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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검증된 방법 (50/148)


#50화 검증된 방법
2023.05.20.


아름다운 얼굴은 에시카의 자랑이었고, 그 자랑에 흠집을 낸 르네브를 가만히 둘 생각은 없었다.

‘선제공격이야말로 최고의 방어지.’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난 덕에 고생 한번 해 본 적 없는 르네브가 치욕과 모멸감에 떨 상상을 하자 금세 즐거워졌다.

“어디로 모실까요, 왕녀님?”

때마침 앞쪽에서 마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츠 후작 저로.”

“예, 출발하겠습니다.”

에시카를 태운 마차는 뒤렌부르크 후작 저를 빠져나와 잘츠 후작 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마차는 금세 철문을 지나 거대한 호화 저택 앞에서 멈춰 섰다.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 다음으로 에시카가 공략하려는 인물은 잘츠 후작이었다.

잘츠 후작은 훈훈한 외모를 지닌 젊은 청년으로 에시카에게 꾸준한 관심을 보여 왔다.

물론 그의 외모가 이카르에 범접할 수준은 못 되었지만, 입을 맞추는 정도는 가능할 것 같았다.

“어서 오십시오. 왕녀님.”

마차에서 내린 에시카에게 잘츠 후작 가의 집사와 고용인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그들의 인사가 처음에는 몹시 낯설었다.

하지만 여러 번 잘츠 후작 저를 방문해서 그런지 이젠 제법 익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이곳을 방문할 때마다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아 기분이 좋았다.

에시카는 그들을 향해 생긋 웃어 준 뒤 저택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왕녀님이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늘도 온 저택 안을 환히 밝힐 만큼이나 아름다우시군요.”

에시카의 손등에 살포시 입술을 붙였다 떼어낸 잘츠 후작이 건치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에시카를 향한 그의 시선이 상당히 진득했다.

하지만 에시카는 그의 마음 따위 모르는 척 순진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바쁜 후작님의 시간을 빼앗은 건 아닌지 걱정스럽네요.”

“전혀, 아닙니다.”

잘츠 후작이 고개까지 절레절레 저어 가며 말을 덧붙였다.

“아름다운 왕녀님과 함께할 수 있다면,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얼마든지 시간을 낼 수 있습니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마음이 놓이네요…….”

필살 눈웃음으로 무장한 에시카는 잘츠 후작의 팔을 살살 쓰다듬었다.

밀접한 신체 접촉이 효과가 있었는지 잘츠 후작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제 몸을 훑어 내리는 것 같은 잘츠 후작의 음흉한 눈빛에 조금 소름이 돋았지만, 에시카는 차분히 입을 뗐다.

“사실 황궁에 저를 괴롭히는 분이 있거든요. 그분 때문에 요즘 잠도 잘 안 오고 먹는 것도…….”

에시카는 말끝을 흐리며 처연하게 시선을 떨어뜨렸다.

입술을 벙긋거리며 할 말을 찾던 잘츠 후작이 이내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제대로 말씀해 보세요. 왕녀님께 도움을 드릴 수 있다면 저도 기쁠 겁니다.”

“역시 후작님과 대화를 나눠 보길 잘했네요…….”

에시카는 그렇게 한참 잘츠 후작에게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조잘거렸다. 가능한 자신이 유리한 쪽으로.

그리고 마침내 잘츠 후작의 입에서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런 문제라면 제가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에시카는 기쁜 속내를 감춘 채 가련하고도 예쁘게 미소 지었다.

***

르네브는 조금 이른 점심을 먹고 티타임을 가지려 했다.

그때 시종이 귀빈실로 찾아왔다.

“폐하께서 뵙자고 하셨습니다. 시간 괜찮으십니까?”

이카르가 왜 갑자기 자신을 보자고 했을까?

르네브는 잠시 시선을 떨어뜨렸다가 이내 대답했다.

“찾아뵙겠다고 전해 드리세요.”

“예.”

시종이 떠나고, 얼마 뒤 약속 시각에 맞춰 외출하려는 르네브에게 키어넨이 물었다.

“레이디. 그대로 나가실 건가요?”

르네브는 제 뺨을 살짝 쓸어내렸다.

“그럴 생각인데 왜요?”

뭐, 문제 있나?

“아가씨, 잠깐만요.”

앰버가 르네브의 손목을 잡고 콘솔로 이끌었다.

르네브는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봤다. 특별히 이상한 구석은 없었다.

하지만 키어넨과 앰버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레이디, 향유를 조금 바를게요.”

키어넨은 서랍에서 꺼낸 향유를 르네브의 머리끝에 바르기 시작했고, 앰버는 장신구 함을 들고 왔다.

“아가씨, 이건 어떠세요? 아니면 이거는요?”

“그저 폐하와 대화만 나눌 뿐인데 이럴 필요가 있을지…….”

키어넨이 바로 반박했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알현하시는 거잖아요. 그러니 그에 맞는 예를 충분히 갖추는 게 좋지 않을까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회귀 전 르네브는 루시우스를 만날 때마다 외모에 많은 공을 들였었다.

고작 함께 사는 남편을 만나러 가는 것뿐이었음에도.

“아가씨, 드레스도 갈아입으시는 건 어떠세요? 장신구들이 지금 입고 있는 드레스와는 별로 어울릴 것 같지 않아요.”

“그래요. 레이디.”

앰버와 키어넨이 르네브의 양팔을 쥐고 흔들어 댔다.

르네브는 결국 두 사람의 성화에 못 이겨 조금 더 화려한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그러고도 키어넨과 앰버는 르네브를 치장하는 데 한참 더 열을 올렸다.

외출하기도 전에 벌써 피곤해진 르네브는 조금 강경하게 말했다.

“이만하면 제국의 태양께 충분한 예를 갖춘 것 같네요.”

여러 켤레의 구두와 장신구들을 손에 들고 다가오던 두 사람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머쓱하게 웃는 앰버와 키어넨을 뒤로 하고 르네브는 몸을 돌렸다.

“다녀올게요.”

앰버와 키어넨의 배웅을 받으며 밖으로 나가자, 시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르네브는 시종과 함께 황궁 깊숙한 곳에 위치한 황제의 응접실로 향했다.

***

“폐하, 세이렌 후작 영애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드한의 목소리에 이카르는 서류에서 시선을 떼어 냈다.

그러고는 거울 앞으로 가 제 모습을 점검했다.

자연스럽게 쓸어 넘긴 머리칼은 흐트러진 부분 없이 정갈했고, 칼주름이 잡힌 제복 또한 단정해 보였다.

이카르는 거울 속에 비친 완벽한 황제를 무심히 바라본 뒤 몸을 돌렸다.

“폐하. 잠깐 시간 괜찮으십니까?”

집무실을 나서려는 이카르 앞을 베인이 막아섰다.

“뭐지?”

“여성들은 흐트러짐 없이 완벽한 것보다는 약간의 빈틈이 느껴지는 남성을 더욱 선호한다 들었습니다.”

베인의 허무맹랑한 말에 이카르의 한쪽 눈썹이 비죽 솟았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지.’

이카르는 그런 눈빛으로 베인을 빤히 쳐다봤다.

“제게 맡겨만 주십시오, 폐하!”

베인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이카르는 뭘 하려는 건지 보기나 하자는 심정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베인은 가장 먼저 목 끝까지 단정히 잠긴 이카르의 제복 단추를 풀었다.

이카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쳐다봤으나, 베인은 개의치 않고 제복 재킷을 아무렇게나 풀어헤쳤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베인이 이카르의 셔츠 단추에 손을 뻗었다. 이카르는 곧바로 베인의 팔목을 붙잡았다.

“베인, 지금 뭘 하려는 거지?”

“폐하, 걱정 마십시오. 이건 검증된 방법이니까요.”

베인이 베실베실 웃으며 이카르의 셔츠 단추를 풀었다.

그 얼굴이 꽤 꼴 보기 싫었기에, 이카르는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카르의 이마에 힘줄이 툭 불거졌다.

조금 전까지의 반듯하고 완벽한 황제는 없었다. 거울 속엔 침대에서 뒹굴다 막 일어난 것 같은 제 모습만 비칠 뿐.

이카르의 미간이 깊게 팼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조금 움찔하는가 싶던 베인이 호언장담했다.

“폐하께만 몰래 알려 드리죠. 제 형도 이렇게 해서 형수의 마음을 얻었다는 거 아닙니까.”

베인의 형 제프리 피셔 공작의 연애담은 바슈케르 제국 안에서도 제법 유명했다.

지금은 피셔 공작 부인이 된 애나는 소싯적 사교계에 처음 등장함과 동시에 사교계의 꽃이 되었다.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데다, 노래를 특히 잘 불렀고 다독가였다.

예쁘고, 똑똑하고, 예술적 능력까지 두루 갖춘 애나를 마다할 영식은 없었다.

그에 맞게 그녀는 콧대가 높고, 도도했다.

무도회에서 그녀에게 춤 신청을 했다가 거절당한 영식들이 한둘이 아니었을 정도로.

그런 그녀의 마음을 훔친 행운아가 바로 베인의 형 제프리 피셔 공작이었다.

“…….”

이카르는 착잡한 표정으로 복도를 걸었다.

어째서 자신이 르네브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아등바등해야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해할 수 없는 건 자신이 베인의 의견을 수용했다는 부분이었다.

이카르는 제복 재킷과 셔츠를 어느 백작 가의 망나니처럼 풀어헤친 채로 응접실로 향했다.

***

르네브가 응접실 앞에 도착했을 때 마침 이쪽으로 오던 이카르와 딱 마주쳤다. 르네브는 곧바로 이카르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좋은, 오후로군.”

이카르의 인사가 어딘지 어색했다.

르네브는 살짝 시선을 들어 이카르를 쳐다봤다.

그리고 조금 놀라고 말았다.

‘응?’

자연스럽게 르네브의 시선이 이카르의 길고 두꺼운 목과 탄탄한 가슴께에서 멎었다.

그의 의복이 상당히 단청치 못했다.

‘검술 훈련을 하다가 급하게 온 건가?’

하지만 그렇다기엔 이카르의 피부가 너무 보송보송했다.

훈련 직후 바로 온 거라면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을 리가 없다.

세이렌 후작 저의 연무장에서 패트릭과 세이렌 기사단이 훈련하던 것을 여러 차례 봤기에 잘 알았다.

여름이고 겨울이고 그들은 땀을 줄줄 흘려 댔었다.

“영애, 왜 그렇게 쳐다보지?”

이카르도 르네브의 의아한 시선을 느낀 모양이었다.

르네브는 복도를 쓱 둘러봤다. 다행히 응접실 앞 복도엔 황제의 기사들뿐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르네브는 난감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이다 물었다.

“저 폐하? 실례가 아니라면 제가 폐하의 의복을 조금 손봐 드려도 괜찮을까요?”

“……?”

이카르의 얼굴에 물음표가 떴다. 하지만 거절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가슴 근육의 압력에 못 이겨 셔츠 단추가 뜯겨 나간 건가?’

잠시 그런 생각을 했지만, 셔츠 단추는 모두 제자리에 있었다.

‘그럼 왜지?’

르네브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활짝 벌어진 셔츠를 단단히 여몄다.

그럼 다음 셔츠 단추를 모두 잠그고 재킷 단추 또한 목 끝까지 꼼꼼히 잠갔다.

“다 됐어요. 이제 빈틈 하나 없이 단정해졌어요.”

제복과 셔츠 모두 단정하게 잠긴 걸 확인하고 시선을 드는 찰나. 길고 두꺼운 목 사이로 툭 불거진 이카르의 목울대가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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