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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투옥 (65/148)


#65화 투옥
2023.06.04.


빙글 돌아누운 에시카는 천장을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자꾸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감쪽같이 모두를 속여 넘겼다는 데서 오는 묘한 만족감과 희열이 엄청났다.

‘르네브까지 잘 처리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랬다면 바슈케르를 떠날 필요도 없었을 테고, 이카르의 옆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자신이었을 텐데…….

못내 아쉬움과 미련이 남았지만, 뭐 어떠냐 싶기도 했다.

더는 가짜 왕녀 신분이 들통날 것을 두려워하며 마음 졸일 필요가 없었다. 솔티의 왕에게 반강제적인 협박을 당할 필요도 없고.

에시카는 한동안 이 자유를 만끽하기로 했다. 평생을 여유롭게 지낼 만큼의 금화도 있으니.

그녀는 다리를 쭉 뻗어 새 구두를 내려다봤다.

“진짜 잘 샀네.”

파라디움에서의 새 출발을 기념할 만한 물건으로 적절해 보였다.

‘그래. 파라디움에서 다시 시작하는 거야.’

샤반 남작 같은 작자에게 귀족 작위를 사들이면 적절히 귀족 행세도 할 수 있을 테고…….

거기까지 생각한 에시카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가만, 이거 잘만 하면 루시우스도 볼 수 있는 거 아냐?”

이내 에시카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어쩌면…….”

여기서부터가 원작의 시작이 아니었을까?

문득 든 생각이 상당히 그럴싸한 것 같았다. 가슴이 쿵쿵 빠르게 뛰었다.

원작은 파라디움 하급 귀족 신분인 에시카가 황궁 무도회에서 데뷔탕트를 치르며 시작된다.

그날이 처음으로 루시우스와 만나는 날이었지.

***

이카르는 탄신일 당일 르네브를 습격한 괴한들을 일부러 풀어 주었다. 감옥의 감시 감독을 소홀히 한 것처럼 꾸며서.

황궁을 탈출한 다음 그들의 행적을 좇기 위해서였다.

이카르의 비밀 호위들은 곧바로 그들의 뒤를 밟았고, 그 결과 의뢰인의 정체가 드러났다.

“폐하. 풀어 준 용병들이 잘츠 후작과 접촉한 모양입니다.”

드한의 보고에 이카르는 서류에서 시선을 떼어 냈다.

“미끼를 잘 문 모양이군.”

“막 풀려났으니 한동안은 움직이지 않은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빨리 걸려든 셈이네요.”

“그만큼 용병들에겐 중요한 고객이었나 보지.”

드한이 곧바로 동의했다.

“그런 모양입니다. 생각보다 운이 좋았네요. 그보다 폐하. 잘츠 후작을 어떻게 할까요?”

“잡아들여.”

응당한 처사라는 표정으로 드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츠 후작은 이전부터 이카르가 벼르고 있던 인물로 그를 잡아들일 이유 또한 가지각색이었다.

그중 제일 큰 건은 불법 도박장 운영으로 이는 제국법에 위반되는 범법 행위 중 하나였다.

또 이 자금은 탈세를 해서 뇌물로 쓰였다.

그 결과 잘츠 후작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지하 자금을 만들어 내는 데 일조했다.

이카르는 황위에 오르기 전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반박할 수 없을 만한 증거를 모으기 시작했다. 잘츠 후작과 연관된 자들을 한꺼번에 줄줄이 엮어 내기 위해서.

증거 수집이 충분해졌을 즈음 공교롭게도 잘츠 후작이 용병을 고용해 르네브를 헤치려 한 것이다.

“폐하, 잘츠 후작을 잡아들이는 거라면, 제가 나서도 되겠습니까?”

드한과 이카르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베인이 끼어들었다.

베인은 잘츠 후작이 운영하는 불법 도박장 잠입 임무를 맡았었다.

그 과정에서 베인은 똑똑히 봤으리라.

어떻게 순진한 사람들을 도박장으로 끌어들였으며, 골수까지 싹싹 뽑아 먹는지를.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마.”

“물론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대답했으나, 베인의 얼굴은 이미 쓸데없는 짓을 할 생각으로 가득해 보였다.

의기양양하게 집무실을 나서는 베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카르가 눈썹을 움찔했다. 마찬가지로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드한이 물었다.

“폐하, 베인에게 맡겨도 괜찮을까요?”

“이날만 벼르고 있었으니 몇 대 때리는 것 정도는 어쩔 수 없지.”

이카르는 무심히 말하곤 조금 전까지 보고 있던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

베인은 곧장 황실 기사단과 함께 잘츠 후작 저를 급습했다.

수십의 기사들과 베인의 기세에 잘츠 후작은 속절없이 황궁 지하 감옥으로 연행되었다.

“무력으로 제압했다는 사실을 내 반드시 재판장에서 증언하겠네!”

떠나려는 베인의 뒤통수를 향해 잘츠 후작이 외쳤다.

베인이 잘츠 후작 쪽으로 빙글 몸을 돌리며 빙긋 웃었다.

“부디 폐하께도 그렇게 말씀하시죠.”

그 자신만만해 보이는 표정에 잘츠 후작은 이를 악물고 베인을 노려봤다.

베인이 황제의 최측근이라는 사실은 공공연히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러니 베인이 움직였다면 이는 황제의 뜻이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즉위하고 몇 년이 지나도록 황제는 외부로만 눈을 돌렸다. 제국 내의 일은 비교적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잘츠 후작도 즉위 직후에는 황제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했다.

황권 교체 이후 그간의 집권 세력을 처단하고, 그 자리를 제 사람으로 채워 넣는 일은 비일비재했으니까.

하지만 영토 확장에만 눈이 돌아간 황제를 보며 점점 의심의 끈을 놓아 버렸다.

오히려 선황제 제위 때보다 본인이 활개 치기 좋은 시기가 도래한 것이라 여기며.

‘그런데 왜 지금?’

그런 황제가 갑자기 자신을 잡아들인 건지 의문이었다.

더군다나 잘츠 후작 가는 대대로 바슈케르의 지하 경제의 최정점에 있었다.

제법 노련했던 선황제 또한 잘츠 후작 가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을 정도였다.

선황제조차 어쩌지 못한 잘츠 후작 가를 젊은 황제가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훗, 언제까지 그리 오만하게 굴 수 있는지 참으로 궁금하군.”

잘츠 후작이 혼잣말처럼 코웃음 쳤을 때였다.

어두운 지하 감옥 저 멀리에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잘츠 후작은 눈을 가늘게 뜨고 랜턴 불빛에 드리운 거대한 그림자를 주시했다.

그림자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뜻 모를 불안이 올라왔다.

그래서 잘츠 후작은 부러 소리쳤다. 마치 두려움을 떨쳐 내기 위해 안간힘이라도 쓰듯이.

“거기! 누구 있나?”

곧 지하 감옥을 비추던 랜턴 불빛 앞으로 황제 이카르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입을 뗐다.

“……폐하?”

“오만하다는 건 날 두고 하는 말인가?”

황제가 입매를 살짝 비틀어 올리며 뇌까렸다. 굵고 낮은 목소리에서 위압감이 느껴졌다.

잘츠 후작은 저도 모르게 한껏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나 곧 저자세로 나갈 필요가 전혀 없다는 걸 상기하곤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계신 모양입니다.”

“오해? 오해라……. 그래, 오해라고도 볼 수 있겠군.”

이카르의 의미심장한 표정에 잘츠 후작은 잠시 주춤했다. 하지만 이내 강하게 항변했다.

“아무리 황제 폐하시더라도 제게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재판도 하지 않고, 지하 감옥에 가두다니요!”

“도망치거나 증거 인멸의 우려가 있을 땐 구금할 수 있는 제국법이 있다만?”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당당한 태도에 잠시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던 잘츠 후작은 곧 빈틈을 발견해 냈다.

‘증거 인멸의 우려라.’

그렇다는 건 자신을 투옥시킨 뒤에 증거를 찾을 거라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폐하께서 적법한 증거는 가지고 계시는지 매우 염려됩니다.”

“적법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할 텐가?”

잘츠 후작은 미간을 찌푸렸다.

‘적법한 증거라니?’

그게 무엇에 관한 증거인지조차 가늠이 되지 않았다.

‘도박장? 아니면 고리 대금업? 그도 아니면…….’

잠깐 고민한 잘츠 후작은 곧 답을 내렸다.

‘어느 쪽이든 증거가 있을 리 없지.’

황실의 정찰대는 이미 잘츠 후작의 뇌물을 받은 지 오래되었다. 덕분에 잘츠 후작 가만큼은 불시 검문도 쉽게 피해 갈 수 있었다.

게다가 잘츠 후작 가에 불리하도록 증언할 사람을 찾기조차 쉽지 않을 터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황제가 유도 신문을 하는 중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적법한 증거가 있으시다면 보여 주시죠. 폐하께서는 제게 어떤 죄가 있는지조차 말씀해 주지 않은 채로 무력으로 저를 제압하고 가두셨습니다.”

“후작.”

“…….”

“솔티 왕녀가 실종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었겠지?”

전혀 예상치도 못한 터무니없는 주제에 잘츠 후작은 맥이 풀린 나머지 살짝 얼빠진 표정을 지어 버렸다.

그러나 곧 황제가 단순히 허세를 부린다고 판단했다.

일단 자신을 이곳에 붙잡아 둔 다음 저택을 수색해 증거를 확보하려는 거라고.

“저야말로 몹시 궁금합니다. 왕녀님께서 어디로 사라지신 건지.”

평화 협정이 끝나고 왕녀가 솔티로 돌아가기 전까지 잘츠 후작은 왕녀와의 사이를 굳건히 해 둘 작정이었다.

솔티 왕에겐 아들이 한 명 있었지만, 아직 어린 데다 몸도 약하다고 했다. 반면, 솔티의 왕은 벌써 머리가 희끗희끗했다.

그 때문에 솔티의 차기 통치자로 아드리아 왕녀가 거론되는 모양이었다.

아드리아 왕녀는 다소 머리가 맑은 편이었으므로, 잘만 구슬리면 솔티를 한입에 꿀꺽하는 건 일도 아닐 것 같았다.

그런 상황에서 사라진 왕녀의 행방에 가장 관심을 가질 사람은 바로 잘츠 후작 저 자신이었다.

게다가 솔티 왕녀의 실종에 잘츠 후작은 정말로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대충 아무 이유나 갖다 붙인 게 틀림없겠군.’

잘츠 후작이 곧 석방될 거란 확신을 가졌을 때였다.

“왕녀의 실종 외에도 그대의 죄목은 무수히 많아. 손가락으로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말이지.”

잘츠 후작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으나, 이카르가 개의치 않고 덧붙였다.

“세이렌 후작 영애 살해 모의 및 파라디움과 솔티의 불화를 조장하여 자국에 손해를 끼치려 한 죄.”

잘츠 후작은 순간 멍해졌다.

세이렌 후작 영애의 일은 나름대로 빠져나갈 방법이 있었다.

그러나 황제가 국가 간의 분쟁을 조장했다는 죄목을 붙이려 한다면 상당히 불리해졌다.

“…….”

“사실 그 외에도 죄목은 더 있다만, 이 정도만 해도 그대를 투옥한 데는 전혀 지나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대의 생각은 어떤가, 잘츠 후작?”

***

잘츠 후작과 연관된 이들은 고구마 줄기처럼 엮여 투옥되었고, 금세 지하 감옥 안은 만실을 이뤘다.

재판 전이었지만, 그동안 모아 둔 증거가 충분했기에 투옥된 죄수들은 감형을 위해 기꺼이 입을 열어 서로를 고발했다.

그리고 가짜 왕녀라는 썩은 동아줄에 기댔던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 또한 탈세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 소식은 곧 제국 일보를 통해 바슈케르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앰버가 입을 쩍 벌렸다.

“바슈케르의 황제 폐하께선 정말로 대단하시네요. 젊은 나이이신데도 불구하고…….”

르네브는 앰버가 왜 말을 끝맺지 않은 채로 입을 다물어 버렸는지 알 것 같았다.

‘파라디움의 현 황제와 비교하는 거겠지.’

하지만 제 나라의 주군을 욕보이는 건 결국, 제 얼굴에 침 뱉기라는 사실을 잘 알기에 입조심을 하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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