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누가 상상이나 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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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누가 상상이나 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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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누가 상상이나 하겠어
2023.06.03.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기에, 이카르가 에시카의 정체를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카르의 정보력이야 이전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사라진 에시카의 일을 역이용할 줄은 몰랐지만.
게다가 자신을 제거하려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마자 황궁에서 도망쳐 버린 에시카의 빠른 행동력은 제법 르네브를 놀라게 했다.
아직까지 잡히지 않았다는 것도.
탄신일 전후 며칠간은 황궁 보안에 구멍이 났을 수 있다고 해도 황궁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건 조금 의아했다.
“아가씨는 기쁘지 않으신가 보네요.”
앰버가 말했다.
그제야 르네브는 자신이 심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앞으로 일이 어떻게 될지 조금 신경이 쓰여서.”
“앞으로의 일이요?”
앰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들은 아마도 에시카가 사라졌으니, 이제 르네브에게 위협이 될 만한 존재 또한 사라졌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솔티의 왕녀가 바슈케르에 온 이유가 평화 협정 때문이었잖아. 그런데 왕녀가 사라졌어.”
“그렇죠.”
앰버가 고개를 끄덕였고, 르네브는 설명을 이어나갔다.
“폐하께서 가짜 왕녀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공표하지 않으셨다면 솔티에서 강하게 반발하고 나서더라도 바슈케르에선 변명할 말이 없었을 거야.”
“아…….”
“만약 그랬다면 라이나와 베니스탄까지 가세해 바슈케르에 압박을 해 올 수도 있겠지. 인질을 풀어 달라면서. 어쩌면 파라디움까지도.”
이는 바슈케르에 매우 불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컸다.
그전까지는 서로 적대시하던 라이나와 베니스탄, 파라디움이 솔티를 구심점으로 뭉칠 수도 있으니.
그렇게 되면 제아무리 강한 전사들의 나라라 불리는 바슈케르라도 충분히 위협을 느낄 만했다.
“……그렇겠네요.”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이해한 앰버와 키어넨이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서, 설마 그렇게 되면 저희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앰버가 울상이 되어 물었다.
그런 상황을 대비한 인질이었으니, 르네브조차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르는 판국에 앰버라고 무사할 리가 없었다.
“그 일이라면 크게 걱정할 필요 없을 거야. 폐하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유능한 분이시거든.”
그전부터 은연중에 느끼고는 있었지만, 르네브는 이번 일로 이카르를 다시 봤다.
그는 제 생각보다 훨씬 더 노련한 황제였다. 파라디움의 역대 황제 중에서도 제법 좋은 평가를 받던 회귀 전의 루시우스보다 더.
***
르네브의 예상대로 이번 일로 솔티는 물론이고, 바슈케르에 인질을 보낸 라이나, 베니스탄, 파라디움 각국은 비상이었다.
오죽 처우가 좋지 못하면 도망쳤겠냐는 의견부터, 지금이라도 평화 협정을 깨고 귀빈을 본국을 돌려보내라고 압박해야 한다는 의견 및 가짜 왕녀를 보낸 솔티의 왕이 뻔뻔스럽다는 의견까지.
저마다 다양했다.
그리고 가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쪽은 단연코 솔티 쪽이었다.
아침 댓바람부터 날아든 불벼락 같은 소식에 솔티의 왕은 깎다 만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아드리아의 대리로 간 그 계집이 파라디움의 영애를 해치려 했다는 사실이 정말인가?”
“그런 모양입니다.”
“허허, 그것참…… 천한 것을 먹여 주고 입혀 주었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는구먼, 그래.”
헛웃음을 터뜨린 왕은 마찬가지로 근심 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귀족들에게 말했다.
“이제 어쩌면 좋겠소? 좋은 대책이 있다면 다들 의견을 내주게.”
“솔티는 이 일과 무관하다는 뜻을 바슈케르에 전달해야 합니다. 가짜 왕녀가 독단적으로 벌인 일이라고 말이죠.”
“먼저 가짜 왕녀를 보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부터 하는 게 도리에 맞지 않겠습니까?”
“솔티에서 먼저 선수를 쳐야 합니다. 인질들의 대우가 좋지 못하니, 가짜 왕녀가 도망친 게 아니겠습니까?”
“인질이라니? 그거 말조심합시다. 그리고 논점 흐리지 마시죠.”
“뭐요?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귀족들의 의견이 분분하게 갈렸다.
그 후로도 한참 회의가 계속되었으나, 마땅한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답보 상태를 맞았다.
“그만! 그만들 하게.”
왕은 지끈 거리를 이마를 짚으며 골치 아픈 기색을 내비쳤다.
그제야 신랄하게 서로의 의견을 반박하기 바빴던 귀족들의 입이 다물렸다.
“계속 싸우기만 할 거라면 이만 물러들 가시게.”
왕이 허공에 손을 휘휘 내저었고, 회의에 참석한 귀족들은 왕의 눈치를 살피며 하나둘씩 회의장을 떠났다.
그러나 어떻게 대처할지 확실하게 결론이 나지 않았기에, 귀족들은 회의장에서 멀리 벗어나지는 않는 선에서 저마다 잠깐의 휴식을 취했다.
“리젠시 백작.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마벨 공작이 물었다.
“……잠깐 시간 괜찮으십니까?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리젠시 백작이 주변을 살피며 작게 속삭였다. 그러자 따라오라는 듯 마벨 공작이 앞장섰다.
입구에 기사들을 배치해 둔 뒤 마벨 공작과 리젠시 백작 두 사람은 비어 있는 접객실로 들어갔다.
“바슈케르에서 이 일로 솔티에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그렇겠지. 가짜 왕녀를 보낸 것에 그치지 않고, 인질까지 도망을 쳤으니.”
마벨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왕녀 대리를 내세우자는 왕의 의견에 반대했던 사람 중 하나였다.
바슈케르의 황제가 솔티의 기만을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을 거라면서.
하지만 왕은 그의 말을 무시했다. 절대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호언장담을 하며 말이다.
“얼마 전 제가 파라디움의 3황자를 만났다는 사실 기억하시겠지요?”
마벨 공작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파라디움에서 동맹을 제안했다는 말을 전해 듣기는 했다.
“알고 있네. 그런데 파라디움에서 동맹 이야기 외에도 다른 제안을 하지는 않았나?”
“파라디움의 3황자 쪽에선 솔티의 왕권 교체를 원하더군요.”
마벨 공작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게 저, 정말인가?”
“네. 사안이 사안인지라 바로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만, 그렇게 한다면 지금이 적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마벨 공작이 한숨을 내쉬며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바슈케르의 압박에 대비하기도 벅찬 마당에 내부 분란마저 생길 수도 있다니 솔티의 미래가 참으로 암담하게 느껴졌다.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바슈케르를 기만한 사람은 단 한 사람이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마벨 공작은 곧 이해했다.
이번 일은 왕의 독단이었고, 그를 숙청함으로써 바슈케르와 솔티의 관계를 잃지 않게 하지는 뜻임을.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회의를 재개할 모양입니다. 서두르시지요.”
“후…… 일단, 회의가 끝나면 그때 다시 상의함세.”
마벨 공작이 피곤한 한숨을 내쉬곤 먼저 복도로 나갔다. 리젠시 백작도 그 뒤를 따랐다. 좋은 묘안이 나오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바람과 달리 2회차에 돌입한 회의에서도 별 소득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귀족들은 솔티 내에서의 이권 다툼만 계속할 뿐.
시종일관 다투는 귀족들에게 염증을 느꼈는지 왕이 테이블을 탕, 두드렸다. 회의장 안이 금세 조용해졌다.
“가짜 왕녀가 독단으로 벌인 일이라고 결론짓도록 하겠네. 토를 달고 싶은 사람이 있거든 짐을 찾아오게.”
그렇게 독단적으로 결론을 내 버리고 왕이 홀연히 회의장을 떠나 버렸다.
남겨진 귀족들이 웅성거리는 와중 리젠시 백작은 허망한 표정으로 마벨 공작을 쳐다봤다.
시선이 마주치자 마벨 공작이 가망이 없어 보인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보였다.
“일단 나가서 이야기하세나.”
“그렇게 하시죠.”
딸과 아들이 있기에 리젠시 백작도 왕의 마음을 모르지는 않았다.
세상 어떤 부모가 제 자식을 인질로 보내고 싶겠는가.
바슈케르로 간 인질들이 아직까진 살아 있다고 하나 평화 협정이 종료되어 본국으로 돌아오는 순간까지는 방심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왕국의 미래가 걸린 중대사를 대처에는 왕의 태도에는 리젠시 백작도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뭐가 맞다 결론지을 수 없는 문제긴 했지만, 제 딸 하나 살리겠다고 솔티 왕국민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드는 것이 과연 옳은 군주의 면모일까? 하는 의문이 가시질 않았다.
***
한편, 제 행동으로 여러 국가에 비상이 걸렸다는 사실 따위 모르는 태평한 얼굴로 에시카는 유리창 너머에 진열된 상품을 바라보고 있었다.
‘파라디움 번화가도 제법 구경할 맛이 나네.’
발등이 훤히 드러나는 연한 핑크빛의 새틴 구두는 에시카의 마음을 단번에 빼앗았다.
도망자 신세나 마찬가지였지만, 조금쯤은 해외여행 온 기분을 만끽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에시카는 오래 생각지 않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딸랑.
맑고 청량한 종소리가 에시카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찾으시는 게 있으십니까?”
점원이 상냥하게 물었고, 에시카는 싱긋 웃으며 진열장의 구두를 가리켰다.
“이거.”
딸랑.
새 구두로 갈아신은 에시카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공용 마차에 올랐다.
에시카를 태운 마차는 파라다움의 번화가 안에서도 가장 고급 여관 앞에서 멈춰 섰다.
안내받은 침실에 들어서자마자 에시카는 침대에 발랑 엎드렸다. 깃털을 꽉 채운 보드랍고 푹신한 침구가 몸에 푹 감겨들었다.
“진작 이렇게 할 걸 그랬네.”
에시카는 기분 좋게 자조했다.
그간 대리 왕녀라는 사실을 들킬까 걱정으로 조마조마한 시간을 보냈던 게 우스우리만치 바슈케르 황궁을 벗어나는 건 간단했다.
바로 이동 마법 스크롤 덕분이었다.
잘츠 후작저에서 이동 마법 스크롤을 발견한 건 정말이지 운이 좋았다.
‘이건 뭐죠?’
‘아, 그건 공간을 단번에 뛰어넘을 수 있는 물건으로…….’
잘츠 후작의 설명이 이어졌으나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이미 뛸 듯이 기뻤으니까.
물론 잘츠 후작의 앞에서 그런 티를 내지 않도록 표정을 주의하는 건 조금 힘들었지만.
어쨌든, 이동 마법 스크롤을 발견한 순간 에시카는 확신했다. 살아날 구멍을 찾았다고.
르네브가 자신이 가짜 왕녀라는 사실을 떠벌리고 다니더라도 말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대륙 간의 이동이 가능한 이동 마법 스크롤을 손에 넣기 위해 에시카는 발톱을 숨기고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잘츠 후작이 방심한 순간을 노렸다.
그 결과 황제의 탄신일 직전에 이동 마법 스크롤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르네브 납치에 실패하고 만 것이다.
에시카는 곧바로 하녀들을 속인 다음 금화가 될 만한 것들을 모두 챙겼다.
‘어젯밤까지 바슈케르 황궁에 있던 사람이 지금 파라디움에 있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