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이번엔 제대로 (49/148)


#49화 이번엔 제대로
2023.05.19.


샤반 남작의 안색이 잿빛으로 변하더니 이내 하얗게 질렸다.

귀족 작위 매매를 문책하기 위해 자신을 황궁으로 불러들였다고 지레짐작한 것 같았다.

“최근 황궁에 당신의 이름으로 두 종류의 선물이 들어왔더군. 황궁에 머무는 타국의 왕족과 귀족 앞으로 말이지.”

이카르의 냉철한 시선에 압도된 듯 샤반 남작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

“그런데 그 선물에 문제가 있더군.”

샤반 남작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가 마주한 이카르의 날카로운 눈빛에 다시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어째서 제게 그런 일에 관해 물으시는지 자, 잘 모르겠습니다.”

“……모른다?”

이카르의 잔뜩 낮아진 목소리가 응접실 안에 낮게 깔렸다.

오늘은 특히 날씨가 서늘한 편이었지만, 샤반 남자의 반들반들한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이런. 샤반 남작, 집무실 안이 조금 더운가 보군.”

이카르는 부러 조금 전보다 살짝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는 드한을 쳐다봤다.

드한이 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샤반 남작 이마의 땀을 살짝 훔쳐 냈다.

“배,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뭘요.”

드한이 별일 아니라는 듯 씨익 웃었고, 이카르는 샤반 남작에게 다가갔다.

닦아 낸 것이 무색하게 다시 샤반 남작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 다 있군. 그대 이름으로 보낸 선물을 그대가 모른다니.”

“…….”

이카르는 샤반 남작의 정면에 멈춰 섰다. 그리고 허리를 살짝 숙여 샤반 남작과 얼굴을 마주했다.

“그렇지 않은가? 샤반 남작.”

어지간히도 겁을 먹었는지 샤반 남작의 몸이 떨림이 심해졌다.

이가 딱딱 부딪힐 정도였다.

“다시 한번 묻지. 황궁에 머무는 귀빈들에게 선물을 보낸 적이 있나?”

“아, 아니요. 없습니다.”

“아니다? 증거가 이리 확실한데 무턱대고 잡아뗄 셈인가?”

“시, 신의 이름으로 맹세하관데 결코! 황궁에 문제가 될 만한 선물을 보낸 적은 없었습니다.”

이카르의 싸늘한 목소리에 샤반 남작의 갈색 눈동자가 마구 요동쳤다.

그런데도 샤반 남작은 일관되게 주장했다.

“그럼 마지막으로 묻지.”

“…….”

“작위 매매가 불법이라는 건 그대도 알고 있겠지?”

샤반 남작이 고개를 숙인 채 힘겹게 입을 뗐다.

“예, 예…….”

이카르는 베인을 쳐다봤다.

“알게 된 이상 작위 매매를 그냥 모른 척 넘겨서는 안 되겠지.”

동의한다는 듯 베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죄에 상응하는 적절한 처벌을 하겠습니다. 폐하.”

샤반 남작의 몸이 살짝 휘청였지만, 베인은 개의치 않고 그를 끌고 응접실을 나갔다.

“폐하, 마저 보고드리겠습니다.”

이어 응접실을 빠져나온 이카르의 뒤로 드한이 따라붙으며 말했다.

“누군가 샤반 남작의 이름으로 세이렌 후작 영애에게 먼저 과일 선물을 보낸 다음 솔티 왕녀에겐 사파이어 펜던트를 보낸 모양입니다.”

“…….”

“공교롭게도 두 번 모두 직접 황궁으로 선물을 보내는 방식이 아닌, 여러 사람을 거쳐 황궁으로 선물이 흘러 들어오게끔 조치했더군요.”

이는 추적을 어렵게 하기 위함일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는 건 애초에 르네브와 가짜 왕녀를 해할 의도로 선물을 보냈다고 봐도 무방했다.

“선물을 보낸 이는 찾았나?”

이카르의 물음에 드한의 얼굴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깃들었다.

“추적이 조금 어렵긴 했지만, 조사해 보니 세이렌 후작 영애에게 먼저 과일을 보낸 건 가짜 왕녀였습니다.”

이카르는 미간을 모은 채로 계속해 보란 듯이 드한을 쳐다봤다.

“그런데 솔티 왕녀에게 선물을 보낸 인물은 추적하기 조금 더 까다로웠으나, 세이렌 후작 영애로 드러났습니다.”

이카르의 눈이 조금 커졌다.

“세이렌 후작 영애가?”

“예.”

“이상한 일이군.”

이카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폐하.”

이전에도 이카르는 르네브와 가짜 왕녀의 관계에 의문을 품었다.

바로 조사에 착수했지만, 두 사람은 어떠한 접점도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서로를 향해 적의를 드러내는 건지.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폐하. 이 부분에 대해서 직접 세이렌 후작 영애와 대화를 나눠 보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웬일로 이카르와 드한의 생각이 일치했다.

간접적으로 알아낼 수 없다면 본인에게 직접 묻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으니.

“역시 세이렌 후작 영애를 만나 보는 수밖에 없겠군.”

“그럼 시종을 보내 일정을 잡아 보겠습니다.”

꾸벅 허리를 숙인 드한이 몸을 돌렸을 때 이카르가 입을 열었다.

“드한, 세이렌 후작 영애에게 선물로 들어온 과일이 뭐라고 했지?”

“뻬쉬라 했습니다. 폐하.”

파라디움과 달리 건조한 바슈케르에서 뻬쉬는 흔한 과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르네브의 몸을 해칠 수도 있다 생각하니, 꼴도 보기 싫어졌다.

“이제부터 뻬쉬를 황궁 반입 금지 식품으로 선정하지.”

잠깐이지만 양국의 평화를 위해 바슈케르에 머무르는 귀빈들의 희생을 모르지 않았다.

그런 만큼 바슈케르에 머무는 동안 귀빈들을 안전하게 보살필 생각이었다.

특히 자원해서 직접 바슈케르에 온 르네브라면 더더욱.

“예, 폐하.”

***

“오랜만에 뵙네요, 부인. 귀부인께 상의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 직접 찾아뵈었어요.”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꽃처럼 해사하게 미소 짓는 솔티 왕녀의 모습에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은 왜인지 모르게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왕녀가 제게 의지를 해 오는 게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기에, 미소를 머금었다.

“저와 상의하고 싶으시다니, 무슨 일인지 정말 궁금하네요.”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은 왕녀에게 자리를 권하며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몸 상태는 좀 어떠신가요, 왕녀님?”

왕녀를 응접실로 안내하기 전.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은 미리 집사를 통해 왕녀의 몸이 깨끗하다는 확인을 받아 둔 참이었다.

그 덕에 혹여나 병이 옮을까 두려워하지 않고 편히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보시다시피 아주 건강하답니다.”

왕녀는 목덜미가 훤히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마치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의 심리를 파악하기라도 한 듯이.

“떠도는 소문이 조금…… 그래서 왕녀님 걱정을 많이 했답니다. 이렇게 건강하신 모습을 보니 정말 다행이에요.”

“제 걱정을 하셨다니 너무 감사하네요. 그간 뵙지 못해 안부 인사도 하고 상의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왔답니다.”

솔티의 왕녀가 속눈썹을 내리깐 채로 덧붙였다.

“사실 제가 바슈케르에서 마음 터놓고 대화를 나눌 분은 귀부인뿐이더라고요.”

“어머나, 영광이에요. 왕녀님께서 그리 생각해 주셨다니. 속 시원히 말씀해 보세요. 제가 도와 드릴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도움을 드려야죠.”

“그렇다면 돌려 말하지 않을게요.”

왕녀의 미소가 짙어졌다.

순간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의 등줄기로 소름이 돋았다.

이유 모를 불안감이 들었지만, 겉으로 티 내지 않고 왕녀를 쳐다봤다.

“제 하녀 중에 처치가 딱한 아이가 있거든요.”

“어머나.”

“사실 뭐, 흔한 이유예요. 황궁에 들어오기 전에 빚이 좀 있던 모양인데.”

“빚이죠?”

“부모가 도박판에 드나드는 것 같더라고요…….”

왕녀가 말끝을 흐리며 살짝 시선을 떨어뜨렸다.

꽤 측은해 보이는 왕녀의 모습에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알다마다요. 그런 부모가 드물지 않게 있더라고요.”

“그래서 그 아이를 한동안 숨겨 두었으면 하는데 귀부인께서도 아시다시피, 황궁에는 보는 눈이 많지 않겠어요?”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은 왕녀의 말에 의문을 품었다.

빚쟁이나 하녀의 아비가 찾아올 것을 대비하기 위함이라면 황궁만큼 안전한 곳은 없었다.

문지기를 잘 포섭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황궁 출입 시에는 방명록을 남기게 되어 있었다.

빚에 쪼들리는 하녀의 아비가 과연 문지기에게 뇌물을 줄 여력이 있을까?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이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왕녀가 입을 열었다.

“홀로 바슈케르에 와서 적응을 못 하던 저를 많이 도와준 아이예요. 그래서 그런지 마음이 쓰이더라고요. 도와주고 싶고.”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은 여러모로 왕녀의 말에서 빈틈을 찾아냈다.

하지만 그녀는 한 부분에 집중했다.

가령, 한 번 제 사람이라 판단하면 어려울 때 손을 내밀어 주는 면모. 그게 비단 미천한 하녀라 할지라도.

이건 이미 왕녀에게 줄을 댄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에게 중요한 부분이었다.

“어머, 일개 하녀의 사정까지 그리 세심히 살피시다니.”

감동한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을 보며 왕녀가 수줍게 웃었다.

“이런 게 노블레스 오블리주 아니겠어요?”

조금 다른 의미였지만,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은 확증 편향에 빠졌다.

솔티의 왕녀가 황후가 되면 뒤렌부르크 후작 가에 어려운 상황이 찾아와도 거뜬히 난관을 헤치도록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는.

그런 근거 없는 기대로 순간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은 분별심을 잃었다.

“왕녀님의 말씀 잘 알아들었어요. 당분간 몸을 숨길 수 있을 만한 거처를 마련해 볼게요.”

왕녀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가능하면 황궁 안 누구도 하녀의 행방을 몰랐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그것도 가능할까요?”

빚쟁이가 뒤쫓을 것을 염려해서 그러나.

그냥 하녀의 빚을 대신 갚아 주는 건 어떻겠냐고 말하려던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은 말을 삼갔다.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의 친인척 중에도 도박에 빠져 어마어마한 빚에 시달린 사람이 있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도박을 끊지 못했고, 가족들은 온전히 그 빚을 갚아 나가야 했다.

가족의 연을 끊지 않는 한 도박 중독자와 분리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염려 놓으세요. 왕녀님. 제가 충분한 도움을 드릴 수 있을 테니까요.”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은 테이블 위에 올려진 왕녀의 손등에 제 손을 살며시 얹었다.

슬쩍 올라가는 왕녀의 입꼬리를 보지 못한 채.

***

뒤렌부르크 후작 저를 나서는 에시카의 눈매가 달처럼 둥글게 휘어졌다.

‘어느 정도는 설득할 시간이 필요할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일이 너무 쉽게 풀렸다.

콧노래를 부르며 마차에 오른 에시카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미간을 모았다.

가려움증은 한 달을 못가 사라졌지만, 그 흔적은 똑똑히 남았다.

화장으로 가릴 수 있는 정도였지만, 맨얼굴의 흉터를 볼 때마다 치가 떨렸다.

‘절대 용서 못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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