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평소와 다른 이카르 (38/148)


#38화 평소와 다른 이카르
2023.05.08.


비명?

벨케인 소공작은 잠시 조금 전 상황을 곱씹었다.

그러다 곧 세이렌 후작 영애가 은행잎을 벌레라고 착각한 상황을 거론한다는 걸 깨달았다.

“아…….”

“왜? 잘 생각해 보니 찔리는 구석이 있나 보지?”

이카르의 비아냥에 벨케인 소공작은 헛웃음을 뱉었다.

“저는 그저 영애 드레스에 붙은 은행잎을 떼 주려던 한 것뿐입니다.”

“은행잎?”

사실 확인을 요구하듯 이카르가 르네브를 쳐다봤다.

“뭔가 단단히 오해가 있었던 것만큼은 확실해 보이네요.”

안도 섞인 한숨을 내쉰 르네브가 잠시 어딘가로 시선을 던지더니 말했다.

“일단 자리를 옮겨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

‘사랑싸움인가.’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은 미간을 모았다. 여자 하나를 두고 남자끼리 다투는 것 같았다.

이로써 솔티 왕녀의 꼴이 아주 우습게 돼 버렸다.

자신을 비롯한 몇몇 귀족이 세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 중엔 자신처럼 솔티의 왕녀를 황제의 연인 아니, 나아가서 차기 황후로 보고 있었을 텐데.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은 힐끔 솔티 왕녀를 살폈다.

왕녀 또한 눈치챈 듯 표정 관리에 힘쓰는 모습이 퍽 안쓰러워 보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높이 자란 나무들에 가려 세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는 테이블은 한정적이었다.

‘계획을 변경해야겠는데…….’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은 입술을 삐죽이며 생각을 고쳐먹었다.

솔티의 왕녀와 가깝게 지낸다 해도 더는 제 가문에 보탬이 되지 못할 것 같았다.

황제의 마음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이 가벼울 것이라 미처 예상치 못한 탓이다.

‘……!’

그러다 번뜩 든 생각에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은 입술을 잘근거렸다.

이번 티 파티에 파라디움의 영애를 초대하지 말자고 왕녀를 종용한 것이 본인이었다.

‘이거 골치 아파졌어.’

황제가 변심하지 않고, 파라디움의 영애를 계속 만난다면?

그럼 파라디움의 영애가 차기 황후가 된다는 소리다.

‘차후에 티 파티에 초대하지 않은 일을 걸고넘어지기라도 하면…….’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의 표정이 파랗게 질렸을 때였다.

“바쁘신 와중에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솔티의 왕녀가 돌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초대객들을 향해 말했다.

세 남녀에게 잠시 시선을 빼앗겼던 귀족들도 왕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녀린 어깨 위로 살살 흔들리는 분홍 머리칼을 배배 꼬며 왕녀가 수줍게 미소 지었다.

왕녀의 사랑스러운 모습은 귀족들의 시선을 단단히 붙드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솔티에선 약소하지만, 찾아 준 손님들께 작은 선물을 하는 것이 예의랍니다.”

근처의 하녀에게 무어라 속삭인 왕녀가 테이블 위의 화병에서 꽃을 뽑아 들었다.

“참석해 주신 모든 분과 오늘을 오래 추억할 수 있도록…….”

지시를 받은 하녀가 왕녀에게 단검을 건넸다.

그녀는 손수 테이블 장식으로 사용된 분홍 리본을 끊어 금세 꽃다발을 만들었다.

“……이 자리에 있던 물건으로 말이죠.”

왕녀는 특유의 사랑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가까이에 있는 중년의 귀부인에게 방금 만들어 낸 꽃다발을 건넸다.

“어머나…… 예뻐라. 감사합니다, 왕녀님. 이게 얼마 만에 받아 보는 꽃다발인지 모르겠네요.”

귀부인이 옆에 앉은 남편을 힐끔 보고는 싱그러운 꽃 향을 음미했다.

“작은 성의일 뿐인데 귀부인께서 기뻐해 주시니 저도 기분이 좋아지네요.”

왕녀는 다음 테이블로 다가가 화병에서 뽑아 낸 꽃을 엮어 꽃다발을 만들었다.

티 파티에 참석한 귀족들은 왕녀의 행동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일반적인 꽃꽂이보다는 다소 과격한 동작들이었으나, 조금 따분해지려던 분위기가 왕녀의 기지 덕에 활기를 얻었다.

어찌 보면 괴상한 행동이었으나, 바슈케르 귀족들은 새로운 것, 신선한 것, 그리고 과감한 것에 열광하는 쪽이었다.

왕녀의 의도대로 티 파티에 참석한 귀족들은 오늘 일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 분명했다.

‘순발력만큼은 제법인데.’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은 왕녀를 그렇게 평가했다.

그리고 왕녀에게서 얼른 발을 빼려던 생각을 재고했다.

황제는 아직 파라디움의 영애를 자신의 연인이라 공표하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언제든 마음을 바꿀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하물며 약혼조차 하지 않았고.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은 솔티 왕녀를 이전처럼 만만하게 봐선 안 되겠다고 판단했다.

‘그나저나. 저쪽 상황은 어떻게 됐으려나.’

꽃다발을 받아 들고 기뻐하는 귀부인에게서 시선을 떼어 낸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은 힐끔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세 사람은 이미 그곳을 떠나고 없었다.

***

“멍이 들기 전에 상처를 식히는 게 좋겠어요.”

르네브는 찬 수건을 벨케인 소공작의 부어오른 뺨에 가져다 댔다.

벨케인 소공작이 미약한 신음을 뱉으며 눈매를 살짝 일그러뜨렸다.

“읏…….”

“아, 아파요?”

르네브는 입술을 말아 물고 어쩔 줄을 몰랐다.

“하…… 나.”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카르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뱉었다.

르네브는 뾰족한 시선으로 이카르를 쳐다봤다.

“폐하, 웃을 일이 아닌 것 같은데요.”

“유난은. 누가 보면 팔이라도 떨어져 나간 줄 알겠군.”

긴 다리를 꼬고 소파에 편안히 기대앉은 이카르를 보고 있자니, 르네브는 속이 뒤틀렸다.

죄 없는 사람을 때려 놓고, 저 태연함이 다 뭐란 말인가?

“대체 왜 그러셨던 거예요?”

빤히 르네브를 바라보던 이카르가 홱 고개를 돌렸다.

“…….”

그의 행동에 르네브는 더욱 기가 찼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최대한 차분하게 물었다.

“폐하께도 무슨 이유가 있으셨겠죠?”

있어야 한다. 그것도 정당한 이유가. 사실 대단한 이유가 있다고 해도 폭행은 안 된다.

과거 바슈케르는 황족이 아니더라도, 결투를 신청해서 이기면 황제가 될 수 있었다.

그 문화가 아직도 남아 있는 만큼 이카르는 현재 바슈케르의 최강자나 다름없었다.

그런 사람의 주먹을 제대로 맞았으니…….

벨케인 소공작의 결정에 따라 자칫 잘못하면 국제 문제로 번질 수도 있다.

이카르도 그걸 모르지 않을 터.

그러나 그는 너무나 태연했다.

“그냥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나 봅니다.”

벨케인 소공작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르네브는 미간을 모으고, 벨케인 소공작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의 넓은 어깨가 오늘따라 시무룩해 보였다.

주인 잃은 강아지 같은 모습에 르네브는 제가 다 미안해졌다.

자연히 이카르를 바라보는 르네브의 시선이 곱지 않아졌다.

르네브가 한마디 더 하려고 입을 떼려는데.

“전 괜찮습니다. 저 때문에 속상해하는 영애의 모습을 보는 게 더 괴롭습니다.”

테이블 위에 올려 둔 르네브의 손등을 벨케인 소공작의 커다란 손이 덮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접촉에 르네브는 조금 당황했다.

그러나 이 손 놓으라고 뿌리치기 전에 벨케인 소공작의 손이 담백하게 떨어져 나갔다.

“미혼 여성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다니, 귀공자가 다 얼어 죽었군.”

이카르가 말을 씹어뱉었다.

그의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물어뜯을 생고기를 눈앞에 둔 맹수 같았다.

르네브는 마른침을 삼켰다.

한동안 잊고 있었지만, 이카르는 확실히 위험했다.

“벨케인 소공작을 때린 이유를 말해 주지 않으실 거라면, 이만 자리를 파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르네브는 이카르에게 그만 이곳을 떠나 달라고 돌려 말했다.

사과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유조차 말할 생각이 없다면 무의미한 입씨름을 계속할 필요가 없었다.

르네브의 의도를 알아들었는지 이카르가 살짝 미간을 모았다.

“일전에 세이렌 후작 저에서.”

이카르가 답지 않게 작게 중얼거렸다.

“네?”

“그때와 같은 상황인 줄…….”

거기까지 말한 이카르가 돌연 벌떡 일어났다.

그는 벨케인 소공작을 흘끗 노려보는가 싶더니, 문 쪽으로 걸어갔다.

막 문을 나서기 전 이카르가 한마디 덧붙였다.

“이 일에 대한 보상은 철저히 하도록 하지.”

그러고는 응접실을 나가 버렸다.

너무 어이가 없는 나머지 르네브는 입을 살짝 벌린 채 멍하니 이카르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세이렌 후작 저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벨케인 소공작이 물었고, 르네브는 그제야 이카르가 왜 벨케인 소공작을 때렸는지 이해했다.

‘서, 설마……?’

***

응접실을 나선 이카르는 무표정한 얼굴로 황궁 복도를 걸었다.

긴 복도를 한참 걸으며 머리를 식히던 이카르는 손님방으로 쓰이는 빈 침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옷자락에 붙은 은행잎을 떼어 주려던 것뿐이었다?”

이카르는 폭군이었던 선대 황제들을 반면교사 삼아 왔다.

황제가 되어도 정당한 이유 없이 타인을 공격하거나, 피해 주지 않겠다고.

그리고 오늘, 자신과의 약속을 어겼다.

이카르는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대체…… 왜 그랬지?’

귀 끝에 열이 몰리는 게 선연했다.

확실히 저답지 않았다.

주먹부터 날리고 보다니.

벨케인 소공작이 강제로 르네브에게 키스하려 든다고 생각한 순간 이성을 잃었던 것 같다.

그리고 세이렌 후작 저에서 르네브에게 키스하던 파라디움의 황자를 떠올린 순간 가슴을 찌르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이카르는 통증이 올라온 쪽의 가슴을 한번 짚어 봤다.

“병이라도 걸린 건가?”

그렇지 않고선 자신의 행동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아픈가 보군.”

그래. 그러면 납득이 됐다.

이카르는 곧장 침실을 나와 다시 복도를 걸었다. 얼마 걷지 않아 시종과 마주쳤다.

“주치의를 불러오게.”

“예? 예, 폐하.”

시종은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꾸벅 허리를 숙이곤 멀어졌다.

이카르는 집무실로 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정신 질환 연구 시설을 하루빨리 구체화하기로.

***

‘세이렌 후작 저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르네브는 조금 전 벨케인 소공작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금세 얼굴로 열감이 올랐다.

‘이카르가 그걸 다 봤었네…….’

강제로 루시우스에게 키스당했던 순간을 이카르에게 보였다고 생각하자 기분이 조금 이상해졌다.

결코 자신은 이카르에게 부끄러울 만한 짓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에게 치부를 들킨 것 같은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레이디, 혹시 더우신가요?”

홧홧해진 뺨에 손부채질 하는 르네브를 보며 키어넨이 물었다.

별다른 핑곗거리가 없었기에 르네브는 키어넨의 말에 수긍했다.

“오늘 날이 조금 덥긴 하네요…….”

“그렇죠? 그럼 창문을 잠깐만 열어 둘게요.”

키어넨이 꽉 닫힌 창문을 살짝 열었다.

초저녁의 선선한 바람이 달아오른 르네브의 뺨을 금방 식혀 주었다.

르네브는 테이블에 턱을 괴고 창 너머를 응시했다.

하지만 노을 지는 저녁 하늘의 아름다움에 시선을 빼앗긴 건 잠깐이었다.

곧 벨케인 소공작에게 주먹을 날리던 이카르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재생되었다.

이카르는 굳이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아도 충분히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풍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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