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협상 결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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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협상 결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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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협상 결렬
2023.05.25.
밖으로 나온 르네브는 어둑해지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천천히 걸었다.
황제의 탄신일을 맞아 황궁 정원 이곳저곳엔 가로등이 세워져 있었다. 가로등에서 뿜어져 나오는 색색의 빛이 산책로를 은은하게 비춰 주고 있었다.
르네브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이카르와 나눈 대화를 복기했다.
‘전에 영애가 물었었지. 내게 약혼자가 있느냐고.’
그때 이카르는 전략적으로 걸맞은 상대를 아직 찾지 못해 혼자라고 대답했었다.
르네브는 그 말을 듣고 그가 왜 제게 황후가 되어 달란 제안을 왜 했는지 바로 알아챘다. 그건 자신이 이카르가 원하는 배경을 가졌다는 뜻이었다.
‘폐하께서도 알고 계시다시피, 저는 파라디움 사람입니다. 바슈케르에 어떠한 영향력도 가지고 있지 않아요.’
‘내가 바슈케르에서 영향력을 가진 황후를 원한다고 말했던가?’
그 한마디에 르네브의 시야가 확 트였다.
‘세이렌 후작 가가 필요하신 모양이군요.’
‘정확하게는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지만…….’
속눈썹을 내리깐 채로 이카르가 입을 다물었다.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예상은 했지만, 영애는 세이렌 후작에게 아무 말도 전해 듣지 못한 모양이군.’
‘……?’
‘한참 전에 내가 세이렌 후작에게 바슈케르로 망명을 권했었거든.’
그 순간 르네브의 눈이 크게 뜨였다.
‘대체 언제?’
세이렌 후작과 패트릭이 자신을 뒤쫓아 바슈케르에 왔을 때. 그때였나?
‘하…… 이걸 르네브 너한테 말해도 될지…….’
당시 패트릭은 의뭉스러운 말을 했었고, 세이렌 후작은 서둘러 패트릭의 말을 끊었다. 마치 르네브에게는 알리지 말라는 듯이.
무슨 얘기를 하려 했는지 조금 신경이 쓰였지만, 억지로 캐묻지는 않았다.
“……!”
이카르의 말을 듣고 지난 일을 떠올리던 중 불현듯 올라온 생각에 르네브는 숨을 헉, 들이켜며 입을 틀어막았다.
회귀 전 자신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이유! 그 이유가 적국과의 내통이었다.
르네브는 타국의 왕족 및 귀족들과 활발한 교류를 해 왔었다. 파라디움 제국을 위해서, 남편인 루시우스와 미래의 황제가 될 카엘을 위해서.
그 과정에서 결코 제국의 이익에 반할 만한 일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에게 부여되었던 죄목이 하루빨리 자신을 폐위시키고 에시카를 황후로 맞기 위한 루시우스의 계략이었을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이카르가 세이렌 후작 가에 망명을 권했었다니.’
르네브는 처음으로 회귀 전 적국과 내통했다는 자신의 죄목에 의문을 갖게 됐다.
루시우스와 결혼했으니 이미 르네브는 황가의 사람이었지만, 친정인 세이렌 후작 가와 엮어 죄를 묻는 것이 불가능하진 않았다.
‘이카르는 과거에도 패트릭에게 망명을 권했을까? 패트릭은 이카르의 제안을 수락했고?’
그러나 이제 와 그 일에 관해 물어볼 사람도 알아볼 방법도 없었다.
“후우…….”
르네브는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때, 누군가 르네브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아챘다.
“땅 꺼지겠군.”
이카르였다.
“폐하?”
“불러도 대답을 하지 않기에.”
이카르가 붙잡은 르네브의 손목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나름 이유가 있어서 허락 없이 손목을 붙잡았다는 뜻인 듯했다.
“실례했습니다. 폐하.”
생각에 몰두하느라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왜 또 혼자 나와 있지?”
벤치 헤드에 뒷머리를 기댄 채 르네브를 올려다보며 이카르가 물었다.
“산책을 좀 하고 싶어서요. 그러는 폐하야말로 왜 여기 나와 계신 거예요?”
“생각할 게 좀 있어서.”
“저도 그래요.”
“내 생각하고 있었다는 말을 돌려서 하는군.”
이카르가 얄궂게 웃었다. 속내를 들킨 것 같아 르네브는 이카르의 시선을 피해 버렸다.
긍정의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태도로 그렇다고 대답한 셈이었다.
이카르의 얼굴에 드리운 미소가 짙어졌다.
‘얄미워.’
르네브는 이카르를 찌릿 째려봤다.
사람을 고민에 들게 해 놓은 장본인이면서, 혼자만 여유로울 게 다 뭐람.
“내 예상보단 영애의 체력이 좋은 모양이야.”
“……?”
“그동안 내실에서만 생활했으니, 오늘 외출로 피곤한 나머지 지금쯤 곯아떨어졌을 줄 알았거든.”
이카르의 말대로였다.
오늘은 평소의 배 이상으로 활동한 셈이었고, 몸도 꽤 피곤했다.
하지만 생각이 너무 많은 나머지 쉽게 잠들 수 없을 것 같았다.
“잠깐 앉겠나?”
르네브가 바로 대답하지 않자, 채근하듯 이카르가 붙잡은 르네브의 손목을 살살 흔들었다.
“……폐하는 왜 여기 계신 거예요?”
“그냥, 생각할 게 많아서. 그건 그렇고 영애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해 보이는데.”
“어떤 분께서 제게 큰 고민거리를 떠안겨 주셨거든요.”
“호오? 어떤 분인지 정말 부럽군. 지금 영애의 머릿속은 그 어떤 분의 생각으로 꽉 찼을 테니.”
한쪽 입꼬리만 살짝 끌어올린 표정이 상당히 자신만만해 보였다.
그런데 또 그 모습이 잘생겼다.
금방 속이 뒤틀렸다. 얄미워서. 그런 이카르가 싫지 않아서 문제였다.
하지만 르네브는 또다시 황후가 되고 싶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타고나길 권력 지향적인 성향이 못 되었다.
회귀 전에는 루시우스의 바람을 이루어 주고 싶다는 집념 하나만으로 최선을 다해 내달렸을 뿐.
원작 내용을 알고 있었기에, 그 덕을 조금 본 것뿐이었다.
물론 가진 권력과 힘으로 짜릿함을 느껴 본 적 없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다시 또 황후가 되겠냐고 묻는다면, 한사코 사양이었다.
“황후가 되어 달라던 폐하의 제안, 거절하면 어떻게 되나요?”
이카르의 한쪽 눈썹이 비죽 솟았다.
르네브의 대답이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어째서? 자그마한 왕국의 왕비가 아니야. 무려 제국의 황후가 되는 거라고.”
그래서 싫은 거라고.
르네브는 목 끝까지 치밀어 오른 말을 꾹꾹 눌러 삼켰다.
확실히 거절한대도 이카르가 쉽게 받아들일 것 같지 않았다.
르네브는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어쩌지.’
이카르가 원하는 건 세이렌 후작 가의 전력이다.
하지만 세이렌 후작은 파라디움 황가에 충성을 맹세한 이상 망명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르네브가 제발 바슈케르로 망명해 달라고 울며 애원해도 듣지 않을 것이었다.
그녀가 이카르와 결혼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이카르 또한 그런 세이렌 후작의 성정을 파악했기에, 이런 제안을 한 것일 테고.
‘그렇다면…….’
르네브라는 사람 자체가 대단치 못하다는 걸 이카르에게 똑똑히 알려 주어야 했다.
황후가 되어 달라는 말이 쏙 들어가서 다시는 이카르의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르네브는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모든 귀족 영애들의 바람은 신분 높은 가문의 일원이 되는 것이겠지요.”
“의외로 잘 아는군. 그 모든 귀족 영애 중 딱 한 사람. 그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줄 알았거든.”
이카르의 비아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르네브는 차분하고 담담하게 말했다.
“제국의 황후 이상으로 높은 신분이란 이 세상에 없겠죠. 하지만 저는 높은 신분과 권력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습니다.”
이카르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의 신분에 충분히 만족한다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후작 영애 신분도 분에 넘치는 행운이라 생각해요.”
르네브는 옅은 미소를 머금고 말을 이었다.
“가장 중요한 건 제가 황후에 걸맞은 능력을 갖추질 못했다는 사실이에요.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저는 사교성도 많이 떨어지는 편이거든요.”
르네브는 조금 후련한 표정으로 이카르를 응시했다.
야망 따위 없다는 뜻을 내비쳤으니 이제 그만 이카르가 미련을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내 생각은 영애와 달라. 그리고 영애의 능력은 내가 보증하지.”
반박하고 싶었지만, 말문이 막혔다.
“영애 같은 사람이야말로 황후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라 생각하거든. 그리고 영애와 대화를 나눌수록 점점 더 확신이 드는군.”
기대와 다른 이카르의 반응에 르네브는 미간을 살짝 모았다.
그러나 곧 황후 시절 거울 앞에서 수도 없이 연습했던 대외적인 미소를 머금고 물었다.
“폐하, 제 의견을 존중해 주실 생각이 있으신가요?”
“물론이지.”
황소고집이라 생각했는데, 순순히 수긍하는 것을 보니 의외로 대화가 통할 것 같았다. 르네브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바다와 같이 마음이 넓은 제국의 황제 폐하께선 제 거절을 받아들여 주실 거라고…….”
“없어.”
이카르가 딱 잘라 말했다.
“그럴 생각 없다고.”
르네브는 살짝 고개를 돌리고는 한숨을 쉬지 않으려 애썼다.
역시 보통 고집이 아니었다.
‘협상 결렬.’
르네브는 다음을 기약하기로 마음먹으며 말했다.
“……해가 지면서 점점 기온이 내려가는 것 같네요. 저는 이만 돌아가 봐야겠어요.”
“추운가?”
몸이 식기는 했지만,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괜찮다고 말하려는데 이카르가 걸치고 있던 겉옷을 벗어 르네브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저…… 이제 돌아갈 거라 괜찮습니다.”
르네브는 이카르가 둘러 준 겉옷을 벗으려 했지만, 이카르가 빠르게 덧붙였다.
“영애가 감기에 걸리면, 내 기사도에 대단히 어긋나서 그럴 뿐이니 괘념치 말도록.”
“제 감기가 어째서 폐하의 기사도와 관련이 있는 걸까요?”
“오늘 영애가 나와 함께 외출했다는 건 드한과 베인도 알고 있어.”
“그렇겠죠.”
그들은 이카르의 최측근이니 그의 행적을 꿰고 있는 게 당연했다.
“영애를 감기에 걸리게 두었다면 그 둘이 내게 뭐라고 할 것 같나?”
르네브는 어느새 이카르의 이상한 논리에 휩쓸려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기사도가 부족하다고 하겠죠?”
레이디를 잘 챙기지 못했다는 비난을 들을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럼 가지. 귀빈실까지 바래다줄 테니.”
이카르가 손을 내밀었다.
르네브는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그러자 이카르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왜 이렇게 사람이 제멋대로야.’
마지못해 걸음을 옮기며 르네브는 과거를 되짚어 봤다.
‘언제부터이랬지?’
르네브는 거듭 생각했다.
그리고 몇 걸음 떼지 않아 곧 답을 찾았다.
‘언제부터긴, 처음부터지.’
그가 파라디움 황궁에 갑자기 쳐들어왔던 일과 세이렌 후작 저에 몰래 숨어들어 왔던 것을 떠올리자 납득이 되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달은 르네브의 미간에 생긴 골이 깊어졌다.
‘거절하기 쉽지 않겠는데…….’
르네브는 이카르를 에시카보다 더 위험한 인물로 분류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