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또 그 빌어먹을 노란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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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또 그 빌어먹을 노란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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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또 그 빌어먹을 노란 눈
2023.05.07.
“폐하? 왜 그러십니까?”
“명단에 세이렌 후작 영애가 빠져 있군.”
“예? 설마…….”
초대객 명단을 확인한 드한이 미간을 모았다.
“죄송합니다. 폐하. 철저히 확인하지 않은 제 불찰입니다.”
드한이 허리 굽혀 사죄했지만, 쯧, 혀를 찬 이카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가을 하늘은 높고 푸르렀고, 폐부로 들어오는 공기는 맑고 깨끗했다.
그럼에도 르네브는 활자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평소보다 점심을 조금 많이 먹어서 그런가.’
르네브는 읽던 페이지 사이에 책갈피를 끼워 넣고 작게 하품했다.
잠을 깨려면 산책을 조금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산책 후에는 커피도 마시고.
책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던 르네브는 그대로 굳었다.
“……!”
무심코 내린 시선 끝에 걸린 무언가.
생각한 그것이 아니길 바랐다.
하지만 어깨에 앉은 벌레의 노란 눈과 마주친 것은 르네브의 착각이 아니었다.
‘당황하지 말자, 당황하지 말자.’
르네브는 속으로 주문처럼 되뇌었다.
‘이런 일로 품격을 잃을 순 없어.’
잠깐 주변을 확인한 르네브는 제대로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몸을 뻣뻣하게 경직시켰다.
‘빨리 털어 내, 아무렇지 않게 털어 내는 거야.’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어깨 쪽으로 천천히 시선을 내린 순간이었다.
“영애?”
등 뒤에서 탁한 미성이 들려왔다.
곧 르네브의 시야로 벨케인 소공작이 들어왔다.
“……소공작님!”
“왜 그러십니까?”
르네브의 어정쩡한 자세를 보며 벨케인 소공작이 물었다.
“마침 딱 좋을 때 오셨어요. 혹시 벌레, 많이 싫어하시나요?”
“벌레 말입니까?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시는…… 아.”
고개를 갸웃하던 벨케인 소공작이 르네브의 어깨를 바라보며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제가 떼어 드리겠습니다.”
“그래 주시면 정말 감사할 것 같아요.”
르네브는 뻣뻣한 자세 그대로 벌레의 노란 눈을 애써 회피하듯 고개를 살짝 돌렸다.
벨케인 소공작이 다가오자, 르네브의 얼굴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럼 떼어 내겠습니다.”
벨케인 소공작이 르네브의 어깨로 손을 올리자, 미끄러지듯 벌레가 가슴 쪽으로 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또다시 르네브와 노란 눈이 마주쳤다. 르네브의 눈은 더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확장됐다.
르네브가 가까스로 참고 있던 비명을 내지르려는 순간.
“그럼 실례.”
툭.
벨케인 소공작이 드레스 자락의 벌레를 간단히 털어 냈다.
“괜찮으십니까?”
벨케인 소공작의 말투는 언제나처럼 정중했고, 부드러운 미소도 여전했다.
그러나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는 듯 그의 입매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르네브는 큼큼, 목을 긁으며 힐끔 제 몸을 살폈다.
다행히 잘 털어 낸 모양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냥 시원하게 웃으셔도, 괜찮아요.”
의연한 척하지만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것은 제 의지가 아니었다.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저도 예전엔 벌레를 무서워했거든요.”
자신을 배려해서 한 말인지 진심인지 확인하듯 르네브는 벨케인 소공작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그러자 벨케인 소공작의 귀가 살짝 붉어졌다.
“그건 그렇고. 외출하시는 겁니까?”
“뭐, 그렇죠.”
산책하려던 참이니, 외출은 외출이었기에 르네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와 함께 가시죠.”
벨케인 소공작이 미소 지으며 앞장섰다.
“그간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통 뵐 수 없어서 사실 조금 걱정했습니다.”
“귀빈실에 콕 박혀서 바슈케르에 대해 배웠어요. 어쨌든 유학 온 거니까요.”
르네브는 단기간에 지식을 축적할 방법으론 책만 한 게 없다고 믿는 쪽이었다.
“확실히 시간을 보내기에 적절한 방법 같군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벨케인 소공작이 말했다.
“소공작님께서는 그간 어떻게 지내셨나요?”
“저는 초대된 사교 모임을 쫓아다니느라 급급했습니다.”
벨케인 소공작이 뒷덜미를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떨어뜨렸다.
여기 있는 동안 바슈케르 유력 귀족들과 친분을 다져 두면 차후 본국으로 돌아가서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이다.
나아가서는 양국 간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다리 역할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대단하세요.”
르네브의 한마디에 벨케인 소공작의 푸른 눈이 커졌다.
“어떤 뜻으로 하시는 말씀이신지?”
“사실 소공작님과 왕녀님, 두 분 모두 자국에선 최고가는 권력자시죠. 뵙기 어려운 분들이기도 하고요.”
사실이었다.
두 사람 모두 자국이었다면, 이리저리 불려 다니지 않았을 것이다.
한마디로, 바슈케르의 귀족들도 두 사람도 자신의 처지를 잘 안다는 뜻이었다.
인질.
“그럼 영애께서 그간 사교 모임에 참석하지 않으셨던 이유가……?”
“아니에요. 파라디움 제국에 대한 자긍심 그런 거 없어요.”
르네브는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파라디움 황실에는 이미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어차피 가까운 미래에 루시우스는 황제가 될 거다.
뭐가 예쁘다고 루시우스를 위해 양국 간의 전령 새 역할을 나서서 한단 말인가.
“그저 최대한 파라디움보다 나은 점들을 배워서 돌아가려고요.”
그제야 벨케인 소공작이 의외라는 듯 말했다.
“저도 밖으로 그만 나돌고, 지식 쌓는 일에 조금 더 시간을 보내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
말을 뱉던 벨케인 소공작이 돌연 걸음을 멈췄다.
“잠시만요, 영애.”
그의 시선은 르네브의 쇄골 언저리에 닿아 있었다.
왜 갑자기?
무심코 그쪽으로 시선을 내린 르네브는 몸을 빳빳하게 경직시켰다.
노란 눈!
또 그 빌어먹을 노란 눈이다.
***
티 파티 초대객 명단에 르네브의 이름만 쏙 빠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카르는 서둘러 그녀의 거처로 걸음을 옮겼다.
“조금 전까지 이 앞에서 책을 읽고 계셨는데. 대체 어딜 가셨지…….”
뒤늦게 르네브의 부재를 깨달은 키어넨이 발을 동동 굴렀다.
‘초대받지 않은 티 파티에 간 건 아니겠지.’
설마 하면서도 이카르는 티 파티가 한창일 정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한참 빠르게 움직이던 이카르의 긴 두 다리가 딱 멈췄다.
저 멀리 누군가 서 있는 게 보였다.
뒷모습만으로도 르네브라는 걸 알아본 이카르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러나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벨케인 소공작과 함께였다.
그때 벨케인 소공작의 얼굴이 르네브 쪽으로 기울었다.
“꺅!”
순간 르네브가 작게 비명을 내질렀다.
동시에 이카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순간 세이렌 후작 저에서 파라디움의 황자가 강제로 르네브에게 입을 맞추던 때가 떠올랐다.
설마.
마음에 들진 않지만, 벨케인 소공작을 파렴치한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고, 벨케인 소공작 또한 이카르와 마찬가지로 혈기 왕성한 젊은 남자다.
일전에도 르네브에게 마음이 있는 것같이 보였고.
두 사람이 있는 쪽으로 빠르게 다가간 이카르는 반쯤 이성을 놓고, 벨케인 소공작에게 주먹부터 날렸다.
퍽!
청명한 가을바람을 가르고 날아간 이카르의 단단한 주먹이 벨케인 소공작의 얼굴에 정확하게 내리꽂혔다.
***
벨케인 소공작은 세이렌 후작 영애의 드레스에 붙은 노란 물체를 보고 눈매를 좁혔다.
“잠시만요, 영애.”
처음에는 벌레라고 생각했으나, 자세히 보니 은행잎이었다.
하지만 벨케인 소공작이 입을 열기 전에 세이렌 후작 영애가 작게 비명을 내질렀다.
“꺅!”
“괜찮습니다. 벌레가 아니라…….”
벨케인 소공작이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기척도 없이 갑자기 나타난 바슈케르 황제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윽!”
턱뼈가 바스러진 것 같다.
뇌가 흔들리는 둔탁한 통증에 벨케인 소공작은 이를 악물었다.
본능적으로 반격하기 위해 고개를 돌린 순간이었다.
양팔을 활짝 벌린 르네브가 황제와 자신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녀의 가녀린 양팔은 떨리고 있었지만, 두 다리는 올곧게 지면을 딛고 있었다.
“폐, 폐하! 갑자기 이게 무슨 무례한 짓이에요.”
“영애, 비켜.”
이카르가 낮게 경고했지만, 르네브 또한 지지 않고 되받아쳤다.
“모, 못 비켜요.”
무시무시한 시선으로 벨케인 소공작을 노려보던 이카르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러나 재차 공격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의 기세가 한층 누그러든 것을 느낀 듯 르네브가 몸을 돌렸다.
“소공작님 괜찮으세요? 어디 좀 봐요…….”
울상이 된 르네브가 벨케인 소공작의 얼굴을 살폈다.
그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자 벨케인 소공작은 난데없이 황제에게 얻어맞아 확 달아올랐던 분노가 차츰 사그라지는 걸 느꼈다.
자칫 외교 문제로 번질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황제에게 주먹을 날리려던 주제에.
르네브가 벨케인 소공작의 턱을 살짝 쥐고는 요리조리 돌려가며 상처를 살폈다.
“어, 어떡해! 벌써 뺨이 부었어요. 멍들 것 같은데.”
“흣, 아, 아픕니다.”
벨케인 소공작이 앓는 소리를 내자, 르네브의 눈썹 끝이 축 처졌다.
“어떡해요…….”
“엄살은.”
한심하다는 투로 이카르가 툭 내뱉었다.
르네브의 관심을 산 것으로 조금 누그러들었던 벨케인 소공작의 푸른 눈에 다시 불길이 일었다.
“폐하! 갑자기 사람을 두들겨 패는 법이 세상 어디에 있나요?”
이카르 쪽으로 몸을 홱 돌린 르네브가 앙칼지게 말했다.
“두들겨 패긴 누가 두들겨 패.”
이카르도 지지 않고, 으르렁거렸다.
벨케인 소공작은 얼얼한 뺨을 감싼 채로 눈을 질끈 감았다.
르네브가 자신을 감싸는 건 매우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친구에게 얻어맞고 엄마에게 고자질한 아들이 된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자신은 보호받아 마땅한 존재가 아니었다.
“두 분…… 그만하시죠.”
그제야 르네브가 곤란한 표정으로 벨케인 소공작을 돌아봤다.
벨케인 소공작은 한 발 앞으로 나서 르네브를 제 등 뒤에 가두듯 숨겼다.
그러곤 당당하게 말했다.
“대체 저를 왜 때리신 건지, 그 이유를 꼭 들어야겠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카르의 반듯한 이마에 힘줄이 툭 불거졌다.
“뭐?”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리 제국의 황제라 해도 아무 죄 없는 사람을 때릴 권리는 없습니다. 폭군이 아니고선.”
벨케인 소공작의 당당한 주장에 이카르가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아무 죄가 없다?”
“예. 그렇습니다.”
“그럼 조금 전 영애의 비명은 뭐였지?”
이카르가 험악한 표정으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