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잠 못 이루는 이카르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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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잠 못 이루는 이카르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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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잠 못 이루는 이카르의 밤
2023.05.11.
벨케인 소공작의 과한 칭찬에도 르네브는 개의치 않고 벨벳 쿠션 위에 놓인 또 다른 물건을 가리켰다.
“이 카메오 브로치도 괜찮아 보이네요.”
벨케인 소공작은 르네브가 고른 물건마다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을 기세였다.
그렇다고 르네브가 아무거나 고른 건 아니었다.
르네브는 주로 바슈케르 제국 외에서는 구매하기 어려운 물건들만 권했다.
“이것도 좋군요.”
벨케인 소공작이 망설임 없이 대답하더니 상점 주인을 쳐다봤다.
“마노 펜던트와 카메오 브로치로군요. 포장해 드릴까요?”
“그래 주게.”
벨케인 소공작은 여상히 고개를 끄덕였고, 상점 주인은 기쁨의 미소를 머금고 진열된 물건을 선반에서 꺼내 계산대로 이동했다.
“펜던트와 브로치를 함께 포장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상점 주인의 물음에 잠시 망설이던 벨케인 소공작이 살짝 고개를 저었다.
“따로 포장해 주게.”
르네브는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떼고 진열된 물건 쪽을 바라봤다.
투명하고 노란 안달루사이트를 작은 토끼 모양으로 세공한 장식품이 시선을 붙잡았다.
이것도 낯익은 물건이었다.
‘카엘의 침실에 장식돼 있었지. 꽤 마음에 들어 했었는데…….’
그때 탁한 미성이 들려왔다.
“이것도 마음에 드십니까?”
벨케인 소공작이 곁에 다가와 있었다. 르네브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봤어요.”
때마침 양손에 상자 두 개를 든 상점 주인이 다가와 물었다.
“포장한 물품을 마차에 실어 드릴까요?”
“부탁하지.”
벨케인 소공작도 상점 주인도 만족스러운 쇼핑을 마치고, 마차로 돌아가는데 어느새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벌써 저녁 시간이군요. 이대로 황궁으로 돌아가면 시간이 늦을 것 같은데. 식사하고 돌아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선물을 같이 골라 준 것에 대한 답례를 하고 싶은 듯했다.
르네브가 괜찮다고 막 손사래를 치려는데 벨케인 소공작이 빠르게 덧붙였다.
“제게 귀한 시간을 내주셨으니, 꼭 그에 맞는 보답을 하고 싶습니다.”
르네브는 주변을 둘러봤다.
거리의 사람들은 바쁘게 제 갈 길을 향해 걸을 뿐 르네브와 벨케인 소공작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았다.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르네브는 왠지 모를 해방감을 느꼈다.
회귀 전 그녀는 어딜 가든 시선을 모았다.
그녀가 입은 드레스와 걸친 장신구는 모두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고, 그녀의 행동 말투 또한 귀족들의 입에 쉽게 오르내렸다.
에시카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하지만 지금 르네브는 아이와 남편을 둔 유부녀도, 한 제국의 황후도 아니었다.
바슈케르인들의 눈엔 그저 외국인일 뿐이었다.
‘식사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그편이 벨케인 소공작도 부채감을 털어 낼 수 있을 테고.
“좋아요.”
르네브의 긍정적인 대답에 벨케인 소공작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럼 가시죠. 마침 깜짝 놀랄 만큼 맛이 좋은 곳을 제가 알고 있습니다.”
***
“어서 오십시오.”
레스토랑의 지배인이 직접 나와 벨케인 소공작에게 깍듯하게 허리를 숙였다.
벨케인 소공작은 익숙한 듯 지배인과 안부를 조금 주고받았다.
르네브는 내부를 쓱 둘러봤다.
고급스러운 외관 못지않게 내부 또한 밝고 화려한 분위기였다.
“자리로 안내해 주겠나?”
살짝 미소를 머금은 채 벨케인 소공작이 지배인에게 금화 한 잎을 건넸다.
팁치고는 적지 않은 액수였다.
르네브는 바로 벨케인 소공작을 향한 지배인의 공손한 태도를 이해했다.
“그럼 편히 식사를 즐기실 만한 자리로 모시겠습니다.”
금화를 받아든 지배인이 빵끗 웃으며 둘을 개인실로 안내했다.
음식은 벨케인 소공작의 단언대로 정말 맛이 좋았다. 회귀 후 언제나 식욕이 없던 르네브의 입맛을 자극할 정도로.
만족스러운 저녁 식사 후 둘은 마차를 타고 황궁으로 돌아왔다.
벨케인 소공작은 르네브가 머무는 귀빈실 코앞까지 친절한 에스코트 또한 잊지 않았다.
르네브는 벨케인 소공작에게 가볍게 묵례하고 귀빈실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자 벨케인 소공작이 보석상에서 구입했던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영애께서 귀한 시간을 내주셨으니, 답례하고 싶습니다.”
“답례라면 식사 대접만으로 충분한 것 같은데요.”
“약소한 성의이니, 부디 거절하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르네브가 어떻게 거절할지 망설이는데 마침 이쪽으로 걸어오던 앰버가 말을 걸어왔다.
“아가씨, 지금 돌아오는 길이신가 봐요.”
르네브와 벨케인 소공작,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물건을 번갈아 쳐다보던 앰버가 입을 열었다.
“혹시, 저희 아가씨께 드리는 뇌물인가요?”
앰버가 조금 장난스럽게 물었고, 벨케인 소공작이 피식 웃으며 앰버의 손에 작은 상자를 들려 주었다.
“그런 셈이지.”
앰버가 벨케인 소공작에게 건네받은 작은 상자를 르네브 쪽으로 내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벨케인 소공작은 르네브에게 가볍게 묵례하고 몸을 돌렸다.
“그럼 저는 이만.”
르네브는 벨케인 소공작을 불러 세울까 하다 이내 그만두기로 했다.
여동생 선물을 함께 골라 준 것에 대한 답례치고는 조금 과한 감이 있었지만.
바슈케르 귀족들은 초대를 번번이 거절하는데도 종종 르네브에게 선물을 보내왔다.
너무 값비싼 선물이 아니라면 르네브도 사양하지 않고 그냥 받았다.
그만한 답례를 건네면 그만이니까.
바슈케르 황궁에 온 뒤로 처음 나갔던 외출에 좋은 기억이 남아서일까?
르네브는 다음번에 황궁 밖으로 나가게 되거든 벨케인 소공작에게 줄 선물을 고르기로 마음먹으며 몸을 돌렸다.
“앰버. 그만 들어가자.”
***
이카르는 크라바트를 느슨하게 풀며 집무실로 들어갔다.
조금 남은 서류만 처리하면 오늘 업무는 끝이었다.
집무실에서 서류를 보던 드한과 베인이 이카르를 보고 꾸벅 인사했다.
이카르는 두 사람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준 뒤 자리에 앉았다.
책상 위에 있는 서류를 집어 든 이카르는 활자를 읽어 내리려다 돌연 시선을 들었다.
“……!”
마침 이쪽을 보고 있던 두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드한과 베인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재빨리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뭐지?”
수상쩍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이카르가 물었다.
그러자 베인이 드한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 쳤고, 드한은 베인의 팔꿈치를 피해 몸을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이카르는 의자 등받이에 허리를 기대고 팔짱을 낀 채로 옥신각신하는 두 사람을 빤히 지켜봤다.
그 날카로운 시선에 먼저 입을 뗀 사람은 언제나처럼 드한이었다.
“아, 저…… 폐하?”
“말해.”
“폐하께서 외출하신 동안에 새로 올라온 보고가 있습니다.”
“뭔데.”
드한이 마른 입술을 핥으며 이카르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무슨 내용이기에 저리 몸을 사리는 건지.
이카르는 눈매를 가늘게 좁히고 어금니를 살짝 사리물었다.
이카르의 턱에 힘이 들어가자 베인이 눈치 빠르게 입을 열었다.
“폐하, 오, 오늘 말입니다. 세이렌 후작 영애께서 황궁 밖으로 외출을 하셨다고 합니다.”
“세이렌 영애가?”
이카르의 한쪽 눈썹이 기울었다.
하루가 멀다고 황궁 밖으로 외출을 나가는 다른 귀빈들과 달리 르네브는 여태껏 한 번도 황궁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무슨 이유로?”
“보석상에 가셨다가…….”
이카르는 르네브가 보석 같은 금은보화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오늘부로 그 생각을 재고했다.
“최근 귀족들 사이에서 인기인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돌아오신 모양입니다.”
이카르는 느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웨버링 백작의 권유대로 르네브가 최근 식사량을 늘리려 한다고 전해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렇지 않아도 참새 눈곱만큼 먹는 게 조금 염려가 되던 참이었다.
직접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레스토랑을 찾았다는 소리를 듣자 이카르의 입매가 살짝 휘어졌다.
이카르는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군.”
보고가 끝났다고 생각한 이카르는 다시 서류로 시선을 내리려 했다.
그런데 드한와 베인이 연신 서로 눈빛을 교환하는 걸 보니 뭔가 할 말이 더 남은 것 같았다.
“그 밖에 보고할 것이 있나?”
이카르는 서류에 시선을 둔 채로 일부러 무심하게 내뱉었다.
“……예?”
“보고하지 않은 사항이 있어 보이는군.”
“예, 뭐. 밖에서 수상한 자와 접촉하시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러니 특별히 수상한 점은 없었다고 할 수 있겠죠.”
베인이 실없이 웃으며 대답했지만, 이카르에게 이미 베인은 안중에 없었다.
‘혼자 나가서 바람이라도 쐬고 싶었나?’
제게 함께 외출하자고 제안했으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면 보석상 하나쯤 통째로 안겨 줬을 텐데.
‘……?’
이카르는 문득 제 생각에 의문을 품었다.
이카르의 미간이 모이자, 제대로 보고하지 않아 그의 심기가 불편해졌다고 착각한 드한이 화들짝 놀라며 급하게 입을 뗐다.
“그러니까…… 적어도 밖에서는 말입니다.”
처음에는 주에 한두 번 정도만 귀빈들의 동태에 관한 보고를 받았다.
어느 정도 귀빈들의 생활 패턴이 드러나고부터는 특별한 일이 없을 때는 보고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두었다.
세이렌 후작 영애의 외출은 흔치 않은 일에 속했으니 보고하는 게 옳았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서류로 시선을 내렸던 이카르는 곧바로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밖에서는 다른 누군가와의 접촉이 없었다?’
그렇다는 건 안에서는 누군가와 접촉을 했다는 뜻이 된다.
“잠깐.”
이카르는 굳은 얼굴로 드한과 베인을 쳐다봤다.
잠깐 사이 날카로워진 이카르의 시선에 드한의 목울대가 일렁였다.
베인은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 좌불안석이었다.
“안에서는 누군가와 접촉을 했다는 뜻으로 해석되는데.”
꿀꺽.
조용한 집무실 안에 드한과 베인의 침 삼키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내 말이 틀렸나?”
이후 이카르의 날카로운 추궁이 이어졌다.
“저, 폐하. 그것이…….”
***
은사자의 입속에서 콸콸 쏟아지는 온수가 뿌연 물거품을 뿜어냈다.
수십 명은 거뜬히 들어갈 정도로 넓은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던 이카르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물미역처럼 늘어진 결 좋은 검은 머리카락을 타고 흘러내린 물줄기가 근육으로 꽉 짜인 그의 상체를 타고 흘러 욕조의 물속으로 섞여 들었다.
간단히 물기를 닦아 낸 이카르는 침의를 걸치고 침대에 몸을 뉘었다.
다섯 명이 나란히 누워도 될 정도로 넓은 침대는 매우 푹신했고, 맨 살결에 감기는 시트는 실크처럼 보드라웠다.
황제의 침실은 온도 및 습도가 수면에 최적으로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오늘도 역시나 쉽게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