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황궁 티 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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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황궁 티 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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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황궁 티 파티
2023.05.06.
몇 주 전,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은 에시카에게 황궁 정원에서 티 파티를 열어 보라고 권했다.
이카르는 이전에 귀빈들에게 황궁에서 파티를 열어도 된다고 허락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모두 굳이 나서서 파티를 열지 않았다.
티 파티 준비를 직접 해 보고 나서야 에시카는 다른 귀빈들이 왜 파티를 열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더럽게 귀찮네.’
처음엔 그냥 귀족들 초대해서 차와 디저트만 대접하면 되는 줄 알았다.
어차피 음식을 만들고 나르는 모든 일은 황궁 고용인들의 몫이니, 자신은 그저 초대객들과 즐겁게 웃고 떠들기만 하면 된다고.
하지만 막상 겪어 보니 아니었다.
조금 과장하면 결혼식 준비하는 것 못지않게 품이 들었다.
초대객 선별부터, 당일 테이블에 올릴 차와 디저트, 다기와 장식용 꽃 등등 결정할 것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제 빙의 1년 차가 조금 못 되는 에시카에게 이 모든 일은 난관이었다.
왕녀 대리가 되기 전까지 지냈던 더글릭 자작 가는 시골 한적한 마을에 위치해 있었다.
그래서 티 파티 같은 걸 연 적이 없었다.
‘이카르한테 티 파티를 열어도 된다고 허락까지 받은 마당에 취소할 수도 없고.’
혼자 어찌 감당해야 할지 난감하던 차에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이 에시카를 돕겠다고 나선 것이다.
“왕녀님, 그럼 초대객 배정은 이대로 마무리할까요?”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의 물음에 에시카는 양피지를 오래도록 바라보다 입을 뗐다.
“그게 좋을 것 같네요.”
어차피 후작 부인의 권유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쉽게 보여서는 안 될 것 같아 에시카는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이 의견을 물을 때마다 최대한 고심하는 척을 했다.
“그럼 다음은…… 테이블과 주변에 장식할 꽃을 고를 차례겠네요.”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은 하녀에게 샘플 꽃을 가져오라 지시했다.
“저, 잠시 파우더 룸에 다녀올게요.”
솔티의 왕녀가 말했다.
“아, 그러시겠어요?”
“그럼 실례…….”
왕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황궁 쪽으로 몸을 돌리자마자, 줄곧 상냥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의 안색이 썩어 들어갔다.
‘아무리 솔티의 왕이 예뻐한다고 해도 그렇지…….’
가르칠 게 많아도 너무 많았다.
심지어 시험 삼아 앙숙인 갈트 백작과 젠킨스 백작을 한 테이블로 배정하는 게 어떻겠냐고 묻자.
한참 고심하는가 싶던 왕녀가 내놓은 대답은 이거였다.
‘그게 최선이겠네요.’
어이가 없었다.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은 다 식어 빠진 차로 속을 달랬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어찌할 줄 몰라 답답해하던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은 번뜩 든 생각에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아니지, 왕녀가 황후가 되었을 때 조종하기 쉽다는 뜻이잖아.’
그렇다면 오히려 이전보다 자신과 남편의 입지가 좋아질 것이다.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은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이후의 계획들을 짜기 시작했다.
한편, 에시카 또한 생각이 많았다.
어떻게 하면 편하고, 무사히 티 파티를 열 수 있을 것인가 하고.
최근 티 파티 일로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과 정원에만 틀어박혀 있어야 했던 탓에 답답했다.
에시카는 반걸음 뒤에서 따라오는 하녀를 힐끗 쳐다봤다.
“장식용 꽃을 고르고 나면 오늘 일정은 끝이니?”
“꽃을 구매할 상단을 결정하셔야 하고요. 그 상단과 꽃 구매 수량 및 가격 협상을 하셔야 하고…….”
하녀가 남은 일정을 줄줄 읊어 댔다.
에시카는 막막함에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아니지. 이건 윈윈이야.’
자신은 귀찮은 일을 떠맡아 줄 사람을 찾아 좋고,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은 티 파티 준비를 도와 자신에게 점수를 따서 좋고.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은 자신을 도운 후에 그에 합당한 보상을 요구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콧대 높다는 소문이 자자한 그녀가 나서서 시녀 노릇도 하는 것일 테고.
“아, 갑자기 어지럽네.”
이마를 감싸며 살짝 비틀거리는 에시카의 모습에 하녀가 화들짝 놀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왕녀님! 괜찮으세요?”
에시카는 힐끔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 쪽을 돌아봤다.
하녀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그녀가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에시카는 부러 조금 더 오금에 힘을 풀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운 에시카를 부축하며 하녀가 외쳤다.
“왕녀님! 왕녀님!”
“햇빛을 너무 오래 쬐어서 그런가.”
“오늘은 그만 안으로 들어가서 쉬시는 게 어떠세요? 이러다 왕녀님께서 쓰러지시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하녀가 난처해하며 발을 동동 굴렀고, 에시카는 몰래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응. 그게 좋겠다. 귀부인께 말 좀 전해 주고 오렴.”
“알겠습니다. 왕녀님.”
오늘 상단 3곳에서 방문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에시카는 귀찮은 잡무를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에게 떠맡기기로 했다.
무릇 자신보다 똑똑한 사람을 고용해 저 대신 일을 시키는 게 사장의 역할이다.
유능한 사람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이 유능한 사장의 덕목이고.
그런 면에서 자신은 제국 경영 또한 제법 잘할 것 같았다.
***
티 파티 당일.
잘 정돈된 황궁 정원에는 수십 개의 테이블이 열을 맞춰 자리하고 있었다.
백색 레이스 테이블보 위로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형형색색의 쿠키와 케이크, 과일 타르트들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다.
솔티 왕녀의 티 파티에 초대받은 귀부인들은 둥근 테이블 주위에 빙 둘러앉아 삼삼오오 대화를 나눴다.
“최근 돌고 있는 소문이 사실일까요?”
한 귀부인이 입을 열자 맞은편에 앉은 다른 귀부인이 목소리를 낮췄다.
“최근 폐하와 가깝게 지내는 귀빈이 있다는 그 소문 말인가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귀부인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그리고 곧 그녀들의 시선은 수십 개의 테이블 가장 중앙에 자리한 테이블 쪽으로 향했다.
연한 노란색의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은 솔티의 왕녀는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사랑스럽게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폐하께서 화원에 귀빈들을 불러들이신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네요.”
부채로 입가를 가린 채 한 귀부인이 말했고, 귀부인들은 저마다 생각에 빠져들었다.
누가 바슈케르의 차기 황후가 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이카르가 황위에 오른 후로 쭉 귀족들의 관심사였다.
그러나 황제는 그 흔한 스캔들 한 번 일으킨 적이 없었다.
웨버링 백작이 황제와 가깝게 지내는 듯 보여, 잠깐이나마 주목을 산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근거 없는 낭설이라 밝혀진 뒤로 그녀를 향한 귀족들의 관심은 빠르게 식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젊은 황제가 여자에게 관심이 없는 게 아니냐는 소문마저 돌았다.
미형의 젊은 영식이 황제에게 은근한 접촉을 시도했다가 호되게 당한 뒤로는 그 소문도 힘을 잃었지만.
그런 와중, 황궁 무도회에서 파라디움의 영애와 춤을 춘 일은 연일 화제에 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황궁 고용인들의 입을 통해 새로운 소문이 양산됐다.
황궁 정원에서 밀회를 나누는 황제와 솔티 왕녀의 목격담이 나돈 것이다.
그렇게 소문만 무성하다, 귀족들에게 황궁 티 파티 초대장이 도착했다.
초대인 이름은 솔티의 왕녀 아드리아였다.
보통의 귀족가에선 소규모 티 파티를 여는 것과 다르게 솔티의 왕녀는 통이 컸다.
그녀는 상당히 많은 유력 귀족들을 황궁으로 불러 모았다.
저택에 손님을 부르려면 가주의 허락은 필수였고, 황궁의 주인은 황제였다.
곧 떠돌던 소문에 힘이 실렸다.
인질로 끌려온 아름다운 왕녀와 잘생긴 젊은 황제의 로맨스라고.
“어머……. 저기 좀 보세요.”
한 귀부인이 덤불 숲으로 가려진 곳을 향해 손을 뻗었다.
“뭔데요?”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귀부인의 손가락 끝으로 향했다.
“……!”
그곳엔 황제 이카르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황제와 함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본 귀부인들은 벌어진 입을 가리고, 저마다 생각에 빠져들었다.
어느 쪽에 줄을 서야 가문에 보탬이 될지 그녀들은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분위기가 이상한데?’
잘츠 후작의 찰진 입담에 연신 웃음을 터뜨리던 에시카는 무언가 이상한 기류를 눈치채고 주변을 둘러봤다.
외곽 테이블 쪽에 자리한 귀부인 모두가 한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시카는 조용히 하녀에게 저쪽에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보라 지시했다.
“왕녀님…….”
금방 상황을 보고 온 하녀가 에시카에게 귀엣말을 전했다.
이카르가 티 파티에 참석해 주었다는 소식에 기뻐한 건 잠깐이었다.
이어진 하녀의 말에 에시카의 표정이 서서히 굳었다.
“……뭐?”
***
“오늘이라고 했던가?”
서류를 넘기며 이카르가 무심히 내뱉었다.
“예, 폐하. 티 파티에 가보실 겁니까?”
“내가 왜.”
드한에게 건네받은 서류에 빠르게 사인한 이카르는 다른 서류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간 황궁에서 이렇다 할 사교 모임이 없긴 했죠. 그 때문에 귀족들이 가짜 왕녀의 티 파티를 많이 기다린 모양입니다.”
이 부분은 이카르도 이해했다.
귀족들은 언제나 황족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가졌다.
이는 비단 황족의 발언이 자신들의 이득과 직결되어서만은 아니었다.
바슈케르인들은 강한 자에게 이끌렸고, 제일 강한 황족이 황위에 올랐다.
지금은 작위와 부가 어느 정도 힘을 대신하고 있지만, 완전히 바슈케르인의 습성을 지울 수는 없었다.
그런 이유로 바슈케르인들은 황제에게 경외심과 함께 환상을 품었다.
황후가 있었다면, 황궁에 귀족들을 초대해 그들의 욕구를 조금이나마 충족시켜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카르에겐 내실을 담당할 황후가 없었다.
그렇기에 직접 손님을 불러 대접하겠다고 나선 가짜 왕녀를 막을 필요 또한 없었다.
“빨리 황후를 들여라, 이 말이 하고 싶은가 보군?”
이카르가 서류에 시선을 둔 채 무뚝뚝하게 말했고, 드한이 과중한 업무로 뭉친 승모근을 주물렀다.
“아니, 뭐. 꼭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만…….”
“드한, 피곤한가?”
그제야 이카르가 시선만 들어 드한을 쳐다봤다.
그 시선 한 번에 드한이 바짝 경직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폐하.”
이카르는 다시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그는 사실 그 역할을 르네브가 해 주길 내심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바슈케르 귀족과 친분을 쌓으려는 다른 귀빈들과 달리 르네브는 지금까지 사교 모임에 일절 참석하지 않았다.
‘굳이 바슈케르 귀족들과 친분을 쌓아 둘 필요가 없어서겠지.’
르네브 본인이 귀족들과의 교류를 원치 않는다면, 이카르도 굳이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도 마음 한구석이 휑했다.
어차피 떠날 사람이란 걸 상기시켜 주는 것만 같아서.
갑자기 속이 답답해졌다.
이카르는 조금 전까지 바쁘게 놀리던 깃펜을 책상 위에 탁 내려놓았다.
“티 파티 상황은?”
이카르의 물음에 바짝 긴장한 목소리로 드한이 대답했다.
“예, 폐하! 초대 명단에 오른 모든 귀족이 참석하겠다는 답신을 보내왔고, 분위기도 제법 좋은 모양입니다.”
당연한 일이다.
비록 타국의 왕족 손을 빌린 티 파티이나, 황실 인장이 박힌 초대장을 받고도 불참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
“누가 오기로 했지?”
드한이 재빨리 초대객 명단을 이카르에게 건넸다.
초대객 명단을 빠르게 훑어 내리던 이카르의 입매가 비스듬히 비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