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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화 보복해 올 거야 (61/148)


#61화 보복해 올 거야
2023.05.31.


제 드레스 자락을 붙들고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꼴을 직접 봐야만 얼굴의 흉터에 대한 보상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굳이 이 먼 별장까지 잘츠 후작을 따라온 참이었다.

“춥지는 않으십니까?”

에시카를 지분거리며 잘츠 후작이 물었다. 떨어지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으며 에시카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은데요. 후작님의 품이 따듯해서 그런가.”

에시카가 싱긋 웃자, 잘츠 후작이 그녀의 이마에 쪽 입을 맞췄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록 밖은 조용하기만 했다.

“왜 이렇게 늦는 걸까요?”

탄신일 연회는 내일 아침까지 이어질 예정이었으나, 중간에 지쳐 돌아가는 사람도 적지 않을 터.

사람이 많은 틈을 노리는 게 수월했으므로, 지금쯤은 르네브를 실은 마차가 별장에 도착했어야 했다.

살짝 신경이 예민해진 에시카를 다독이며 잘츠 후작이 말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죠. 곧 도착할 겁니다.”

“…….”

에시카는 대답하지 않고, 소파에 턱을 괸 채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심기 불편한 에시카의 모습에 잘츠 후작이 곤란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일 때였다.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에시카와 잘츠 후작은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도착한 모양이군요.”

잘츠 후작의 얼굴에 안도감이 어렸다. 에시카도 그제야 미소를 되찾았다.

‘너무 예민하게 굴었나.’

에시카는 자조하며 잘츠 후작과 별장 밖으로 나갔다.

곧 르네브의 처참한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자꾸만 입가가 씰룩여졌다.

“……?”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별장 밖에는 말을 탄 사내 한 명밖에 없었다. 사내가 말에서 내리자마자 가쁜 숨을 정리하고는 말했다.
“계획이 시, 실패한 것 같습니다.”

“뭐?!”

잘츠 후작이 노발대발하면서 어찌 된 일이냐며 그를 다그쳤다. 남자가 덜덜 떨며 상황을 설명했다.

“그, 그것이. 저는 황궁에서 여기까지 수송을 맡기로 했습니다만, 한참을 기다려도 용병들이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아서……. 그 사실을 전해 드리러 왔을 뿐입니다.”

잘츠 후작이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욕설을 뇌까렸다.

여태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그의 거친 언사에 에시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후작님?”

그제야 아차 싶었는지 잘츠 후작이 쯧, 혀를 찼다.

이내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운 잘츠 후작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밖이 춥군요. 왕녀님께선 안에 들어가 계십시오. 제가 상황을 알아보겠습니다.”

에시카는 잘츠 후작의 말대로 별장 안으로 들어가 숨을 죽이고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후작이 뭐라고 떠드는 소리에 이어 말발굽 소리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제가 조금 흥분했군요.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 드렸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별장 안으로 들어온 잘츠 후작이 부드럽게 말했다.

“아, 아니에요.”

에시카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는 어떻게 된 건지가 중요했다.

“어떻게 된 거예요?”

“황궁에 기사를 보내 두었으니, 곧 소식을 전해 올 겁니다.”

“…….”

화기애애했던 조금 전과 달리 별장 안은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일이 잘못된 건가?’

상황을 보러 황궁에 간 기사들을 기다리며 초조하게 시간을 보내는데.

짹짹.

밖에서 새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날이 밝을 때까지 르네브가 도착하지 않자, 에시카는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때 밖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왕녀님께선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제가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잘츠 후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별장을 나갔다.

에시카는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창가 쪽으로 다가가 밖을 내다봤다.

이번에도 르네브를 실은 마차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그저 상황을 보러 간 후작 가의 기사가 돌아왔을 뿐.

잘츠 후작의 표정을 봐선 일이 잘 못 된 게 틀림없었다.

‘어떡하지.’

에시카는 하얗게 질리도록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왕녀님. 오늘은 이만 황궁으로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모셔다 드리죠.”

별장 안으로 들어온 잘츠 후작의 첫마디였다. 상황이 어떻게 된 거냐고 묻는 에시카의 시선에 잘츠 후작이 덧붙였다.

“안타깝지만 다음을 기약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용병들이 금화만 챙기고 도주한 모양입니다.”

“뭐라고요?”

에시카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되묻자, 잘츠 후작이 심란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왕녀님. 금방 다음번 기회가 찾아올 겁니다.”

“……그럴까요?”

“그럼요. 저만 믿으십시오. 무슨 일이 있어도 제가 꼭 왕녀님을 지켜 드릴 테니.”

“그것참…… 마음이 놓이네요.”

에시카는 그렇게 말한 뒤 지친 몸을 이끌고 마차에 올랐다. 별 소득도 없이.

‘어떡하면 좋지.’

에시카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믿지 않았다.

특히나 자기만 믿으라고 호언장담하는 사람치고 제대로 된 사람을 보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뭔가를 숨기려 드는 것 같았다.

에시카는 잘츠 후작을 떠보기로 했다. 일이 대체 어떻게 된 건지 알아 둬야 대처도 할 수 있으니.

“그럼 용병들은 시도조차 하지 않고, 금화만 챙겨서 도망쳤다는 건가요?”

생각에 잠겨 마차 창 너머만 응시하던 잘츠 후작이 에시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그게 말이죠…….”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마차를 돌려 주세요. 의뢰를 맡겼던 곳으로.”

“예? 가서 어쩌시려는 겁니까?”

“그렇잖아요. 일도 하지 않고, 보수만 챙기다니요? 그런 불한당들은 가만히 둬서는 안 돼요. 단단히 일러둬야…….”

납치를 의뢰한 쪽도 떳떳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에시카는 부러 잘츠 후작을 자극할 말을 골라서 했다.

“음…… 왕녀님 말씀도 일리가 있지만, 그건 곤란합니다.”

잘츠 후작이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못 말리는 어리광쟁이라도 보는 눈빛이었다.

“왜요?”

에시카는 부러 순진한 얼굴로 되물었다. 정보를 얻기엔 이편이 유리했다.

“일단…….”

잘츠 후작이 마른 입술을 핥았다.

대체 이 머리 맑은 여자에게 어떻게 상황을 이해시켜야 하는지 골치가 아픈 표정 모양이었다.

“귀족을 납치하려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중죄입니다. 용병들에게 죄를 묻고자 한다면 재판에 회부한다면 의뢰한 저희도 처벌을 면치 못할 겁니다.”

저희?

에시카는 자신과 후작 본인을 공범으로 묶는 듯한 단어에 움찔했다.

“…….”

“당연히 그들도 그걸 잘 알고 있을 테고요.”

“세상에!”

에시카는 꿈에도 몰랐다는 듯 헉, 숨을 들이켜며 놀란 척했다. 그러곤 바로 덧붙였다.

“그들이 나중에 그 일을 들먹이며 후작님을 협박해 올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저는 너무 걱정돼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왜요?”

“강력 범죄를 의뢰할 때는 비대면을 기본 원칙으로 하거든요. 그래야 일이 잘못되더라도 의뢰인의 신분이 특정되지 않으니까요.”

약간 귀찮은 기색이 묻어났지만, 이번에는 잘츠 후작이 더욱 자세히 설명했다.

“아, 그럼. 그 용병들은 의뢰인이 누군지 모르고 있다는 뜻인가요?”

“그렇습니다.”

에시카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생각했다.

용병들이 정말로 금화만 챙겨서 내뺀 거라면 차라리 나았다. 르네브는 아무것도 모를 테니까.

하지만 만약 그들이 임무에 실패한 거라면 에시카 입장은 매우 불리해진다.

현재의 르네브가 뻬쉬를 보낸 인물이 에시카라는 걸 금방 눈치챈 것도 그렇고 바로 반격해 온 것도 그렇고.

자신이 알던 원작의 르네브와는 너무나 달랐다.

자연히 용병들이 임무에 실패했을 거란 쪽으로 생각의 무게가 기울었다.

‘르네브 쪽에서 보복해 올 거야.’

지난번처럼 똑같은 방법으로 갚으려 한다면 자신은 어떻게 될까?

무릎에 올려 둔 손이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에시카는 제 양손을 꼭 마주 잡았다.

하지만 그런다고 한번 올라온 두려움과 불안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

“영애. 당분간은 여기서 머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드한이 황궁 깊숙이 자리한 침실로 르네브를 안내했다.

계획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에시카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할 게 분명했다.

그것도 조금 더 과격한 방법으로.

적어도 귀빈실에 머무는 동안엔 납치 시도가 없었으니, 이전처럼 지내도 괜찮을 것 같긴 했다.

하지만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었다.

지금쯤 소식을 듣고 잔뜩 분해하고 있을 에시카의 모습을 상상하자, 귀빈실로 돌아가겠다는 말도 쏙 들어갔다.

“안내해 줘서 고마워요. 드한 경.”

“뭘요. 그보다 귀빈실에서 함께 지내던 하녀들을 불러 드릴까요?”

“부탁드릴게요.”

“이곳은 황궁 안에서도 가장 보안이 철저한 곳이니 안심하고 편히 쉬셔도 될 겁니다.”

드한이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돌렸다.

르네브는 멀어지는 드한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어 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적당한 공간의 대기실이 나왔다. 그리고 그 양옆으로 복도가 있었다.

어느 쪽으로 먼저 가 볼지 잠깐 망설이던 르네브는 오른쪽 복도로 몸을 틀었다.

복도를 지나자 입구보다는 조금 더 넓은 공간이 나왔다.

“여긴 응접실인가 보네.”

가장 먼저 르네브의 시선을 끈 것은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였다.

르네브는 그 앞으로 다가가 건반 몇 개를 눌러 보며 내부를 둘러봤다.

커다란 창 아래로 소파와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큼지막한 벽난로 위에는 벽화가 걸려 있었다. 바닥에는 폭신한 러그가 깔려 있었다.

넓고 화사한데도 불구하고 안락한 분위기를 풍기는 묘한 곳이었다.

응접실을 쓱 훑어본 르네브는 눈에 보이는 문을 하나하나 전부 열어 봤다.

트왈렛 룸과 커다란 침실 하나, 작은 침실이 다섯 개, 욕실이 총 세 개였다.

그중 복도 제일 끝 쪽에 있는 욕실이 가장 컸는데, 귀빈실에 있던 것보다 욕조가 몇 배는 컸다.

‘대중목욕탕인가?’

물론 그렇다고 치기에는 내부가 엄청 화려했지만.

욕실을 나와 복도를 걷자, 처음 들어왔을 때 봤던 입구가 나왔다.

양쪽 복도가 원형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왼쪽으로 가나, 오른쪽으로 가나 입구가 나오게끔 말이다.

‘신기하네.’

특이한 구조에 신기해하던 르네브는 문득 든 생각에 입술을 깨물었다.

‘가만, 저 조각상 어느 서적에서 본 것 같은데?’

르네브의 기억이 맞는다면 보물급의 값어치를 지닌 조각상이었다.

‘……잠깐?’

에이, 설마 아니겠지 싶으면서도 르네브는 이곳이 황후의 침실이 아닐지 의심했다.

귀빈실도 무척이나 신경 써서 고급스럽게 지어 놓았지만, 저 정도로 값어치 있는 예술품은 두지 않았었다.

‘설마, 아니겠지…….’

르네브는 이내 지나친 생각이라 여기며 고개를 저었다.

르네브는 현관과 제일 가까운 위치에 있는 응접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커다란 창문 앞에 놓인 소파에 편안하게 등을 기대고 앉았다.

폭신한 소파는 마치 한 몸처럼 등허리를 받쳐 주었다. 엄청 편안했다.

그래서 그런가?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긴장이 탁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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