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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퀸만 잡으면 되는 게임 (48/148)


#48화 퀸만 잡으면 되는 게임
2023.05.18.


에시카는 깜짝 놀라며 잔뜩 찌푸려져 있던 인상을 풀었다.

가려움증이 고통스러워서 그런가?

나날이 신경이 예민해진다는 걸 에시카 스스로가 느낄 지경이었다.

그러나 곧 분노가 치솟았다.

“돌팔이 놈들! 돈만 많이 받아 처먹고 병은 고치지도 못하더니, 입까지 깃털처럼 가벼울 줄이야.”

정수리 끝까지 열이 몰렸지만, 에시카는 인내했다.

체온이 올라갈수록 가려운 증상이 심해진다는 걸 경험상 깨달은 탓이다.

심호흡하며 올라온 분노를 누그러뜨리려 노력하는데.

“왕녀님?”

문 너머에 선 하녀가 에시카의 눈치를 보며 입을 뗐다.

“뭐니?”

“그게. 저, 솔티에서 편지가 왔어요.”

“그래? 어서 줘 봐.”

에시카는 솔티 왕가의 문양이 음각된 실링 왁스를 뜯어냈다.

그러다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하녀의 시선을 느끼고는 말했다.

“그만 나가 보렴.”

“네. 왕녀님.”

하녀가 허리를 꾸벅 숙이고 침실을 나가자 에시카는 빠르게 내용물을 확인했다.

“……!”

빠르게 편지를 읽어 내리던 에시카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아드리아 왕녀가 지닌 솔티 왕가의 가보는 반지가 아니라, 귀걸이였다.

“……어떡하지?”

에시카는 르네브의 유도 신문에 보기 좋게 걸려들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그것도 모르고 반지라고 잡아떼 버렸으니…….

마른 입술을 핥던 에시카는 불현듯 든 생각에 미간을 모았다.

‘잠깐? 근데 어떻게 르네브가 솔티 왕가의 가보에 대해 알고 있는 거지?’

확실히 이상했다.

에시카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왕녀님. 얼음을 가져왔습니다.”

하녀의 방문과 동시에 생각의 흐름이 딱 끊겨 버렸다.

가려운 걸 해결하는 게 급했으므로 에시카는 더 생각하지 않고 얼음으로 환부를 문질렀다.

피부의 감각이 마비되자, 좀 살 것 같았다.

한참 몸 여기저기에 얼음을 굴리던 에시카의 시선 끝에 흰 장갑을 낀 하녀의 손이 들어왔다.

순간 에시카의 불쾌 치수가 확 치솟았다.

“너 설마. 정말로 내가 전염병에 걸렸다고 생각해서 그런 장갑을 끼고 있는 거니?”

“아, 아니에요! 왕녀님. 그런 게 아니에요…….”

하녀가 격하게 고개를 흔들며 부정했다.

에시카는 싸늘하게 말했다.

“그럼 벗어.”

하녀는 바로 장갑을 벗지 않고 입술만 달싹였다.

“직접 벗지 않겠다면 내가 벗겨 줄게.”

“와, 왕녀님!”

에시카는 억지로 하녀의 장갑을 벗겨 냈다.

하녀의 손이 울긋불긋했다.

“너, 손이 왜 이러니?”

에시카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묻자, 겁에 질린 듯 하녀가 뒷걸음질 쳤다.

“그, 그게…….”

묻는 말에 바로 대답하지 않는 하녀의 답답한 모습에 일순 분노가 올라왔다.

하지만 에시카는 꾹 억눌러 참으며 부드럽게 물었다.

“화내는 거 아니니 겁먹을 필요 없어. 언제부터 이랬던 거야?”

그제야 하녀가 울먹이며 대답했다.

“아, 아마 왕녀님께서 잘츠 후작 저에 다녀오신 날 저녁부터였을 거예요.”

“……그래? 소매를 걷어 보렴.”

천천히 소매를 걷어 올리자, 붉은 발진이 올라온 하녀의 팔이 드러났다.

하녀가 겁에 질린 채 물었다.

“와, 왕녀님. 소문처럼 저도 전염병에 걸린 걸까요?”

에시카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닐 거야. 함께 생활하는데 나와 너만 병에 걸린다는 건 이상하지 않니?”

두 사람에게 나타난 증세가 전염되는 질병이었다면 함께 머무는 또 다른 하녀도 옮았어야 했다.

하지만 오늘 아침 에시카의 목욕 시중을 들 때까지도 다른 하녀의 피부는 깨끗하기만 했다.

‘세 사람 중 두 사람은 피부 발진이 올라왔는데 한 공간에서 같이 지내는 한 사람만 괜찮은 이유가 뭐지?’

에시카는 온종일 그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골똘히 생각에 몰두하는 동안 잠깐이나마 가려움증을 잊을 수 있었다.

그리고 좀처럼 풀리지 않을 것 같던 의문은 뜻밖의 곳에서 단서를 얻었다.

“왕녀님께 들어온 선물이에요.”

하녀가 트롤리를 밀며 응접실로 들어왔다. 그 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던 에시카는 미간을 모았다.

귀족들에게서 들어오던 선물의 수가 확연히 줄어 있었다.

‘언제는 간이든 쓸개든 빼 줄 것처럼 굴더니.’

전염병에 걸렸다는 소문이 돌자마자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는 귀족들의 태도가 환멸스러웠다.

쯧, 혀를 차며 트롤리 앞으로 다가가던 에시카는 번뜩 든 생각에 눈을 크게 떴다.

“……!”

“왕녀님 왜 그러세요?”

“혹시 파라디움 귀빈의 몸 상태에 대해 떠도는 소문은 없었니?”

“예? 전해 듣지 못한 것 같은데……. 왜 그러세요, 왕녀님?”

하녀의 대답을 듣자마자 에시카의 잇새로 헛웃음이 비죽 튀어나왔다.

“하…….”

곧 실없이 웃기만 하는 에시카를 보며 하녀가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와, 왕녀님?”

“미친 거 아니거든?”

하녀를 힐끗 쏘아본 에시카는 웃음기를 싹 지우고 말했다.

“나에게 들어온 선물 목록을 정리해 오렴.”

진지하게 돌변한 에시카의 표정에 하녀도 안심한 듯 물었다.

“그동안 들어온 선물 전부 다요?”

고개를 끄덕이려던 에시카는 곧 생각을 바꿔 먹었다.

“아니. 잘츠 후작 저에 다녀온 날 전후의 것만.”

“예, 예……?”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하녀가 되물었지만, 에시카는 그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고 소리쳤다.

“지금 당장!”

“예, 예! 왕녀님.”

***

커다란 창으로 쏟아져 들어온 오후의 태양이 응접실 안을 환히 밝혔다.

르네브는 그 앞에서 혼자 체스를 두고 있었다.

한 수만 더 두면 퀸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체크 메이크.

르네브가 막 체스 말을 집어 들었을 때였다.

“아가씨! 아가씨!”

앰버가 헐레벌떡 응접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양모와 실크가 배합된 태피스트리를 짜고 있던 키어넨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에요?”

앰버가 가쁜 숨을 내쉬며 말했다.

“솔티의 왕녀님께서 전염병에 걸렸대요!”

“세상에, 전염병이요?”

키어넨이 불안한 듯 물었다. 제국 안에서도 가장 청결한 곳이 황궁이다.

그런 황궁에서 전염병이라니.

“전염병이라는 소문은 사실이 아닐 거야. 시일은 조금 걸리더라도 곧 낫겠지.”

르네브의 단정적인 말에 앰버와 키어넨의 얼굴에 의문이 깃들었다.

“……?”

“어째서 그렇게 확신하시는 거예요?”

황궁 안 구석구석을 다니며 정보를 모으는 앰버와 달리 르네브는 귀빈실에서만 지냈다.

그런 그녀가 이제 막 떠돌기 시작한 소문의 진위에 대해 단정적으로 말하는 게 이상할 만도 했다.

르네브는 반대편의 퀸을 잡은 다음 체커보드 위에 남은 말들을 전부 쓰러뜨렸다.

그리고 다시 체커보드 위에 체스 말을 하나하나 정렬하기 시작했다.

“레이디, 어째서 킹을 잡지 않고 새로 시작하시는 거예요?”

체스는 상대편 킹을 잡아야 이기는 게임이다. 그런데 퀸만 잡고 새 판을 시작하는 르네브가 의아한 것 같았다.

“지금은 퀸만 잡으면 되거든요.”

키어넨은 고개를 갸웃거렸고, 앰버는 르네브를 도와 체커보드 위에 체스 말을 새우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그나저나, 아가씨. 왕녀님의 전염병 말이에요……. 혹시 전에 아가씨께서 준비하신 물품들과 연관이 있나요?”

“그렇겠지.”

르네브는 반대쪽의 흰 체스 말들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그럼 왕녀님이 전염병에 걸린 이유가 아가씨의 선물 때문이라는 말씀이신가요?”

“……맞아.”

앰버와 키어넨이 헉, 숨을 들이켰다.

르네브는 이전에 키어넨과 앰버에게 각각 다른 심부름을 시켰다.

앰버에게는 피부에 닿으면 발진을 일으키는 나무 진액과 사파이어 펜던트를 사 오도록 했고, 키어넨에게는 샤반 남작의 이름으로 에시카에게 선물을 보내게 했다.

그래서 두 사람 다 은연중에 생각한 것 같았다. 그 선물이 솔티 왕녀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르네브는 체커보드 위를 응시하며 말했다.

“나는 정당방위를 했을 뿐이야.”

“정당방위요?”

“만약 괴한이 칼을 들고 덤빈다고 생각해 봐.”

“네? 네…….”

“그럼 이쪽에서도 칼로 대항해야 하는 거지. 그 이상의 무기로 제압하면 과잉 대응이 되지 않겠어?”

르네브는 반대편의 흰 체스 말 하나를 옮겼다.

그런 다음 제 앞에 놓은 검은 체스 말을 상응하는 자리에 두었다. 데칼코마니처럼.

“…….”

키어넨과 앰버는 가만히 르네브가 체스 두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러다 무언가 깨달았는지 앰버가 외쳤다.

“설마! 그럼 아가씨께 복숭아 선물을 보낸 사람이 솔티의 왕녀님이신 거예요? 샤반 남작님이 아니라?”

“응.”

르네브가 고개를 끄덕이자, 앰버와 키어넨이 분통을 터뜨렸다.

“세상에, 사람이 어쩜 그럴 수가 있죠?”

“정말 너무해요! 순진한 얼굴을 하시고는 뒤에서는 그런 일을 벌이다니!”

르네브에게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을 에시카가 미리 알았든 몰랐든, 이미 그런 건 두 사람의 안중에 없는 것 같았다.
르네브는 체커보드 위를 가만히 응시했다.

‘다음 수는 어떻게 두려나.’

자신이 그랬듯 에시카 또한 금세 샤반 남작의 이름으로 선물을 보낸 이가 누구인지 알아챌 것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에시카는 분노할 테고, 지금보다 더 과격한 방법을 사용해 반격할 가능성이 컸다.

원작의 르네브는 갑자기 등장해서 제 자리를 위협하는 에시카를 다양한 방법으로 괴롭혔다.

처음엔 사람들 앞에서 수치를 주는 정도에 그쳤으나, 매번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오히려 르네브 본인이 화를 입기 일쑤였지.’

이런 상황이 반복되자, 흑화한 르네브는 에시카를 제거하기로 마음먹는다.

조용히 에시카를 납치한 뒤에 노예상에 팔아 버리기로.

‘뭐, 그 계획도 성공을 목전에 두고 실패해 버렸지만.’

사실 원작의 에시카는 하급 귀족 영애로, 르네브와 대적할 상대가 전혀 아니었다.

‘그때야 에시카에게 기댈 곳이라고는 루시우스뿐이었지.’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비록 가짜라고는 하나 지금 에시카의 신분은 계급 사회의 정점인 왕녀였다.

***

“폐하. 최근 샤반 남작의 명의로 황궁에 선물이 들어온 건 총 두 건으로, 한 건은 가짜 왕녀에게, 다른 한 건은 세이렌 후작 영애에게 보내졌다고 합니다.”

그때 응접실 밖에서 다수의 구두 소리가 울렸다.

곧 문 두드리는 소리에 이어 베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샤반 남작을 데려왔습니다.”

드한이 응접실 문을 열자 베인의 옆에 중년의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는 이카르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처럼 흠칫 몸을 떨었다.

“그대가 샤반 남작인가?”

“그, 그렇습니다. 제국의 태양을 뵙게 되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이카르는 무감한 표정으로 샤반 남작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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