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주치의가 판단한 폐하의 병명 (42/148)


#42화 주치의가 판단한 폐하의 병명
2023.05.12.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감고 있던 이카르는 결국 움직이기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침실을 나왔다.

침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호위 기사들이 이카르의 손에 들린 검을 바라보고는 꾸벅 허리를 숙였다.

“폐하, 연무장에 가십니까?”

이카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기사들이 허리를 깊이 숙였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폐하.”

“수고하게.”

이카르는 성큼성큼 복도를 가로질렀다.

오랜 수면 장애를 해결하기 위해 이카르는 여러 가지 방법을 찾아 왔다.

그 결과 잠을 자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맞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정신을 너무 각성된 상태로 두지 말 것, 또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몸을 혹사할 것.

다행히 이카르가 찾아낸 방법은 효과적인 편이었지만, 그의 체력이 보통 사람 이상으로 좋다는 게 문제였다.

해서 웬만큼 몸을 움직이는 것으로는 잘 지치지 않았다.

특히 오늘처럼 머리가 쉬지 않고 생각을 거듭할 때는 더더욱 몸을 혹사시킬 필요가 있었다.

“하아, 하아…….”

한참이나 집중해서 검을 휘두르던 이카르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굵은 땀방울이 이카르의 남성적인 턱을 타고 뚝 떨어졌다.

결국 잠을 자지는 못했지만 몰두할 것이 있으니 잡생각을 잠깐이나마 떨쳐 낼 수 있어 좋았다.

어둡던 사위가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다. 아침 회의 전에 집무실에 들러 서류를 잠깐 보면 딱 좋을 시간이었다.

훈련을 끝낸 이카르는 걸음을 옮겼다.

연무장을 지나 황궁 복도로 접어드는 길목.

“……?”

이카르는 인기척을 느끼고 오감에 집중했다.

복도 구석에서 진한 입맞춤을 나누는 남녀를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이카르가 있는지도 모른 채 떨어지기 아쉽다는 듯 애틋하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황궁 내 연애 금지 조항 같은 건 따로 없었기에 이카르는 그대로 그곳을 지나쳤다.

그러나 몇 걸음 떼지 못하고 그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조금 전 지나쳤던 남녀의 모습 위로 벨케인 소공작과 르네브의 모습이 겹쳐졌다.

번뜩 스친 생각에 이카르의 미간이 깊게 팼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성은 말도 안 된다고 소리쳤지만, 오늘 하루 데이트를 즐겼을 두 사람의 행복한 얼굴이 떠올랐다.

순간 형언할 수 없는 분노와 함께 불쾌감이 올라왔다. 꽉 막힌 듯 가슴께도 답답해졌다.

“빌어먹을.”

작게 욕설을 뇌까린 이카르는 가슴께를 짚었다.

또다시 송곳처럼 작고 뾰족한 것이 가슴을 쿡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이 일었다.

‘웨버링 백작을 불러 재검진을 해 보는 편이 좋겠군.’

이카르의 걸음이 빨라졌다.

***

아침 댓바람부터 황궁에 불려온 멜리타의 눈 밑에는 푸르뎅뎅한 흔적이 여실히 남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보통 황제의 주치의는 황궁에 상주하며 황제를 보필하지만 멜리타는 다운타운에 있는 웨버링 백작 저에서 지냈다.

왜냐면 그녀가 보필해야 하는 황제 폐하께선 너무나도 건강하셨기 때문이다.

자가 치유력은 일반인의 몇 배는 되었고, 웬만한 상처는 가만히 둬도 금방 나았다.

심지어 멜리타가 주치의가 된 이후 몇 년 동안 이카르는 그 흔한 감기조차 걸린 적이 없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처음에는 가문의 일로 며칠 웨버링 백작 저에 머물다 황궁으로 돌아오려던 멜리타는 그대로 웨버링 백작 저에 눌러앉아 버렸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카르는 도통 멜리타를 부르지 않았다.

자신이 황제의 주치의 자리에서 진즉 잘린 게 아닐까 하고 의심할 즈음, 이카르의 부름을 받았다.

이카르가 크게 다친 건 아닌지 걱정하며 급하게 황궁에 걸음 한 멜리타가 마주한 사람은 겉보기에도 아주 건강한 세이렌 후작 영애였다.

그날 이후 두 번째로 이카르의 부름을 받은 게 바로 오늘이었다.

이카르의 몸을 꼼꼼히 살핀 멜리타는 피곤한 얼굴로 말했다.

“폐하께서는 라피스 라줄리도 씹어 드실 만큼…… 아니, 제가 실언했습니다. 폐하께서는 무척 건강하십니다.”

이카르의 생체 시계에 맞춰 황궁으로 불러들인 것이니 멜리타의 수면 부족은 당연했지만, 이카르는 알지 못했다.

“백작 그대를 신용해도 괜찮을지 조금 의심이 되는군.”

팔짱을 낀 채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이카르가 의심의 눈초리를 숨기지 않고 고스란히 드러냈다.

멜리타는 조용히 이를 사리물었다.

지금 자신을 돌팔이 취급할 셈인가!

“저는 폐하께서 직접 임명한 주치의입니다. 부디 저를 변방을 떠돌아다니는 돌팔이 취급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멜리타는 불쾌한 기색을 거두고 말했다. 그러나 이미 말속에 뼈가 있었다.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다고 말한다는 건 동시에 멜리타를 주치의로 거둔 이카르의 안목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무감한 얼굴로 가만히 멜리타를 응시하던 이카르가 고저 없는 음성으로 내뱉었다.

“역시나 백작을 해고하는 수밖에 없겠군.”

“네?”

테이블 위에 늘어놓은 진료 도구들을 가방에 주워 담던 멜리타는 이카르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병명은 고사하고, 흉통의 원인조차 모르는 황제의 주치의라니 하등 쓸모가 없지 않은가.”

“……!”

멜리타는 경악했다.

황제 이카르는 사람 보는 안목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숨겨진 인재를 잘 찾아내는 식으로.

그런 그에게 해고당하면 멜리타는 과연 어떻게 될까?

웨버링 백작가를 호시탐탐 노리는 방계 혈족은 물론이고, 그녀와의 결혼으로 웨버링 백작이 되려 하는 후안무치들의 사냥감으로 전락할 것이다.

“……제가 아니라, 바다 건너의 고명한 의원을 불러들인다 해도 폐하의 병은 고칠 수가 없을 거예요.”

멜리타는 당장이라도 이카르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허세를 부렸다.

정말로 무능하다고 판단하면 이카르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저를 내칠 것이니 이 진단에 근거를 보여 주면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물론 이카르는 능력이 부족한 전문가 또한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도 상기했다.

“……불치병이란 뜻인가?”

이카르가 반듯한 미간을 살짝 모으며 물었다. 목소리엔 고저가 없었으나, 표정이 조금 심란해 보였다.

멜리타는 빠르게 설명을 덧붙였다.

“폐하의 병명은 신체보다는 정신 계통일 가능성이 큽니다……. 아마도요.”

결국 덧붙이지 않아도 될 말까지 덧붙이고 말았다.

의사로서 백 퍼센트 확실하지 않은 정보를 환자에게 알리는 게 영 찜찜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게 주치의로서 백작이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답인가?”

이카르의 한쪽 눈썹이 기울였다.

그의 표정에서 멜리타를 향한 불신이 묻어났다.

몸에선 아무런 증상을 찾을 수 없으니, 의심해 볼 부분은 정신뿐인데.

그때 문득 한 장면이 멜리타의 뇌리를 스쳤다.

‘위급하니 어서 빨리 입궁하라는 황제 폐하의 명입니다.’

처음으로 주치의의 역할을 하러 황궁에 왔을 때 돌봤던 환자, 세이렌 후작 영애.

멜리타는 과거 동대륙의 명의 밑에서 수습 의사 생활을 했던 때의 기억을 더듬으며 이카르에게 몇 가지 질문을 다시 했다.

나타난 주요 증상은 집중력 저하와 식욕 부진 및 급성 기분 변화였다.

불면증의 경우 원래 가지고 있던 증상이 더욱 악화한 것이었다.

“……폐하, 상사병이라는 병명에 대해 들어보셨나요?”

멜리타가 조심스럽게 꺼낸 말에 이카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제국 경영 및 정치, 경제, 군사학에 정통한 이카르였지만, 의학은 그의 전문 분야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어느 정도의 의학 지식을 가지고 있던 그의 결론은.

“처음 듣는 병명이로군.”

“폐하. 상사병은 정신적 육체적 증상을 모두 호소할 수 있는 아주 무서운 질병 중 하나입니다.”

멜리타가 진지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금방 이카르의 미간이 깊어졌다.

이카르에겐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아직은 죽을 수 없었다.

“…….”

아주 잠깐의 절망을 끝낸 이카르는 이내 생각의 방향을 바꿨다.

계획한 많은 일 중 미해결 문제들을 최대한 빠르게 해결할 방법을 찾는 쪽으로.

“웨버링 백작. 본론만 했으면 좋겠군. 그래서 앞으로 살날이 얼마나 남았지?”

“……글쎄요.”

잠깐 고심하는가 싶던 멜리타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카르의 미간이 더욱 깊어졌다. 돌아온 대답이 영 실망스러웠다.

“웨버링 백작.”

“네, 폐하.”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어느새 험악해진 분위기를 기민하게 파악한 듯 멜리타가 진료 도구들을 커다란 가방에 쓸어 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카르는 고집스럽게 입을 꾹 다문 채로 멜리타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봤다.

“폐하의 남은 수명은…….”

출구를 향해 곁눈질하던 멜리타가 슬금슬금 문 쪽으로 뒷걸음질 치며 이어 말했다.

“세이렌 후작 영애에게 달려 있습니다.”

멜리타는 그렇게 알쏭달쏭한 의문만 남긴 채 급하게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급박한 상황에서도 이카르에게 꾸벅 허리를 숙이는 것만큼은 잊지 않았다.

제멋대로 응접실을 떠나 버린 웨버링 백작의 괘씸함에 이카르는 문 너머로 소리쳤다.

“드한!”

“예, 폐하! 부르셨습니까.”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드한이 냉큼 응접실로 들어왔다.

“새로운 주치의를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군.”

“그 말씀은 웨버링 백작을 해고하신다는 뜻입니까?”

“해고라…….”

이카르는 짧게 고민했다.

영토를 확장해 나가면서 이카르에게는 많은 인재가 필요해졌고, 바슈케르 제국에는 유능한 인물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던 중 제자를 두지 않기로 유명한 동대륙 명의 밑에서 여러 해 수학했다는 소문을 듣고 웨버링 백작을 주치의로 들였다.

웨버링 백작은 바슈케르 제국의 의학 발전에 도움이 될 인물로 적절해 보였다.

물론 한동안은 그녀의 능력을 직접 검증해 볼 기회가 없었다.

이카르의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으니까.

드디어 웨버링 백작의 진가를 직접 확인해 볼 수 있는 지금이 되어서야 이카르는 깨달았다.

그녀가 돌팔이였다는 사실을.

세이렌 후작 영애의 병은 물론이고, 자신의 병명조차 알지 못한 걸 보면 자신의 주치의는 돌팔이가 확실했다.

‘상사병이라니.’

사실 웨버링 백작 앞에서는 모른 척했지만, 동대륙에서 건너온 의학 서적에 해당 질병의 사례가 소개된 걸 본 적이 있었다.

저자는 얼빠진 젊은이들의 사랑과 광기에 대해 짧게 소개했었다.

‘웃기지도 않는군.’

이카르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은 허상과도 같았다. 손에 잡히지도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런 것 말이다.

여태껏 사랑을 받아 본 적도 줘 본 적도 없는 이카르로선 상당히 생소한 영역이기도 했다.

그는 현실을 부정하듯 고개를 저었다.

황제의 관은 무거웠고, 할 일은 너무 많았다.

언제 전쟁이 발발할지 모르는 이런 시기에 광기에 가까운 감정에 사로잡힐 시간적 여유 따윈 없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군.’

이건 오진이 분명했고, 웨버링 백작 또한 돌팔이가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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