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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첫 입맞춤 그리고 청혼 (54/148)


#54화 첫 입맞춤 그리고 청혼
2023.05.24.


“벤. 가서 상황을 보고 와.”

“예, 폐하.”

벤이 아이들 쪽으로 달려갔다.

어른인 벤이 나서서 중재한 덕분인지 아이들은 곧 손을 맞잡고, 빙긋 웃더니 다른 쪽으로 뛰어가 버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카르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어때 내 말이 틀렸나?”

“……폐하의 말씀이 맞았네요.”

르네브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싸우고도 언제 그랬냐는 듯 화해하는 아이들의 단순함이 참 부럽다는 생각을 하는데.

“……!”

갑자기 분명 과거에 있었던 상황이지만 그녀가 직접 겪은 적은 없는 한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단편적인 그 기억은 지금 눈앞에 보이는 풍경처럼 살얼음 낀 겨울 호수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머리에 노란 리본을 단 어린 여자아이를 보여 줬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이건 회귀 전 그녀의 기억이 아니었다. 소설 속에 빙의한 후 르네브에겐 또래 친구가 없었으니까.

빙의 시점이 트레이더 백작 영애 살인 미수 사건 이후였기에, 어른들은 제 아이가 르네브와 어울리는 걸 원치 않아 했다.

그래서 그녀는 늘 혼자였다. 유일한 소꿉친구가 루시우스일 정도로.

사고가 난 이후 트레이더 백작 영애와는 마주친 적이 없었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우연히 마주치긴 했지만.

그때 트레이더 백작 영애의 녹안에 담긴 혐오와 경멸. 르네브는 그 노골적인 시선을 읽었다.

‘조금 전 기억 속의 여자아이는 트레이더 백작 영애가 아니었을까?’

기억 속의 여자아이도 새싹처럼 푸릇한 눈으로 르네브를 쏘아봤다.

“…….”

급격히 어두워진 르네브의 표정을 보며 이카르가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영애……?”

르네브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떨어뜨렸다.

이카르가 제 넓은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왜 그러시는 거죠?”

“기대라고.”

르네브가 빤히 쳐다보기만 하자 그는 제 어깨에 그녀의 머리를 기대게 했다.

르네브는 이카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로 눈을 감았다.

따뜻하기보단 조금 뜨겁게 느껴지는 그의 열기가 전해졌다.

그래서 그런가?

어쩐지 안심되었다. 르네브는 들숨을 한 번 깊게 들이마시곤 감았던 눈을 떴다.

“잊고 있던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어요.”

“과거의 기억?”

이카르가 말해 보라는 듯 르네브를 쳐다봤다.

실제로 보지도 겪지도 않은 기억이 떠오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조금 혼란스러웠다.

‘이걸 이카르에게 어떻게 설명하면 좋지.’

한참 고민하던 르네브는 이카르를 힐끔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이카르가 무심한 듯 툭 내뱉었다.

“오래도 걸렸군. 그래, 이제 예전 기억에 관해 이야기해 줄 마음이 들었나?”

살짝 얄밉게 느껴지는 말투였으나, 르네브는 그게 싫지 않았다.

이카르는 르네브가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옆에서 기다려 주었다.

그건 분명 배려심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르네브는 옅은 미소를 머금고 이카르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주 어릴 적 일인 것 같은데, 지금껏 제가 잊고 지냈던 것 같아요.”

“좋지 않은 기억이었던 모양이군.”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좋지 않은 기억은 자동으로 잊게끔 되어 있거든. 방어 기제처럼.”

“폐하께선 그걸 어떻게 아세요?”

이카르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글쎄? 영애와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가 아닐까 싶은데.”

하긴.

납득이 되었다. 르네브는 루시우스가 일개 황자에서 황좌의 주인이 되는 과정을 곁에서 전부 지켜봤다. 르네브의 도움이 있었다고는 해도 그건 절대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이카르도 마찬가지겠지.

“……그러셨겠네요.”

“어떤 기억이었지?”

말투는 평소와 같았지만, 이카르의 목소리에 어딘지 다정함이 묻어났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부드럽게 대화를 시도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이카르답지 않은 배려가 고마우면서도 조금 간지럽게 느껴졌다.

“폐하, 오늘 정말 이상하세요.”

“말 돌리려는 거라면 내겐 통하지 않을 거란 것만 알아 둬.”

이카르가 가늘어진 눈을 하고 경고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그가 그녀를 위협할 마음이 전혀 없어 보였으니까.

평화롭고 안정감을 주는 분위기에 취해서 그런가. 회귀한 이후 잘 드러내지 않게 되었던 속내가 슬그머니 새어 나왔다.

“어릴 때 일인데요. 지금 보이는 것처럼 살얼음 낀 호숫가에서 제가 어느 여자아이를 떠밀어 버렸더라고요.”

이카르도 나를 경멸하겠지?

그럴 것이다.

반성하고 있느냐고 묻겠지?

자신이 한 일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이 몸이 한 일이었다. 이 몸을 빌려 쓰고 있는 이상 책임도 자신의 몫이었다.

르네브는 힘없이 웃으며 이카르를 쳐다봤다.

“잘했군.”

그런데 예상 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잘했다고요?”

르네브는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그래.”

그때의 사건으로 사람들은 르네브를 비난했다.

뒤에서 수군거리는 건 다반사였고, 일부러 들으라는 듯 등 뒤에서 그 일을 들추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잘했다니?

황당하다 못해 조금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폐하, 조금 전 제 이야기 제대로 들으신 거 맞나요?”

“하나도 빠짐없이 똑똑히 들었어.”

황후로 살며 르네브는 겉과 속이 다른 상대의 속마음을 파악하려 드는 습관이 생겼다.

좋게 보면 사람 관계에서 기민한 것이고, 달리 보자면 눈치를 많이 보게 된 거였다.

속내와 다른 말을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포착하기 어려울 정도로 찰나의 순간 상대의 눈을 피하곤 한다.

르네브는 이카르의 붉은 눈을 가만히 응시하며 물었다.

“왜 잘했다고 말씀하신 건지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영애가 그렇게 했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그의 대답은 간결했고, 눈빛은 진실되어 보였다. 르네브를 위로해 주기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하던 사람들과도 달랐다.

마치 진심으로 르네브를 믿기라도 하는 것처럼.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세요?”

르네브는 재차 물었다. 이카르는 귀찮은 내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처음이었다.

아무런 의심 없이 그녀를 전적으로 믿어 준 사람은. 그 순간 마음속에서 무언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조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르네브는 자리를 피하고자 몸을 일으키려 바닥을 짚었다.

“……?”

그런데 하필 땅을 짚는다는 게 이카르의 손을 짚고 말았다. 화들짝 놀라 서둘러 손을 떼려는데 르네브의 손가락 사이사이를 얽으며 이카르의 손이 파고들었다.

자연스럽게 르네브는 시선을 들었다.

곧 이카르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어딘지 진득했다.

“아…….”

이카르의 얼굴이 서서히 기울었다.

잠깐 당황했으나, 이카르가 제 얼굴에 붙은 속눈썹을 떼어 주려고 했던 때를 떠올렸다.

르네브는 나른하게 풀어진 이카르의 눈을 바라보다 입술을 벙긋거렸다.

“……혹시 제 얼굴에 뭔가 묻었나요?”

곧 이카르의 붉은 눈이 움직이더니 먹잇감을 찾은 듯 르네브의 입술에 닿았다.

점점 묘해지는 분위기에, 그녀는 그의 가슴팍을 짚고 그를 밀어내려 했다.

“조, 조금 떨어져서…….”

르네브의 작은 저항에도 개의치 않는 듯 이카르는 그녀의 자그마한 손을 꼭 쥐더니.

입술을 겹쳐 왔다.

허락을 구하는 듯한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

르네브가 거부하지 않자, 이카르가 조금 더 대담하게 입을 맞춰 왔다.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르네브의 심장이 빠르게 쿵쿵 뛰었다. 맞닿은 손으로 거세게 뛰는 이카르의 심장 박동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

한참 진한 입맞춤이 이어진 후에야 이카르가 입술을 떨어뜨렸다. 그의 붉은 눈엔 채 해갈되지 못한 열기가 가득했다.

르네브의 뺨을 그러쥔 채로 이카르가 말했다.

“바슈케르의 황후가 되어 볼 생각은 없나?”

“……!”

너무나 갑작스러웠기에, 르네브는 눈만 깜빡였다. 그녀의 입술을 엄지로 지분거리며 이카르가 다시 입을 뗐다.

“대답은?”

낮고 살짝 잠긴 목소리가 상당히 감미로웠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어 황후가 되어 달라는 제안까지, 르네브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

귀빈실 안으로 들어온 르네브는 문에 등을 기댄 채로 잠시 숨을 골랐다.

짧은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바슈케르의 황후가 되어 볼 생각은 없나?’

그 외에도 뜨겁던 이카르의 입맞춤이 떠올랐다.

얼굴로 열이 몰렸다. 손등으로 달아오른 뺨을 식히는데 키어넨이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레이디.”

“다녀왔어요.”

“겉옷 저 주세요.”

르네브는 외출용 겉옷을 벗어 키어넨에게 건네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외출은 어떠셨어요? 즐거우셨나요?”

“…….”

르네브는 바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 이카르와의 입맞춤을 반추하고 있었으니까.

“왜요? 밖에서 무슨 일 있으셨어요?”

대답 없는 르네브의 등 뒤로 키어넨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키어넨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르네브는 얼른 그 기억을 밀어냈다.

“꽤 즐거웠어요. 번화가의 활기찬 분위기도 좋았고, 호숫가의 경치도 아름다웠거든요.”

“즐거우셨다니 다행이네요. 폐하의 생신 선물은 어떻게 됐나요?”

“폐하와 함께 다니느라 조금 곤란했지만, 그래도 무사히 선물을 샀어요.”

“네? 폐하께서 동행하셨다고요?”

티 포트에 찻잎을 덜어 내던 키어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많이 놀랐는지 스푼에서 우수수 찻잎이 떨어져 내렸다.

“세상에! 이 귀한 찻잎을…….”

키어넨이 르네브 눈치를 보며 허둥거렸다. 파라디움에서도 그랬지만, 찻잎은 상당한 고가품이었다.

“괜찮아요. 그럴 수 있죠.”

르네브는 마른 수건으로 테이블 위를 빠르게 훔쳐 낸 뒤 말을 이었다.

“자, 이제 깔끔하게 정리됐어요.”

“……제가 해야 할 일인데 죄송해요. 레이디.”

키어넨이 제 머리를 세게 쥐어박으며 자학하기 시작했다. 르네브는 얼른 키어넨의 손목을 쥐고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고마워요. 키어넨.”

“네?”

“사실 그 차, 입에 조금 맞지 않았거든요.”

르네브가 약간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하자, 시무룩하게 내려갔던 키어넨의 눈꼬리가 힘을 되찾았다.

“그럼 저 잘한 건가요?”

르네브는 고개를 끄덕이며 키어넨의 어깨를 살짝 토닥였다.

“맞아요. 잘했어요.”

“그럼 다른 차로 준비할게요.”

키어넨이 진열장 앞으로 가 새로운 찻잎을 꺼냈다.

르네브는 소파 앞에 놓인 편안한 슬리퍼로 갈아 신으며 말했다.

“폐하께서 주기적으로 황궁 밖으로 시찰을 나가시나 봐요.”

조금 전의 일 때문인지 차를 내리는 키어넨의 동작이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그러셨구나. 그런데 선물을 사고 다른 곳에도 다녀오셨나 봐요?”

확실히 쇼핑만 했다기엔 귀가 시간이 다소 늦었다. 함께 나간 이카르와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었다.

르네브는 찻물로 입안을 축이며 말을 골랐다.

‘오늘 일을 그대로 말하기엔 좀 그런데…….’

때마침 앰버가 응접실로 들어왔다.

“다녀왔습니다. 아가씨!”

“어서 와.”

“어서 와요. 앰버.”

혼자서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고 싶던 차에 앰버의 귀가는 좋은 핑계가 되었다.

“키어넨, 앰버에게 차를 내줄래요?”

“물론이죠.”

르네브는 두 사람을 뒤로하고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산책을 하면서 생각을 정리할 요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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