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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건강 검진 (33/148)


#33화 건강 검진
2023.05.03.


익숙하면서도 친근한 느낌이 든달까.

화원의 화려한 침대에 누울 때면 이따금 위화감을 느끼곤 했다.

이런 침대엔 좀 더 화려한 미인이 잠들어야 할 것 같아서.

“마음에 드십니까? 폐하께서 세이렌 후작 가에 직접 사람을 보내셔서 영애의 취향을 반영하게끔 하셨습니다.”

개인 맞춤일 줄은 몰랐다.

어찌 보면 평화 협정이 종료되는 날 바로 떠날 사람에게 과분한 친절이기도 하고.

‘그러고 보면 겉으론 아닌 척해도 은근히 자상한 구석이 있다니까.’

르네브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이카르가 낮게 경고했다.

“드한,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예, 폐하. 발언에 주의하겠습니다.”

“마음에 드나? 뭐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사실대로 말 못 하겠지만.”

이카르가 웬일로 바른말을 했다.

설령 귀빈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데도 이카르 앞에서 솔직히 말할 용기가 있는 귀빈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그럼에도 르네브는 이카르의 자조 섞인 말이 싫지는 않았다.

“정말 마음에 들어요. 세심하게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폐하.”

르네브가 싱긋 웃자, 언제 기가 죽었냐는 듯 드한이 당당하게 어깨를 폈다.

이카르의 시선 한 번에 곧 힘을 풀어 버렸지만.

르네브는 은근히 이카르에게 맞먹으려 들면서도 금세 꼬리를 내리는 드한과, 고압적인 것 같으면서도 드한에게는 무른 이카르의 케미에 조금 웃음이 났다.

르네브가 푸스스 웃음을 흘리자,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르네브의 얼굴로 내리꽂혔다.

“영애?”

“왜 그러십니까?”

“음, 안쪽을 좀 더 구경하고 싶은데 들어가 봐도 되죠?”

“물론입니다.”

르네브는 두 사람의 시선을 못 본 체하며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귀빈실 구경을 하고 화원으로 돌아가는 길에 르네브는 복도에 선 젊은 여자를 발견했다.

그녀는 커다란 가방을 들고 있었는데, 귀족이라기엔 다소 소박한 드레스 차림이었다.

그렇다고 황궁에서 일하는 고용인 같지는 않았다.

르네브의 시선을 느꼈는지 여자가 보고 있던 책에서 시선을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여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르네브를 쳐다보더니 이내 말을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저는 황제 폐하의 주치의인 멜리타라고 합니다. 폐하의 명으로 세이렌 후작 영애를 뵈러 왔는데, 혹시?”

빠르다.

분명 몇 분 전까지 이카르는 르네브와 함께 있었다.

그런데 대체 언제 주치의를 부른 걸까?

순간 귀빈실로 향하는 복도에서 이카르가 시종과 대화를 나누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였나.’

화원에서 귀빈실로 이동하는 동안은 르네브와 이카르 둘뿐이었으니까.

“반가워요, 멜리타 양. 찾으시는 사람이 저 맞아요.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할까요?”

르네브는 정중히 손짓하며 걸음을 옮겼다.

“예, 그러죠. 꽤 급한 환자라고 들었는데, 영애께선 상당히 건강해 보이시네요. 그래서 혹시나 했어요.”

“아, 그렇게 전해 들으셨군요.”

르네브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급한 환자라니.

응접실 문을 열자 키어넨과 앰버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다 곧 르네브를 발견한 두 사람이 몸을 돌렸다.

“레이디, 돌아오셨군요.”

“어서 오세요. 아가씨. 귀빈실 구경은 어떠셨어요?”

두 사람의 시선이 르네브의 뒤에 선 멜리타에게 향했다.

“이분은 황제 폐하의 주치의이신 멜리타 양이에요.”

앰버와 키어넨이 멜리타에게 꾸벅 인사했다.

그런데 무얼 생각한 건지 키어넨의 표정이 조금 묘했다.

“아가씨. 어디 아프신 거예요?”

앰버가 울상을 지으며 물었고, 르네브는 선의의 거짓말을 건넸다.

“그건 아니야. 폐하께서 귀빈들의 건강을 염려해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거든.”

“아…….”

그제야 앰버가 표정을 풀고 고개를 끄덕였다.

“멜리타 양께 차를 좀 준비해 줬으면 좋겠는데.”

“차라면 제가 준비해 올게요.”

키어넨이 재빨리 응접실을 빠져나갔고, 멀뚱히 선 앰버를 보며 멜리타가 말했다.

“차에 곁들일 디저트도 있었으면 좋겠네요. 황제 폐하의 전속 요리장이 직접 만든 걸로 부탁 좀 할게요.”

“네? 아, 네!”

앰버가 눈을 끔뻑이다 허둥지둥 문 쪽으로 걸어갔다.

“제 이름을 대면 금방 맛있는 디저트를 준비해 줄 거예요.”

멀어지는 앰버를 향해 멜리타가 소리쳤다.

“네!”

디저트라면 귀빈 담당 요리장에게 부탁해도 된다.

그런데 굳이 폐하의 전속 요리장이라니?

의아해하는 르네브의 시선이 멜리타에게로 향했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잠시 얼떨떨해하던 르네브는 앰버를 만류하려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앰버, 잠깐…….”

“잠깐만요. 영애.”

그러자 멜리타가 르네브를 붙잡았다.

“두 사람에게 아픈 걸 숨기고 싶었던 게 아니었나요?”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르네브가 가만히 쳐다보자 멜리타가 말을 이었다.

“영애의 귀여운 하녀를 놀리려는 게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멜리타가 커다란 가방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더니, 안에서 청진기 비슷한 것을 꺼냈다.

르네브는 조금 놀랐다.

지금으로부터 십 년쯤 뒤, 그러니까 회귀 전에도 파라디움에는 청진기가 없었다.

이건 의료조차 바슈케르가 파라디움을 한참 앞서 있다는 뜻이었다.

르네브의 의아한 시선을 느꼈는지 멜리타가 청진기를 들어 보였다.

“처음 보죠? 신문물이에요.”

“네? 뭐…….”

죽기 전까지는 이래저래 많이 봤던 물건이지만, 빙의 후에는 처음 보기는 했다.

“파라디움에도 이미 있나 보죠?”

르네브의 뜨뜻미지근한 반응에 의외라는 듯 멜리타가 눈을 크게 떴다.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늘 건강했던 터라.”

르네브는 모호하게 대답하고 멜리타의 앞에 앉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멜리타는 곧 대수롭지 않게 여긴 듯 르네브의 몸 상태에 관한 질문을 해 왔다.

그리 길지 않은 진료 끝에 내린 멜리타의 결론은 이랬다.

“영애는 매우 건강하세요. 좀 마르신 것 같긴 하지만……. 이전에도 같은 증세를 보인 적 있었나요?”

“한 번 있었어요.”

“언제였죠?”

“황궁 무도회 때였어요.”

멜리타가 그날 먹었던 음식 및 사용한 물건들에 대해 물었고, 르네브는 성심성의껏 대답했다.

“음…… 특별한 건 없어 보이네요.”

턱을 감아쥔 멜리타의 미간에 세 줄이 선명하게 그어졌다.

황궁 무도회 때라면 그럴 만도 했다.

그날은 드레스를 입었을 때 가늘어 보이도록 허리를 바짝 조였을 테니 호흡 곤란이 왔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르네브는 품이 넉넉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원인을 모르겠는지 멜리타의 침묵이 깊어졌다.

그때 키어넨이 차를 준비해 왔다.

검진 결과가 궁금한지 키어넨이 바로 떠나지 않고 근처를 배회했다.

키어넨을 힐끗 본 멜리타가 주섬주섬 꺼내 놓은 물건들을 가방에 주워 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애께선 매우 건강하세요. 그럼 오늘은 이만 돌아가도록 할게요.”

“네, 오늘 감사했어요. 멜리타 양.”

“뭘요. 아, 가능한 식사량을 조금 더 늘리시기를 권하고 싶네요.”

시원스럽게 입매를 끌어올린 멜리타가 몸을 돌렸다.

멜리타를 배웅하고 돌아서는 르네브에게 키어넨이 말했다.

“레이디께서 건강하시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처음 저분께서 오셨을 때만 해도 가슴이 철렁했다니까요. 어디 크게 아프신 건 아닌지 하고요.”

키어넨이 안도와 걱정이 뒤섞인 표정을 지었다. 르네브는 그녀를 부드럽게 다독였다.

“그저 귀빈들의 건강을 염려한 폐하의 배려일 뿐이니 걱정하지 말아요.”

“네. 그건 그렇고 레이디께서 웨버링 백작님과 친분이 있으신 줄은 미처 몰랐어요.”

소파로 걸어가던 르네브는 키어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멜리타 양이 웨버링 백작이라는 뜻인가요?”

르네브의 물음에 키어넨이 눈을 깜빡였다.

“레이디께서 백작님을 이름으로 부르시기에 아주 친밀한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요?”

어쩐지.

짧게 멜리타라고만 자기소개를 해서 처음 르네브는 그녀가 평민이라고 생각했다.

평민 중에는 성을 가지지 못한 경우도 종종 있으니까.

하지만 분명 멜리타에게선 귀족 특유의 분위기가 감돌았다.

먼저 꼿꼿하고 바른 자세, 어릴 적부터 교육을 철저히 받은 귀족들의 공통점이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예의를 차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제게 격의 없는 태도를 보였다.

멜리타가 귀족이라는 걸 알게 되자 그 모든 의문이 해소되었다.

“그럼 멜리타 양께서 웨버링 백작 가를 상속받은 건가요?”

“맞아요.”

“바슈케르에 멜리타 양 외에 작위를 승계받은 여성이 얼마나 더 있죠?”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몇 분 더 계실 거예요. 하지만 고위 귀족은 웨버링 백작님이 유일하세요.”

르네브가 흥미롭게 경청하는 태도를 보이자, 키어넨이 설명을 덧붙였다.

“몇 년 전쯤이었을 거예요. 선대 웨버링 백작님께서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는데 백작 가에는 멜리타 님 외에 정당한 후계자가 계시지 않았거든요.”

“…….”

“방계 혈족 모두가 웨버링 백작 가의 가주 자리를 탐내면서 한동안 시끄러웠어요. 그때 황제 폐하께서 멜리타 님을 웨버링 백작으로 인정하시면서 상황이 종료되었죠.”

“폐하께서요?”

멜리타의 등장에 르네브는 생각이 많아졌다.

보수의 끝인 이 시대에 의사라는 직업에 더불어 백작 신분을 가진 여성이라니.

“네. 그때의 인연으로 백작님께서 폐하의 주치의가 된 게 아닐까요?”

그때 앰버가 응접실 안으로 뛰어들어 왔다.

“하아, 제가 많이 늦었죠? 서두르긴 했는데…….”

앰버는 구겔호프가 담긴 금색 트레이를 들고 서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어? 멜리타 양께선 보이지 않으시네요?”

“아…….”

르네브는 낮게 탄식했다.

앰버에게 어려운 심부름을 시켜 놓고, 이미 응접실을 떠난 멜리타를 어쩌면 좋을까.

“급한 일이 생긴 모양이더라고, 우리끼리 맛있게 먹으면 되겠네요.”

르네브는 키어넨을 쳐다봤다.

“맞아요. 저희끼리 먹어요.”

눈치 빠른 키어넨이 맞장구쳤고, 트레이를 내려놓으며 앰버가 입맛을 다셨다.

“그럴까요?”

르네브의 접시에 구겔호프를 덜어 주며 앰버가 눈을 반짝였다.

말과 다르게 입이 하나 줄어들어 기쁜 듯 보였다.

“모양도 예쁘고, 냄새도 엄청 좋아요! 아가씨 얼른 드셔 보세요.”

르네브는 두 사람과 함께 구겔호프를 나눠 먹었다.

얼그레이 풍미가 은은히 감도는 것이 많이 달지 않고 입에 잘 맞았다.

“그러고 보니까, 아가씨께서 어릴 때 이걸 참 좋아하셨는데.”

“내가?”

“네, 기억 안 나세요?”

문득 그녀가 이 세계에 막 빙의했을 때가 떠올랐다. 당시 꼬꼬마였던 르네브의 몸에 빙의했기에, 처음에는 원작이 육아물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아니었지만.

빙의 전에도 그랬지만, 르네브는 과거의 기억을 잘 잊어버리는 편이었다.

최근엔 과거 일을 떠올리는 물건이나, 장소 등을 맞닥뜨릴 때마다 회귀 전의 일이 떠올라 곤란한 것과는 달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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