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사라진 왕녀
(63/148)
63화 사라진 왕녀
(63/148)
#63화 사라진 왕녀
2023.06.02.
단둘이 욕실 안에 계속 있다간 저 자신을 통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빌어먹을.”
이카르는 욕설을 중얼거리며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러곤 치솟는 열기의 원인을 찾았다.
저녁 식사에 술을 곁들인 게 문제였나?
그래. 그 취기가 있는 상태에서 온도가 높은 욕실 안에 있었으니, 혈액순환이 평소보다 빨라진 걸 테지.
이카르는 마른 입술을 핥으며 치솟는 열기에 대한 변명을 계속 늘어놓았다.
그래. 그 탓일 거라 여겼다.
자신이 이렇게 충동에 약한 인간이었던가?
이카르는 평소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거나 후회하는 일 따위 하지 않는 편이었다.
해야 할 일은 많았고, 후회 따위에 쓸 시간과 에너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자꾸만 저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열기가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으니까.
***
한편, 귀빈실로 돌아온 에시카는 어제부터 잠을 자지 않았다는 사실도 잊은 채로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약간은 히스테릭해 보이는 에시카의 모습에 하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왕녀님, 식사를 준비해 왔는데 조금이라도 드시는 게 어떠세요?”
황제의 탄신일 아침에 황궁으로 돌아온 뒤로 침실에만 틀어박혀 있는 게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지금 같은 상황에 무언갈 제대로 삼킬 수 있을 리 없었다.
“됐어.”
에시카가 필요 없다는 의사를 밝히자, 하녀가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꾸벅 허리를 숙였다.
“잠깐만.”
침실을 나서려던 하녀가 몸을 돌렸다.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
“새로 들어온 소문 같은 건 없었니?”
“소문이라면, 어떤 종류의 것을 말씀하시는지요?”
“……아니야, 됐어. 그만 나가 봐.”
하녀가 꾸벅 허리를 숙이고 문손잡이를 잡았을 때 에시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파라디움에서 온 귀빈 말이야.”
“네.”
“그쪽 상황을 좀 알아봐 줄 수 있을까?”
하녀는 왕녀가 원하는 게 정확하게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왕녀는 종종 저렇게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할 때가 있었는데, 그간의 경험으로 저럴 땐 건드리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예, 왕녀님.”
그래서 하녀는 유순하게 대답한 뒤 준비했던 식사를 거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파라디움의 귀빈이 머무는 곳으로 향했다. 일단 왕녀에게 뭐라도 했다는 걸 어필하기 위함이었다.
‘적당히 시간이나 때우고 돌아가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하녀는 귀빈실을 기웃거리다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조금 추웠지만, 그런데도 견딜 만은 했다.
‘슬슬 돌아갈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이만 돌아가려 자리에서 일어나던 하녀는 문득 든 의문에 귀빈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식사를 나르는 사람이 한 명쯤은 나올 만도 한데…….’
귀빈실을 나오는 사람도, 들어가는 사람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네 명의 귀빈들은 제각각 거리가 떨어진 독채에 머물렀다. 그리고 그들의 식사는 한 곳에서 만들어졌다.
그러니 귀빈의 식사를 챙기려면 누군가는 저 문을 열고 나와야 했다.
조금 더 덤불숲에 몸을 숨기고 있던 하녀는 하늘이 어스름하게 어두워졌을 즈음에야 깨달았다.
“아……!”
귀빈실에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해가 빨리지는 계절이니만큼 날이 어두워지면 내부에 불을 환히 밝힐 터였다.
그러나 사위가 까맣게 물들 때까지도 귀빈실 안은 어두웠다.
왕녀에게 전해 줄 소식을 찾아낸 하녀는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왔니?”
현관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왕녀가 뭔가 알아낸 게 있냐며 채근해 왔다.
“파라디움의 귀빈께서는 독채에 안 계신 것 같았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하녀는 조금 전 보았던 그대로 털어놓았다.
“제가 한참 그 앞에서 지켜봤는데, 오가는 사람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
“식사를 나르러 오가는 사람도 없고, 날이 저물어도 불을 켜지 않더라고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시선을 내리깔고 있던 왕녀가 급히 제 침실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고생했어. 그리고 필요한 게 있으면 부를 테니까, 절대 방 안으로 들어오지 마. 푹 잘 생각이니까, 문도 두드리지 말고.”
그 말만 하곤 왕녀는 침실로 쏙 들어가 버렸다.
마침 저녁은 어떻게 하실 거냐고 물으려던 하녀는 곧 그만두었다.
‘배가 고프면 식사를 가져다 달라고 말씀하시겠지.’
그녀야말로 외출하느라 식사 때를 놓친 터라 배가 많이 고팠다.
주린 배를 채운 하녀는 제 침실로 돌아가기 전 잠시 왕녀의 침실 앞을 서성였다.
온종일 침대에서 꼼짝하지 않는 왕녀가 조금 걱정되었지만, 괜히 하지 말라는 짓을 해서 사서 고생할 필요는 없었다.
“…….”
침실 안에서 어떠한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왕녀는 이미 자는 듯했다.
왕녀의 침실 문에서 시선을 떼어 낸 하녀는 제 방으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
***
“얘, 얘. 좀 일어나 봐.”
하녀는 누군가 자신을 흔들어 깨우는 손길에 부스스 눈을 떴다.
자신과 함께 귀빈실에서 왕녀를 모시는 다른 하녀였다.
“무슨 일이야?”
“왕녀님께서 보이질 않으셔.”
졸린 눈을 깜빡이던 하녀는 침대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곤 왕녀의 침실로 후다닥 뛰어갔다.
침실 문을 활짝 열려 있었고, 그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욕실에 계신 거 아냐?”
“아냐, 거긴 확인했어.”
두 하녀는 귀빈실 안 어디에도 왕녀가 없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근처 산책로부터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왕녀를 찾을 수가 없었다.
솔티에서 온 왕녀를 보필하는 게 두 하녀가 맡은 일이었다.
그런데 왕녀가 사라져 버렸다. 맡은 임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하녀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대체 어디 가신 거지?”
두 하녀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봤다. 그러다 한 하녀가 어렵게 입을 뗐다.
“일단, 왕녀님께서 사라지셨다고 보고를 올려야겠지?”
“……으응.”
***
쾅!
이카르는 주먹으로 책상을 강하게 내려쳤다.
“하, 미치겠군.”
드한과 베인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조금 전 솔티의 가짜 왕녀가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보고가 올라온 탓이었다.
이카르는 보던 서류를 내려놓고, 왕녀가 머물던 귀빈실로 향했다.
귀빈실의 하녀들은 이카르를 보자마자 넙죽 고개를 숙였다.
“화,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이카르가 시선을 주자, 하녀들은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기 시작했다.
이카르는 그런 그녀들의 뒤통수를 내려다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어떻게 된 건지, 자세히 이야기를 해 주겠나?”
주춤거리며 하녀가 입을 열었다.
“와, 왕녀님께서 갑자기 사라져 버리셨어요…….”
더듬거리며 하녀가 상황을 설명했다.
조금 전 보고를 받았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내용이었지만, 부하의 입을 통해 전해지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었다.
이카르는 그 부분에 주목했다.
“부르기 전까지는 방에 절대 들어오지 말라고 했다고?”
“예, 예.”
“이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나?”
잠시 생각하는가 싶던 하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 아뇨. 그런 적은 없었어요.”
“그래서 너희는 어떻게 했지?”
“왕녀님께서 부르실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식사도 하지 않으시고, 방 밖으로 나오지도 않으셔서 좀 이상하다 싶어서 침실 문을 열어 봤더니…….”
“알겠다.”
이카르는 직접 안으로 들어가 귀빈실 내부를 살폈다.
처음에는 납치를 의심했다. 괴한이 탄신일에 르네브를 노린 게 불과 며칠 전이었으니.
바슈케르와 솔티 양국의 동맹을 원치 않는 누군가의 소행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밖에서 안으로 침입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만약 침입이 있었다면 조금이나마 소란이 일었을 것이고, 함께 지내는 하녀들이 몰랐을 리가 없었다.
안에서 누군가 도왔다면?
그건 가능할 것 같았다. 하녀들의 도움이 있었다면…….
“여기가 그대들이 사용하는 침실인가?”
“네. 폐하.”
이카르는 하녀들의 침실 안쪽을 눈짓했다. 그러자 함께 온 기사들이 안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잠시 몸수색을 하겠다.”
그에 그치지 않고, 여성 기사가 하녀들의 몸을 수색하려 들자 잔뜩 겁에 질린 하녀들은 몸을 웅크리며 항변했다.
“저, 저희는 정말 아무 짓도 하지 아, 않았어요. 폐하……!”
“네, 맞아요! 정말로 아무것도 몰라요.”
“그렇다면 문제 될 것 없다. 필요한 조사를 하는 것뿐이니.”
그러니 너무 무서워하지 말라는 뜻이었으나, 하녀들은 이미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한 듯 눈물을 쏟아 냈다.
하녀들의 몸수색을 맡았던 기사가 고개를 저었다.
“폐하,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저쪽도 마찬가지입니다.”
곧 하녀들의 방을 수색했던 기사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카르는 일단 방 안에서 수상한 금품이 나오지 않은 하녀들에겐 혐의가 없다고 판단 내렸다.
누군가 가짜 왕녀를 납치하려 했고, 하녀들이 그에 동조했다면 마땅한 보수를 받았을 거란 추측대로라면 말이다.
하녀들에 대해서는 추후 조사하기로 마음먹고 이카르는 가짜 왕녀의 침실로 향했다.
“내부를 샅샅이 살펴봐.”
“예, 폐하!”
이카르의 지시에 기사들이 드레스 룸, 응접실, 욕실 등 귀빈실 이곳저곳으로 흩어졌다.
가짜 왕녀의 침실 및 드레스 룸에는 금화로 바꿀 만한 값진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 마치, 누군가 미리 쓸어 가기라도 한 듯이.
“역시, 그런 건가.”
이제 알겠다는 듯 작게 중얼거린 이카르는 기사들을 향해 외쳤다.
“솔티의 왕녀 아드리아 아니, 가짜 왕녀에게 수배령을 내린다.”
줄곧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던 두 하녀가 고개를 번쩍 들고 이카르를 쳐다봤다.
실종된 왕녀에게 수배령을 내린다니? 가짜 왕녀라니?
의문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그중 기사 하나가 호기롭게 물었다.
“폐하. 솔티의 왕녀, 아니, 가짜 왕녀에게 어떤 혐의로 수배령을 내리시는 건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세이렌 후작 영애의 살인 미수 혐의.”
하녀들은 물론이고, 기사들도 놀란 듯 입을 쩍 벌렸다.
***
솔티 왕녀의 실종으로 황궁 안은 떠들썩했다.
그리고 솔티의 왕이 가짜 왕녀를 보냈다는 소식을 접한 바슈케르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분노했다.
“평화 협정에 가짜 왕녀를 보내다니 웃기지도 않는군.”
“기만도 이런 기만이 있나? 이건 솔티에서 우리 바슈케르를 우습게 보고 있다는 것과 다름이 없지.”
황궁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워들은 앰버는 얼른 르네브에게로 가 이 사실을 알렸다.
“아가씨! 지금 온 황궁 안이 가짜 왕녀의 실종 이야기로 난리예요.”
앰버에게서 사건의 자초지종을 전부 듣고 나자 키어넨이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는 듯 명치를 쓸어내렸다.
“그럼 더는 그 가짜 왕녀가 레이디를 해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요.”
“제 말이요!”
에시카가 사라졌다는 소식에 기쁜 기색을 여실히 내비치는 두 사람과 달리 르네브의 속은 조금 복잡해졌다.
‘에시카의 왕녀 신분이 가짜였다는 걸 이카르가 알고 있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