로 알아들었다.
“폐하께 바슈케르로 출정을 허락받으려 합니다.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까?”
***
추운 겨울은 물러가고 어느덧 봄이 성큼 다가왔다는 걸 알리듯 황궁 정원엔 하나둘씩 피어난 작은 꽃송이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르네브는 커다란 창 너머로 황궁 정원을 내려다보며 복도를 걸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드한 경, 영애.”
황제의 집무실 앞에 도착하자, 문 양옆을 지키고 있던 기사 중 하나가 드한과 르네브에게 아침 인사를 건네 왔다.
드한은 기사들에게 가볍게 고갯짓하곤 집무실로 들어갔고, 르네브는 살짝 미소를 머금고 화답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경.”
“오늘도 힘내십시오. 레이디.”
그러자 아침 인사를 건넸던 기사가 건치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경도 수고하세요.”
곧 르네브도 드한을 따라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러자 업무 준비를 서두르던 드한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르네브를 쳐다봤다.
“영애. 그 자식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조심하라니요?”
책상 쪽으로 걸어가던 르네브는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그러자 가까이 다가온 드한이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그러고는 비밀 이야기라도 할 것 같은 행동과는 상반되게도 큰 목소리로 외쳤다. 마치 문 너머의 기사더러 들으라는 듯이.
“약혼녀가 버젓이 있으면서 따로 연인을 두고 있다지 뭡니까? 방탕하기가 이루 말할 데가 없지 않습니까?”
드한이 세상 그런 호색한이 없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종내에는 혀를 끌끌 차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보며 르네브는 흐린 눈을 했다.
‘거짓말.’
이카르가 출정하기 전에 대체 드한에게 무슨 지시를 내린 건지 그는 르네브에게 친근하게 구는 황궁 안 모든 사람을 경계했다.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여서 이제는 르네브도 대충 그러려니 하며 걸러 듣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래서 르네브는 잡담 대신 빨리 해치워야 할 일을 거론하며 자연스레 대화 주제를 바꾸기로 했다.
“아, 참. 드한 경. 곧 있을 건국제 일 말인데요…….”
“제 말 꼭 새겨들으시길 바랍니다.”
드한이 한 번 더 당부한 뒤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건국제에 대해 말씀하시지요.”
르네브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삼키고 일 이야기를 꺼냈다.
“라이나와 베니스탄, 그리고 파라디움에는 초대장을 발송하기로 했는데…….”
르네브는 건국제 일로 드한과 상의한 후에 제 책상에 앉았다. 정확하게는 베인이 주인인 책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