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솟구친 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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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솟구친 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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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솟구친 열기
2023.05.26.
오늘은 하루가 길었다.
르네브는 침대에 모로 누운 채 눈을 깜짝였다.
몸은 정말 피곤했지만, 쉽게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머릿속이 복잡해서.
결국, 그녀는 창가 앞 소파에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오늘 있었던 많은 일 중 이카르와의 입맞춤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절로 한숨이 쉬어졌다.
“후우…….”
큰일이었다. 이카르와의 입맞춤이 싫지 않아서.
여러 일을 겪으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에게 호감을 느끼게 된 것 같았다.
단지 그녀가 그를 좋아하고 싶지 않을 뿐이지.
이카르는 황제다.
황제는 황후 말고도 얼마든지 정부를 둘 수 있다. 루시우스가 그러했듯이.
파라디움의 황후도 정부를 둘 수 있었지만, 르네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마음을 준 상대를 두고 눈을 돌리는 게 르네브에겐 가능하지 않았으니까.
루시우스의 마음이 에시카에게 가기 시작했을 무렵, 시녀들은 르네브에게 조언하곤 했었다.
‘황후 폐하. 폐하께서도 젊고 아름다운 정부를 두세요. 그래야 공평하지 않겠어요?’
과거 다른 제국에선 황제의 정부를 향한 황후의 시기 질투로 황궁 안엔 피바람이 빈번히 불곤 했다.
그로 인한 혼란을 우려한 파라디움의 황가와 귀족들은 황후도 정부를 둘 수 있도록 법을 바꿨다.
물론 가문을 승계받지 못한 귀족 가의 아들들을 황후의 정부로 들여 신분 상승을 노려 보려는 꼼수에 가까웠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바람이라니.’
누군가는 르네브를 고지식한 여자라고 폄하했지만, 그녀는 사랑하는 루시우스가 있는데 정부를 두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회귀 전에 겪었던 일들은 그녀가 바슈케르의 황후가 되어서도 반복될 수 있었다.
평화 협정이 종료되면 이카르는 다시 정복 전쟁에 나설 확률이 높았다.
회귀 전에도 그러했고.
양국 간의 동맹을 바라며 인접국에선 이카르에게 신부를 보낼 것이 분명했다.
이카르가 원하든 원치 않든. 결혼을 통한 동맹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결합이 될 테니.
게다가 추후, 이카르의 전략에 걸맞은 상대가 또 나타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었다.
그럼 르네브의 처분은 과연 어떻게 될까?
어쩌면 이카르를 첫눈에 반하게 할 만큼 아름답고 매력 있는 영애가 등장할지도 몰랐다.
르네브는 과거를 답습하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안정적인 결혼 생활을 위해선 사랑보다 동맹이 나을지도 모르겠지만.’
르네브는 짧게 조소했다.
계약은 문서가 남지만, 사랑은 증명할 수도 없고 휘발되어 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겁이 났다.
자신이 정말로 이카르를 많이 좋아하게 될까 봐. 그때는 정말로 돌이킬 수가 없으니까.
르네브는 사랑에 직진하는 스타일에 가까웠다. 한 번 마음을 준 상대에게 버려질 때까지 헌신해 버리는.
그 결과 자신까지 상처 입고 마는.
르네브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회귀 전의 이카르는 어땠더라?’
원작에선 일찍 죽어 버렸으니 이렇다 할 정보가 없었고, 회귀 전에는 딱히 결혼을 하지 않았었다.
‘그는 왜 결혼도 하지 않고 전쟁에만 몰두한 걸까?’
창틀에 턱을 괴고 눈을 깜빡거리던 르네브는 번뜩 떠오른 생각에 눈을 크게 떴다.
‘……설마?’
르네브는 회귀 전 바슈케르가 정복 전쟁에서 펼치는 전략에 의문을 품은 적이 있었다.
지형학적으로 봤을 때 빠른 영토 확장을 위해서 바슈케르는 파라디움 서부부터 치는 게 옳다.
수도 벨지니아를 함락한 다음 동대륙으로 세력 확장에 나서기도 쉬울 테니.
하지만 이카르는 그렇게 하지 않았었다.
‘굳이 가까운 길을 두고 먼 길을 빙 돌아가는 수고를 했었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늘 궁금했는데 세이렌 후작 가에 망명을 제안했다는 그의 말을 떠올리니 이제야 의문이 풀렸다.
‘우리 아버지가 그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나?’
새삼 세이렌 후작을 달리 보게 되었다. 약간 뿌듯해하던 르네브는 번쩍 든 생각에 숨을 헉, 들이켰다.
‘설마, 회귀 전에 아버지를 제거한 사람이 이카르는…… 아니겠지?’
잠깐 의심했지만, 르네브는 곧 고개를 저었다.
만약 회귀 전의 이카르가 세이렌 후작을 몰래 처리했다면, 패트릭이 과연 몰랐을까?
‘알고도 이카르와 손을 잡거나 하진 않았겠지.’
어느새 회귀 전의 패트릭과 이카르 사이에 어떠한 접점이 있었을 거란 쪽으로 생각이 기우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만 생각하자.’
그러나 상념은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결국, 르네브는 해가 뜨기 시작할 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
같은 시각. 황궁 안엔 르네브처럼 밤늦도록 잠 못 이루는 사람이 또 있었다.
이카르였다.
대형 침대 위에서 뒤척이던 이카르는 침실을 빠져나왔다.
무언가 몰두할 것이 필요했다.
그래야 반복되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이카르는 곧바로 집무실로 향했다.
보초를 서고 있던 기사들이 이카르를 향해 꾸벅 허리를 숙였다.
“급하게 처리하실 일이 있으신가 봅니다.”
기사의 물음에 이카르는 가볍게 고개만 끄덕이고는 집무실로 들어갔다.
집무실 안은 어두침침했다.
랜턴을 켜 집무실 안을 밝힌 이카르는 짧게 헛웃음을 지었다.
“하…….”
예상에 없는 르네브와의 외출로 오늘 업무에 차질이 있었으니, 일거리가 남았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책상 위는 서류 한 장 없이 깨끗했다.
침실에 든 이후로 다시 집무실을 찾을 줄 알았던 걸까?
드한이 봐야 할 서류를 치워 놓은 모양이었다.
‘물론 폐하보다 나약한 신체를 가진 제가 말씀드리기엔 조금 그렇지만, 매번 밤늦게까지 일만 하시다, 행여 몸이라도 상하실까 걱정됩니다.’
일이라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려던 이카르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연무장에서 훈련이라도 해야겠군.’
이카르는 벽난로 위 진열대로 고개를 돌렸다.
“하…… 정말.”
이카르의 입에서 또다시 헛웃음이 터졌다. 진열대 위에 있어야 할 검이 없었다.
이건 베인의 짓인 듯했다.
지금쯤 푹 자고 있을 두 사람을 깨우는 건 내키지 않았기에, 이카르는 허탈하게 발걸음을 돌렸다.
쏴아아아.
사냥감을 향해 포효하는 듯 자세를 잡은 은사자의 입에서 거센 물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이카르는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채로 대욕탕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뜨거운 온수에 몸을 푹 담그고 나면 몸이 노곤하게 풀어져 잠도 쉽게 올 거란 생각이었다.
쓸데없는 잡생각도 사라…… 지지 않았다.
자꾸만 보드랍고 말캉한 르네브의 입술만 떠올라서. 사실 황궁으로 돌아온 이후로 줄곧 이런 상태였다.
“…….”
이카르는 엄지로 느릿하게 제 입술을 쓸어 보았다.
벌써 몇 시간 전의 일이었지만, 방금 있었던 일처럼 생생했다.
긴장한 듯 뻣뻣하게 굳어진 여체는 작고 보드라웠고, 은색 실타래같이 길고 풍성한 속눈썹은 귀엽게 파르르 떨리다 이내 꾹 감겼다.
이카르는 제가 왜 르네브에게 입을 맞췄던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 충동적이었다.
아니, 본능에 가까웠을지도…….
“예쁘긴, 왜 이렇게 예뻐 가지고.”
자신을 괴롭히는 건지.
르네브 세이렌, 그녀는 이카르의 인생 최대의 난제가 분명했다.
솟구친 열기가 식지 않았기에, 이카르는 한동안 온수에 몸을 푹 담근 채로 명상의 시간을 가져야 했다.
***
루시우스는 최고급 포도주를 느릿하게 입에 털어 넣고는 맞은편을 응시했다.
“드시죠. 리젠시 백작.”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 솔티 왕국의 리젠시 백작이 포도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곧 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호, 독특한 허브 향이 풍기는군요. 혹시 말로만 듣던 밤펜 지역의 포도주인가요?”
“맞습니다. 밤펜 지역에서 매년 극소량만 생산하는 최상급 포도주입니다.”
루시우스의 말에 리젠시 백작의 눈이 더욱 커졌다. 그가 만연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황자 전하께 이런 귀한 걸 대접받다니, 영광스러운 나머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조금 과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는 포도주였다. 루시우스 또한 백작이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 준비한 거였고.
“솔티에서 파라디움까지 먼 길 오셨으니, 특별한 술을 대접하는 게 마땅한 도리 아니겠습니까. 부담 갖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루시우스는 별일 아니라는 듯 산뜻하게 대꾸했다.
이후엔 조사를 통해 미리 알아 둔 리젠시 백작의 관심사를 화제로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끌어 나갔다.
“황자 전하께선 정말 박식하십니다! 이렇게 즐겁게 대화를 나눠 본 게 대체 얼마 만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술기운에 살짝 달아오른 리젠시 백작이 호탕하게 웃었다.
루시우스는 한참 대화에 물이 올랐을 즈음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 참. 왕녀의 유학 기간이 종료된 후의 국제 관계가 어떻게 흘러갈 거라고 예상하시는지, 리젠시 백작의 의견을 듣고 싶군요.”
루시우스가 제법 민감한 대화 주제를 꺼내자, 조금 전까지 웃음 가득했던 리젠시 백작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떠올랐다.
이 자리에서 리젠시 백작은 솔티의 대표인 셈이었다.
그의 발언은 솔티 왕국 전체의 의견으로 비칠 수가 있는 만큼 최대한 말을 아끼는 편이 상책이라 볼 수 있었다.
리젠시 백작이 현명한 사람이라면 그리할 것이었다.
“글쎄요. 제겐 너무 어려운 주제 같습니다. 게다가 국제 관계처럼 중요한 사항에 제 생각 따위가 중요하겠습니까?”
리젠시 백작이 머리를 긁적이며 허허 웃었다. 능청스럽게 상황을 모면할 셈인 듯했다.
하지만 루시우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굳이 따로 시간을 내 가며 솔티의 리젠시 백작과 대면한 목적이 있었으니까.
“그러시군요. 그렇다면 제 생각을 말씀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부디 황자 전하의 고견을 듣고 싶군요.”
“저는 3년의 유학 기간은 허상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루시우스는 크리스털 포도주 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을 이었다.
“모두 바슈케르의 군주가 약속을 지킬 거라고 순진하게 믿고 있는 건 아닌지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부디 그게 솔티는 아니길 바라죠.”
루시우스는 차분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리젠시 백작의 반응을 관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루시우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리젠시 백작의 목울대가 일렁였다. 긴장한 듯 어깨도 뻣뻣하게 경직된 것 같았다.
리젠시 백작이 연신 포도주를 들이켜기 시작했다.
루시우스는 가늘어진 눈으로 그의 반응을 살피다 의문을 품었다.
‘라이나와 베니스탄의 대표들과는 조금 다른 반응이군.’
루시우스는 방금 리젠시 백작에게 물었던 것과 똑같은 질문을 그들에게도 던졌었다.
그리고 반응은 즉각 돌아왔다.
‘바슈케르의 황제 폐하께서는 약속을 어길 만한 분이 아닙니다. 비약이 조금 지나치신 것은 아닐지.’
루시우스의 말을 바로 부정하거나. 또는.
‘상상만으로도 매우 불쾌하군요! 설마 저희 왕녀님이 무사하지 못할 거란 말씀은 아니길 바랍니다.’
라면서 발작했다.
솔티의 왕이 바슈케르로 떠나보낸 왕녀를 무척이나 아낀다는 소문은 루시우스의 귀에까지 들어왔다.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이 되어서야 왕녀를 바슈케르로 보낼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왕녀의 안위를 거론하면 백작 또한 쉽게 흥분할 거라 예상했는데, 뜻밖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