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드한의 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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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드한의 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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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드한의 실수
2023.06.01.
탄신일 준비만으로도 오늘은 체력 낭비가 어마어마했다. 그런 와중에 괴한들의 등장까지…….
알게 모르게 잔뜩 긴장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앞으로의 일에 대해 생각하고 싶은데 자꾸만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왔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라앉았던 르네브의 의식이 빠르게 끌어 올려졌다.
‘잠깐 사이에 졸았나 보네.’
잠기운이 내려앉은 눈꺼풀을 느리게 깜빡이던 르네브는 또다시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현관으로 가까이 다가갔을 때쯤 문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저예요. 앰버.”
“레이디, 저도 있어요.”
드한이 귀빈실에 들러 둘에게 말을 전해 준 모양이었다.
“들어와.”
내부를 둘러본 앰버와 키어넨의 눈이 둥글게 커졌다.
“우와……!”
이내 연신 감탄사를 연발했다.
귀빈실도 지내기엔 부족함이 없었지만, 확실히 이곳은 호화로움의 극치를 달렸다.
당분간은 여기서 지내야 하는 터라 앰버와 키어넨은 내부를 꼼꼼히 살폈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알아 둬야 생활하기 편하니까.
“그런데 아가씨, 오늘 탄신 연회는 어떠셨어요?”
벗어놓은 르네브의 드레스를 정리하며 앰버가 물었다. 장신구를 챙기던 키어넨도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르네브를 쳐다봤다.
오늘 하루 동안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르네브는 무엇부터 이야기하면 좋을지 잠깐 고민했다.
“일단은 씻고 싶은데.”
르네브는 힘없이 미소 지었다. 눈만 붙이면 3초 안에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피곤하시죠? 그래요. 레이디, 이야기는 내일 해요.”
“욕실이 세 곳이나 되던데 어느 욕실을 사용하시겠어요?”
앰버가 물었다.
“복도 끝에 있던 욕실이 좋겠어.”
두 곳은 뜨거운 물을 새로 받아야 했고, 가장 큰 욕실은 언제든 욕조에 들어갈 수 있게끔 뜨거운 물이 잔뜩 받아져 있었다.
은사자의 입에서 나오는 온수가 물을 순환시키는 구조인 듯했다.
“제가 목욕 시중을 들게요. 그럼 한 30분 뒤쯤 들어가면 될까요?”
키어넨의 물음에 르네브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욕실 안으로 향했다.
쏴아아아.
사냥감을 향해 포효하는 듯 자세를 잡은 은사자의 입에서 거센 물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르네브는 멋들어진 욕실 안을 둘러보다가 대리석에 머리를 기댄 채로 편안히 눈을 감았다.
“아…… 좋다.”
처음에는 물의 온도가 너무 뜨거운 게 아닌가 싶었지만, 조금 지나자 오히려 시원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얼마나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었을까.
피곤이 풀어짐과 동시에 눈꺼풀이 자꾸 무겁게 내려앉았다. 자칫 잘못하다간 잠이 들 것 같았다.
르네브가 막 욕조에서 몸을 일으켰을 때 인기척이 느껴졌다.
몸을 닦아 주러 키어넨이 들어온 모양이었다.
“키어넨?”
르네브는 인기척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
그리고 고개를 돌린 그대로 굳고 말았다.
***
귀족들과 대화를 나누던 이카르는 그레이트 홀로 접어드는 드한을 발견하고 근처의 시종에게 지시를 내렸다.
곧 부름을 받은 드한이 이카르 곁으로 다가와 섰다.
“어떻게 됐지?”
드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여러 방법을 동원해 심문해 봤으나, 정말 의뢰인이 누군지 모르는 것 같습니다.”
예상하긴 했으나, 실망스러운 대답이었다.
“처분은 어떻게 할까요?”
“일단 살려서 황궁 밖으로 내보내.”
“추적자를 붙이면 되겠습니까?”
그렇게 할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드한이 되물었다.
“그래.”
“알겠습니다. 폐하. 더 시키실 일 있으십니까?”
“세이렌 후작 영애는?”
“황궁 가장 안쪽의 침실로 안내해 드렸습니다.”
황궁 가장 안쪽 침실이라…….
이카르는 마른 입술을 핥았다. 그러자 드한이 물었다.
“제가 괜한 짓을 했습니까?”
“아니야, 가 봐.”
이카르는 드한에게서 시선을 떼어 내곤 포도주를 들이켰다.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기 무섭게 곁에 있던 귀족이 이카르에게 말을 걸었다.
“…….”
드한은 그 모습을 잠깐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채 몇 걸음 떼지 않아 홀에 있던 귀족이 드한에게 말을 걸어왔다.
“오늘 아주 바빠 보이십니다.”
“척 봐도 그렇게 보입니까?”
드한은 피곤한 낯을 한번 쓸어내리고는 옅게 미소 지었다.
“폐하께서도 참, 얼른 황후를 들이시면…….”
드한에게 제 딸아이를 소개한 다음 이카르와의 접점을 만들어 보고자 하는 말이 뒤따랐다.
흐린 눈으로 옆에서 떠드는 귀족의 말을 흘려듣던 드한은 불현듯 든 떠오른 생각에 잠시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 보니, 세이렌 후작 영애에게 그 침실의 욕실이 폐하의 침실과 연결되어 있다고 전했던가?’
매일 그러했지만, 특히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던 터라 뇌에 과부하가 온 것 같았다.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안 한 것 같기도 하고…….’
드한이 가물거리는 기억을 더듬는데, 누군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베인이었다.
“휴…….”
베인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왜 이렇게 인생이 고되냐.’ 따위의 생각을 한다는 것이 베인의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드한은 그런 베인의 등을 두어 번 두드렸다. 모실 주군을 잘못 만난 건 둘 다 똑같다는 심정으로.
“포도주 한잔하시겠습니까?”
때마침 근처를 지나던 하인이 포도주를 권했고, 베인은 트레이에 올려진 잔 두 개를 집어 들며 말했다.
“폐하께선 뭐라고 하셔?”
“추적자 붙여서 일단 황궁 밖으로 내보내라고.”
베인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포도주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쓰읍…….”
그때 드한이 미간을 모으며 헛숨을 들이켰다. 베인이 드한을 쳐다보며 물었다.
“왜?”
“조금 전까지 제법 중요한 일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뭔데.”
“뭐였지?”
“그걸 나한테 물으면 내가 알아?”
퉁명스러운 베인의 대꾸에 드한은 미간을 모았다. 베인이 드한에게 포도주 한 잔을 내밀었다.
“그냥 쭉 들이켜.”
기억을 더듬으며 뺨을 긁적이던 드한은 이내 생각하기를 그만두고 베인에게서 잔을 받아 들었다.
중요한 일이라면 다시 떠오르겠거니 하며.
***
탄신일 연회는 아침까지 계속되겠지만, 이카르는 적당히 유력 귀족들과 어울린 뒤에 홀을 빠져나왔다.
집무실에 들러 급한 서류들을 확인한 다음엔 연무장에 갈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연무장은 연회장 홀 테라스에서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있었다.
귀부인들의 눈요깃거리가 되는 것도 원치 않았고, 이카르와 겨뤄 보고 싶어 하는 기사들도 있었다.
여러모로 귀찮은 일이 뒤따를 것이었다. 이카르는 곧장 침실로 돌아왔다.
탄신일 연회 때문에 일손이 부족했기에, 시종도 두지 않은 채였다.
제복 재킷을 벗던 이카르는 주머니에 든 것을 확인하고는 미소 지었다.
말간 얼굴로 축하의 말을 건네며 르네브가 주었던 생일 선물이었다.
‘생신 축하드려요. 폐하.’
입맞춤 후에는 새빨개진 얼굴로 시선을 내리까는 모습이 정말 사랑스러웠다.
최고의 생일이었다.
르네브를 습격하도록 사주한 놈의 정체만 밝혀내 죽사발을 만들어 준다면 말이다.
이카르는 이를 부득 갈다가 손바닥 위의 작은 장식품을 힐끗 보고는 옅게 미소 지었다.
기뻐했다가 분노했다가, 르네브와 관련된 일이면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제 기분이 생경했다.
“하…….”
이카르의 잇새로 헛웃음이 비죽 튀어나왔다.
머저리 같기도 하고.
저 자신을 조소하며 이카르는 침대맡 협탁에 르네브가 준 선물을 올려놓았다.
오늘은 잠을 잘 잘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며 이카르는 욕실로 향했다.
쏴아아아아.
사시사철 온수가 샘솟는 욕실 안은 뜨거운 온기로 후끈했다.
‘누가 있어……?’
이카르는 미간을 모았다.
뿌연 시야 너머에 인영이 보였다.
이곳은 황제 전용 욕실이었다. 정확하게는 황제 부부를 위한.
그러나 황후 자리가 공석이므로 지금은 이카르만 사용하는 곳이었다. 황제의 욕실을 허락도 없이 사용하는 겁 없는 놈이 누군지 꽤 궁금했다.
이카르는 사냥감을 앞둔 포식차처럼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상대가 기척을 느낄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하지만 욕실 안의 선객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담하기 짝이 없군.”
결국, 참다못해 이카르는 나지막이 으르렁거렸다.
그러자 다급하게 숨을 헉, 들이켜는 소리가 울렸다. 이카르는 저벅저벅 걸어 거대한 욕조 앞까지 다가갔다.
“……영애? 여기서 뭘 하는 거지?”
당황한 얼굴로 다급하게 몸을 가릴 것을 찾던 르네브가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곤 얼굴만 빼꼼 내민 채로 눈만 깜빡였다. 얼마나 오래 욕실에 있었던 건지 목부터 얼굴까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아, 저…….”
세상 오래 산 것처럼 초연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당황한 듯 빠르게 눈을 굴리던 르네브가 이내 눈을 꾹 감았다.
“폐하. 여긴 어떻게 들어오신 거예요?”
이카르는 르네브를 위해 대리석 하나를 두고 그녀와 등을 맞대고 앉았다.
“드한이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았던 모양이군.”
“드한 경이요?”
“그래. 영애가 지금 머무는 곳은 원래 황후의 침실이거든.”
“아…….”
그제야 알겠다는 듯 르네브가 작게 탄식했다.
“내게 따질 생각은 마. 영애를 황후의 침실로 안내한 건 내 지시가 아니었으니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르네브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등을 맞댄 자세였기에, 지금쯤 르네브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했다.
이카르가 막 입을 떼려는 찰나, 등 뒤에서 르네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아까 붙잡은 사람들은 어떻게 됐나요?”
“일단은 풀어 줬어.”
“그렇군요.”
몰래 르네브를 습격하려 했던 만큼 놈들의 목적은 불순할 게 틀림없었다. 그런 자들을 풀어 줬다는 데도 르네브의 목소리가 너무 덤덤했다.
“서운하게 생각 안 하나?”
“배후를 캐기 위한 일 보 후퇴 아닌가요?”
이카르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르네브의 대답이 너무 만족스러웠기 때문에.
“왜 웃으세요?”
“영애와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내가 귀족 아가씨와 대화를 하는 게 맞는지 가끔 의심하게 되거든.”
“제가 귀족 영애답지 않다는 말씀을 돌려 하시는 건가요?”
르네브의 목소리에 약간 날이 서렸다. 하지만 진심으로 분노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 건 아냐. 단지, 대화가 너무 잘 통해서. 가끔 동료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더군.”
등 뒤에서 푸스스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카르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조금 전부터 르네브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매우 궁금했던지라 무심코 나온 행동이었다.
욕조에 오래 몸을 담그고 있었는지 뺨에는 핑크빛 홍조가 올라와 있었고, 은색 속눈썹은 촉촉했다.
나른하게 풀어진 얼굴에 드리운 미소가 너무나 예뻐서, 이카르는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로 르네브를 응시했다.
“하…….”
곧 이카르의 잇새로 앓는 듯한 탄식이 새어 나왔다. 그러자 르네브가 웃음기를 지우고 물었다.
“폐하, 왜 그러세요?”
“아무것도 아냐. 먼저 나가 볼 테니, 영애는 충분히 목욕을 즐기도록 해.”
이카르는 다급하게 욕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얼른 욕실 문을 닫아 버렸다.
그것만으로는 만족스럽지 않다는 듯 이카르는 욕실 문에 걸쇠까지 채웠다. 마치 르네브와 자신을 격리하려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