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축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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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축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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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축포
2023.05.30.
역시 이카르는 눈치가 빨랐다.
“그런 셈이죠.”
“절대 안 돼.”
르네브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카르가 반대하고 나섰다.
“여러 가지 이유로 누가 저를 해치려 드는지는 말씀드릴 수 없어요. 게다가 범행을 모의한 것만으로는 제국법으로 처벌할 수도 없죠.”
회귀 전의 이야기는 쏙 빼고 에시카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고 말하는 것도 문제였다.
가짜지만, 지금 에시카는 솔티의 왕녀 신분이었다.
만약 에시카를 처벌한다면 바슈케르와 솔티의 평화 협정에도 금이 갈 수 있었다.
그러니 에시카의 이름을 거론해 봤자 이카르의 속만 시끄러워질 문제였기에, 르네브도 속 시원히 말할 수가 없었다.
“저 폐하. 일단 영애의 입장을 한번 들어 보신 뒤에 결정하심이 어떨까요?”
드한의 권유에 이카르가 미간을 와락 구겼다. 대놓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지만, 반대하지는 않았다.
“폐하께선 비밀 호위들의 능력을 믿으시나요?”
“그걸 말이라고. 그들은 바슈케르의 최정예 전사들이야. 실력 면에선 제국 어디에 내놔도 절대로 뒤지지 않아.”
“그렇다면 그들을 믿어 보시는 건 어떠세요?”
“하…….”
이카르가 헛웃음을 뱉었다.
여기서 르네브가 내놓은 미끼 작전을 계속 반대한다면 그건 이카르가 비밀 호위들의 능력을 믿지 않는다고 입증하는 셈이었다.
“정말이지, 영애는 영악하군.”
***
슬슬 계획을 실행해도 괜찮지 않을까?
에시카는 그런 생각을 하며 찰츠 후작을 쳐다봤다.
“왕녀님, 저길 보십시오.”
잘츠 후작이 황궁 정원을 가리켰다. 인부들이 분주하게 수레에 담긴 무언가를 옮기고 있었다.
“곧 시작할 건가 보네요.”
에시카의 말에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담소를 나누던 귀족 몇몇이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곧 축포를 터뜨릴 모양이네요.”
한 귀부인이 홀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귀족들이 웅성거리며 덩달아 창문 쪽으로 모여들었다.
에시카는 르네브를 찾아 홀 안을 슬쩍 둘러봤다.
‘응? 조금 전까진 저기 있었는데……. 그새 어디로 갔지?’
그러나 여전히 르네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에시카는 조금 불안해졌다.
홀 안을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는 에시카의 등허리를 쓸어내리며 잘츠 후작이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일 처리만큼은 확실한 자들에게 맡겨 두었으니, 왕녀님께서는 밤하늘을 예쁘게 수놓을 축포를 구경하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참 마음이 놓이네요.”
에시카는 싱긋 웃으며 커다란 창 너머를 응시했다.
펑!
밤하늘 높이 불꽃 하나가 쏘아 올려졌다. 그것을 신호탄 삼아 뒤이어 또 다른 불꽃이 하늘을 예쁘게 수놓았다.
“와아……!”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모두가 밤하늘을 올려다보는데 정신이 팔린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
펑!
갑작스럽게 들려온 축포 소리에 깜짝 놀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창가로 다가갔다.
마침 르네브의 근처를 지나던 하인이 어깨를 움찔 떨었고, 그 탓에 그가 들고 있던 음식 접시가 위태롭게 휘청였다.
“……!”
접시에서 흘러내린 소스가 떨어진 곳이 하필 르네브의 드레스 위였다.
작은 얼룩이 생긴 드레스를 내려다보며 르네브는 한숨을 내쉬었다.
허둥지둥거리며 하인이 계속 허리를 숙였다. 사과하는지 연신 그가 뭐라고 떠들어 댔으나, 연이어 들려오는 축포 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영애. 이럴 때를 대비해 여벌 드레스를 마련해 두었으니, 너무 속상해 마십시오.”
드한이 르네브의 귓가에 대고 소리쳤다.
르네브는 하인에게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괜찮으니 그만 가 보라 손짓했다.
드한이 지나가는 하녀를 붙잡고 지시를 내리자, 고개를 끄덕인 하녀가 복도 쪽을 향해 공손히 손짓했다.
르네브는 그레이트 홀을 벗어나 긴 복도를 걸었다. 하녀가 복도 안쪽의 손님방으로 르네브를 안내한 뒤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멀어졌다.
“여긴 좀 조용하네.”
방음에 신경을 써서 그런지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연신 터지던 축포 소리가 멀게 느껴졌다.
르네브는 커다란 창문 앞으로 다가가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밤하늘이 꽃과 나비를 수놓으며 잠깐 번쩍이다, 곧 새까맣게 물들었다.
펑!
색과 모양을 바꿔 가며 밤하늘을 밝히는 불꽃이 꽤 아름다웠다. 입까지 살짝 벌린 채로 넋을 잃을 정도로.
“……?”
그때 혼자뿐이어야 할 방 안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르네브는 뒤돌아보는 대신 창문에 비친 방 안을 바라봤다.
누군가 있었다.
때마침 쏘아 올려진 불꽃이 사라지면서 사위가 어둑해졌다.
‘대체 몇 명이지?’
르네브는 어둠 속에서 상대의 기척을 읽으려 오감을 끌어 올렸다.
그리고.
펑! 소리와 함께 어두웠던 사위가 밝아졌다. 창문에 비친 괴한들의 거리가 조금 전보다 가까워져 있었다.
펑!
마치 그 소리를 신호탄으로 삼은 듯 방안의 괴한들이 르네브 쪽으로 달려들었다.
드레스를 꽉 움켜쥔 르네브가 문 쪽으로 달리려던 순간이었다.
문이 발칵 열렸다.
“영애!”
곧 이카르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의 뒤엔 드한과 베인이 함께였다.
“뭐, 뭐야?!”
갑자기 등장한 세 사람으로 인해 괴한들은 혼비백산했다. 르네브를 먼저 붙잡아야 할지 그들을 먼저 처리해야 할지.
하지만 그들의 고민은 별 의미가 없었다.
바슈케르의 최정예 전사들이자, 이카르의 비밀 호위가 가세했으니까.
르네브의 지척에 있던 괴한 중 하나가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르네브를 인질 삼아서 이곳을 빠져나가려 한 모양이었다.
“……!”
하지만 르네브는 재빨리 그 자리에 주저앉아 괴한의 손을 피했다.
공연히 허공에 헛손질만 하게 된 괴한이 욕설을 뇌까리며 르네브를 잡아채려는 순간이었다.
“감히.”
짜증스러운 이카르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르네브는 몸을 웅크린 채로 눈을 꾹 감았다.
곧 쿵, 하고 바닥 위로 무거운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영애.”
어깨를 움켜쥐는 손길에 르네브는 감았던 눈을 떴다. 코앞까지 다가온 이카르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아?”
르네브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 찮아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이카르가 눈을 질끈 감았다.
“전부 처리한 건가요?”
이카르의 넓은 흉통 옆으로 르네브가 고개를 빼꼼 내밀며 상황을 살폈다.
“그럼요. 전부 붙잡았습니다.”
베인이 괴한 하나의 목덜미를 밟은 채로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황제의 비밀 호위들은 나머지 괴한들을 끈으로 묶고 있었다.
눈 깜짝할 새에 괴한들을 제압한 모양이었다.
“폐하. 이놈들을 데려가서 심문할까요?”
드한의 물음에 이카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이놈들아.”
베인과 드한이 괴한들을 데리고 방을 나갔다. 이카르의 비밀 호위들은 이미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펑!
그때 들려온 축포 소리에 르네브와 이카르는 동시에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크기뿐 아니라 일곱 가지 색이 조화를 이루는 정교한 꽃의 형태가 매우 아름다웠다.
“마지막은 볼 수 있어 다행이군.”
이카르의 말대로 하늘을 수놓던 색색의 불꽃도 커다란 축포 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
“하…… 기껏 준비했는데, 아깝게 됐군.”
이카르는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이카르는 오늘 르네브에게 정식으로 청혼하기 위해 많은 준비를 해 왔다.
르네브의 기호에 맞춰 음식과 음료를 준비했고, 실내 장식이나 의복도 그 어느 때보다 훨씬 신경을 썼다.
의복 또한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만 커플룩으로 맞췄고.
그리고 대미를 장식하고자 했던 마지막 불꽃이 방금 꺼진 참이었다.
‘절대 가만 안 둬.’
갈 곳 잃은 이카르의 분노는 자연히 괴한들과 그들을 고용한 의뢰인에게 향했다.
장차 바슈케르의 황후이자, 제 아내가 될 사람이자, 제 아이의 어머니가 될 여자를 건드리려 했다는 점은 이카르를 분노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잡히면 최소 효수형이다.’
이카르는 이를 바득 갈았다.
어떤 놈인지 걸리기만 하면 사지를 절단 낼 생각으로 이카르의 머릿속이 가득 찼을 때쯤 르네브가 말했다.
“생신 축하드려요. 폐하.”
생긋 미소 짓는 얼굴이 말갛다.
이상한 일이었다.
조금 전까지 터질 것 같은 분노가 르네브의 미소 한 번에 사르르 녹아내리다니.
사실 이카르는 호숫가에서 입을 맞춘 뒤부터 계속 르네브와 닿고 싶었다.
하지만 르네브는 그런 이카르의 심리를 알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저렇게 예쁘게 웃는 걸 보면.
“폐하?”
그는 여전히 사랑스러운 얼굴로 생글거리는 르네브의 허리를 휘감아 제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그리고 입을 맞췄다.
이카르의 품에서 벗어나려 르네브가 잠깐 버둥거렸지만, 입맞춤이 깊어지자 거부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
맞닿은 입술이 떨어지자, 르네브는 떨리는 시선으로 이카르를 바라봤다.
잘생기기는 또 왜 이렇게 잘생겨서 사람 마음을 흔들어 놓는지.
큰일이었다.
이카르와의 입맞춤이 싫지 않아서, 싫기는커녕 자꾸 몸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이카르와 더 가까워지고 싶은 충동마저 들었지만, 르네브는 애써 그 마음을 외면하고 물었다.
“그런데 오늘의 주인공께서 여기 계셔도 되나요?”
축포는 탄신일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행사였다. 지금쯤 홀 안의 귀족들과 시종들은 황제를 찾고 난리일 터였다.
붉게 물든 르네브의 보드라운 뺨을 만지작거리며 이카르가 오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에 있든, 그건 황제 마음이지.”
감히 누가 제게 자리를 비웠냐고 따질 수 있겠냐는 듯이.
그러곤 다시 입을 맞춰 왔다. 조금 전보다 더 다급하고 갈급하게.
***
밤하늘에 쏘아 올려진 마지막 불꽃을 끝으로 에시카는 잘츠 후작과 함께 마차에 올랐다.
말에 오른 후작 가의 기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렇게 얼마나 더 달렸을까.
두 사람을 태운 화려한 마차가 한적한 곳에서 멈춰 섰다.
“안을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기사의 말에 잘츠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작은 별장 안을 둘러보고 나온 기사가 아무도 없다고 알려 주었다.
마차에서 내린 에시카와 잘츠 후작은 작은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근처에 인가가 거의 없어서 그런지 별장 주변은 스산한 분위기마저 자아냈다.
하지만 내부는 그런대로 필요한 가구들이 갖춰져 있었다.
외국으로 팔기 전 잠시 르네브를 머물게 할 곳치고는 상태가 좋아 보였다.
‘좀 더 좁고, 더럽고 후진 곳이길 바랐는데.’
내부를 간단히 둘러본 에시카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왕녀님이 계시기엔 많이 누추하죠?”
잘츠 후작이 에시카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물었다.
단둘이 되자마자 몸을 붙여 오는 잘츠 후작이 조금 불쾌했지만, 에시카는 내색하지 않았다.
아직은 그의 도움이 필요했으니까.
“나름대로 괜찮은데요.”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곧 도착할 테니까요.”
에시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츠 후작은 자신이 알아서 일을 처리한 다음 에시카에게 보고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에시카는 직접 보고 싶었다. 르네브가 절망으로 울부짖는 모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