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화 이카르의 계략 (67/148)


#66화 이카르의 계략
2023.06.05.


“그렇죠? 역시 황제 폐하께서는 대단하세요!”

키어넨이 조금 우쭐대며 말했다. 동의를 구하는 듯한 키어넨의 눈빛에 르네브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츠 후작과 그에 가담한 귀족들에게서 환수한 금화를 제국민의 복지에 사용하실 모양이네요.”

“아, 역시! 신께서 바슈케르를 굽어살피시는가 봐요.”

키어넨의 말에 르네브는 굳이 반박하지 않고, 제국 일보로 다시 시선을 내렸다.

르네브는 잘츠 후작의 여러 가지 죄목 중 하나를 주목했다.

‘솔티 왕녀가 도망치도록 도운 혐의를 받고 있다라…….’

르네브는 흥미롭게 관련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파라디움에서 온 세이렌 후작 영애는 일찍이 왕녀의 가짜 신분을 눈치챘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솔티의 왕은 그녀를 제거하기로 했다.

바로 암살자를 보내기로 한 것이다.

이전부터 위협을 느끼고 있던 세이렌 후작 영애는 이 사실을 황제 폐하께 알렸고…….」

거기까지 읽어 내린 르네브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런 것까지 기사에 실렸단 말이야?’

사건의 자세한 내막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이카르와 그의 측근 몇 정도였다.

그러니 제국 일보에 실린 기사 또한 이카르, 혹은 그의 측근 입을 통해 전달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이카르가 지시한 일이라면 분명 어떠한 의도가 있을 터다.

그렇다면 숨은 의도를 파악하는 게 중요했다. 회귀 전 파라디움 황실이 했던 만행들을 잘 알고 있기에.

가령, 누군가의 이미지를 실추시키거나, 반대로 좋은 이미지를 구축하는데 신문만 한 것이 없었다.

“이 기사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려 줄래?”

르네브는 제가 생각한 것이 맞는지 확인하고자, 앰버에게 물어봤다.

“제 생각이요?”

“응.”

“일단은…… 가짜 왕녀가 상당히 악독해 보여요. 그리고 일찍이 가짜 왕녀라는 사실을 간파한 아가씨의 눈썰미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키어넨은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또 황제 폐하와 레이디의 사이가 긴밀하게 느껴지네요.”

두 사람의 대답으로 르네브는 이카르의 계략을 바로 알아챘다.

‘역시, 정말 보통이 아니네.’

전부 사실에 기반한 내용이긴 하나 굳이 이런 구구절절한 정황을 기사로 낼 필요까지는 없었다.

이건 제국민을 상대로 이카르가 이미지 메이킹을 시도했다고 보는 게 맞았다.

가짜 왕녀를 통해 솔티의 반감을 키우고, 르네브를 가련한 피해자로 만들어 제국민의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쪽으로.

그뿐만 아니라 제국민들은 르네브에게 좋은 인상을 느낄 것이었다.

에시카가 가짜 왕녀라는 사실을 빠르게 간파하고, 황제에게 알렸으니까.

이는 외국인 황후라는 데서 오는 제국민들의 거부감을 상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할 게 틀림없었다.

이카르의 계략에 놀아났다는 사실에 르네브는 헛웃음을 지으며 진지하게 나머지 기사를 읽었다.

「……그 덕분에 미리 대처할 순 있었지만, 가짜 왕녀와 깊은 관계에 있던 잘츠 후작은 그녀를 피신시키기에 이르렀다.

잘츠 후작이 솔티의 왕녀를 앞세워 솔티의 왕 노릇을 하려 한 게 아니냐는 의견도 있으나, 아직 정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다.」

이 부분에 대해선 르네브도 딱히 정보가 없었기에, 기사 그대로를 두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있었다.

잘츠 후작은 제 이득을 위해 바슈케르를 기만한 가짜 왕녀를 도왔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평화를 위해 손을 내민 바슈케르를 무시하고 기만한 것으로 간주한 황제 페하께서는 솔티와의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뜻을…….」

기사 내용을 전부 읽고 난 르네브는 하마터면 손뼉을 칠 뻔했다.

‘역시, 보통 수완이 아니야.’

만약 르네브가 죽기 전에 이카르가 파라디움을 공격해 왔다면 어찌 되었을지 상상만으로도 눈앞이 아득해졌다.

지금 이카르와 자신이 적이 아니라는 사실에 감사할 정도였다.

르네브는 평화 협정 이후를 그려 봤다.

회귀 전에도 그러했듯이 솔티와 바슈케르의 전쟁에선 바슈케르가 승기를 잡을 것이다.

‘그 뒤엔 라이나와 베니스탄이 백기를 들겠지.’

그럼 파라디움을 제외한 주변국 모두가 이카르의 손아귀에 떨어지는 셈이었다.

르네브는 들고 있던 신문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파라디움의 현 황제는 물론이고, 루시우스조차 이카르에게는 당해 내지 못할 것 같았다.

“아가씨, 왜 그러세요?”

일이 잘 해결되었음에도 르네브의 표정이 좋지 못해서 그런지 앰버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곧 전쟁이 있을 거야.”

전투 민족의 성향이 있어서 그런지 키어넨은 제법 의연해 보였다. 그러나 파라디움에서 자란 앰버는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저희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르네브는 불안해하는 앰버를 상냥하게 다독였다.

“우린 그냥 지금처럼 잘 지내다 협정 기간이 끝나면 파라디움으로 돌아가면 돼.”

“전쟁이 난다면서요.”

“폐하께선 군사들을 이끌고 솔티로 가실 거야. 그러니 바슈케르에 있으면 안전해.”

키어넨이 물었다.

“레이디께선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제집에서 싸우는 건 어리석은 일이거든요. 그리고 폐하께선 제 예상을 훌쩍 뛰어넘을 정도로 현명한 판단을 할 분이세요.”

르네브의 확고한 표정 때문인지 그제야 앰버와 키어넨이 안심한 듯 긴장된 표정을 풀었다.

***

이카르가 솔티에 전쟁을 선포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폐하께서 뵙자고 하셨다는데 어떡하시겠어요?”

르네브가 머무는 곳으로 시종이 찾아왔다.

“곧 가겠다고 전해 줘요.”

“네. 레이디.”

키어넨이 허리를 꾸벅 숙이곤 멀어졌다.

르네브도 보던 책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외출 준비를 했다.

약속 시각에 맞춰 응접실로 가자, 이카르가 먼저와 르네브를 기다리고 있었다.

“폐하를 뵙습니다.”

예를 갖춰 인사하자, 이카르가 맞은편 소파 쪽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앉지.”

잘츠 후작 외에도 에시카와 솔티의 일로 여러모로 바빴던 모양인지 오랜만에 마주한 이카르의 잘생긴 얼굴은 조금 야위어 있었다.

원래도 뚜렷한 얼굴선이 더욱 살아난 덕분에 그에게선 퇴폐적인 미남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식사는 잘하고 계신 거죠?”

“영애가 내게 그런 걸 물어볼 날이 올 줄은 몰랐군.”

이카르가 살짝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그건 그렇네요.”

르네브가 자조적으로 웃자, 이카르의 얼굴에도 미소가 짙어졌다. 르네브는 한결 분위기가 가벼워진 걸 느끼며 물었다.

“도망친 왕녀의 일 때문에 저를 부르신 건가요?”

“영애는 점성술이라도 볼 줄 아는 모양이지?”

“정답이었나 보네요.”

“그것도 있고, 일단…….”

이카르가 얄궂은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당분간은 태초의 모습으로 욕실에서 마주칠 일은 없을 거야.”

금세 욕실에서의 일이 떠올라 버렸다. 르네브는 속절없이 뺨을 발갛게 물들이고 말았다.

“그래야겠죠. 그 일은 결국 관리 부실로 인한 사고였으니까요.”

누군가 황후의 욕실과 황제의 욕실이 이어져 있다고 한마디만 해 줬더라면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거였다.

“그건 인정하지.”

짧게 수긍한 이카르가 바로 덧붙였다.

“오늘 보자고 한 이유는 그것 때문만은 아니야. 영애에게 몇 가지 알려 줄 게 있어.”

이카르가 진지한 얼굴을 하고 말을 이었다.

“영애를 습격한 주범을 붙잡았다는 소식은 들었겠지?”

“네.”

“곧 죄질에 걸맞은 처벌을 받게 할 거야.”

르네브는 이카르의 빠른 일 처리에 놀라며 물었다.

“그 말씀은, 그럼 가짜 왕녀도 붙잡으셨다는 뜻인가요?”

“영애는 날 너무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군.”

르네브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이카르가 말을 이었다.

“주범 중 한 명을 붙잡았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겠군. 아쉽지만, 가짜 왕녀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야. 하지만 바슈케르 안에 있다면 오래지 않아 붙잡히겠지.”

르네브는 줄곧 궁금했던 것을 묻기로 했다.

“폐하께선 어떻게 솔티의 가짜 왕녀가 공범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셨나요?”

“이전부터 심증은 있었어. 최근 증인을 확보했고.”

“증인이라 하시면?”

“가짜 왕녀를 붙잡으면 잘츠 후작이 증인으로 나서게 될 거야.”

르네브는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잘츠 후작이 도왔던 거였구나.’

그렇지 않아도 에시카 혼자서 계획하기엔 어려움이 따랐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이해가 됐다.

“증인으로 나서면 잘츠 후작은 감형을 받게 되나요?”

제국 일보를 통해 그간 잘츠 후작의 죄목을 알게 되었기에 조금 걱정이 되었다.

“그렇겠지. 하지만 감형을 받는다고 해도 잘츠 후작이 회생할 가망은 없어.”

르네브의 그런 고민까지 예상했다는 듯 이카르가 일축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그리고 한 가지 더.”

거기까지 말한 이카르가 돌연 입을 다물어 버렸다.

‘황후가 되어 달란 제안을 또 꺼내려는 건가?’

이카르가 르네브의 이미지 메이킹에 들어갔다는 걸 알고 있는 터라 조금 긴장이 되었다.

그때 이카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곧 솔티로 출정을 나가게 될 거야.”

“아…….”

회귀 전에도 이카르는 이 시기쯤 솔티로 출정했다. 출정의 원인은 이전과는 달라졌지만.

“내가 자리를 비우는 게 불안한 모양이지?”

“그렇지는 않아요. 그냥 좀 갑작스러워서…….”

“내가 다시 바슈케르로 돌아오는 날엔 영애가 긍정적인 대답을 주길 바라지.”

***

이카르의 솔티 출정 소식으로 제국 안이 들썩였다.

살롱에 모인 귀족들은 저마다 의견을 내놓았다.

“황제 폐하께서 직접 진두지휘하신다죠?”

“그렇다더군요. 솔티 같은 약소국이 겁도 없이 대제국 바슈케르를 기만했으니 당연한 결과죠.”

살롱에 모인 귀족들은 이 전쟁의 결과를 의심치 않았다. 황제가 직접 출정한다면 승전이 확실할 거라고 믿었다.

“이번엔 몇 년 걸릴 거라 예상들 하십니까?”

“2년은 걸리지 않을까요?”

“저는 1년 예상합니다.”

“그럼 저는 6개월이요.”

한 귀부인의 말에 살롱 안에 모인 귀족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귀부인, 그건 너무 빠르지 않습니까?”

“저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데요?”

살롱에 모인 귀족들이 승전까지의 기간을 두고 내기를 벌이는 동안, 제국의 번화가에도 이 소식이 닿았다.

“호외요! 호외!”

빵모자를 쓴 소년이 가죽 가방에서 꺼낸 양피지를 손에 쥐고 흔들었다.

“무슨 일인데?”

지나던 중년의 사내가 관심을 가지고 물었다.

“맨입으로는 안 되죠.”

“얼마면 되니? 얼마면 되겠어?”

소년이 엄지와 검지를 맞댄 채로 세 손가락을 펼쳐 보였다.

“어휴, 그거면 빵과 우유가 몇 갠데.”

“흥정하려는 거라면 그만두세요. 뒤늦게 소식을 접하는 방법도 있으니까요.”

소년이 손에 든 양피지를 흔들며 자리를 뜨려 하자 사내가 다급하게 주머니에서 동전 3개를 꺼냈다.

“녀석, 성질도 급하긴. 여기 있다.”

“감사합니다. 보시고 가능한 소식을 주변에 퍼뜨리지 말아 주세요. 저도 장사를 해야 하니까요.”

또 다른 행인이 관심을 보이며 소년에게 다가왔고, 사내는 구석에 서서 양피지를 읽어 내려갔다.

“……!”

곧 사내가 헉, 숨을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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