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키스하려는 줄 알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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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키스하려는 줄 알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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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키스하려는 줄 알았네
2023.05.02.
이카르는 르네브와의 약속 시각에 맞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이카르가 화원 앞에 도착하자 입구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연한 푸른빛에 과하지 않은 레이스가 달린 드레스 위로 길게 늘어뜨린 은발이 태양 빛을 머금고 반짝였다.
조금 전까지 무채색과 다름없던 이카르의 무심한 낯에 조금이나마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좋은 오후에요, 폐하.”
살짝 미소 지으며 르네브가 우아하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
르네브는 말없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이카르의 시선에 어쩐지 명치가 간지러워졌다.
“저, 폐하? 그럼 가실까요?”
“서두르지.”
잠시 넋이 나간 것처럼 굴던 이카르가 그제야 무감한 표정을 덧씌우고 걸음을 옮겼다.
반보 앞서 걷는 이카르를 따라잡기 위해 르네브는 부지런히 두 다리를 움직였다.
아직 복잡한 황궁 지리가 완전히 익지 않은 탓에 이카르를 놓치면 길을 잃을 수도 있었다.
회귀 전 황자비가 되어 파라디움 황궁으로 거처를 옮겼을 적에도 몇 개월간은 안내인 없이 혼자 다니지 못했다.
황궁 안은 지나치게 넓었고, 길도 워낙 복잡했으니까.
그리고 바슈케르 황궁에 비하면 파라디움 황궁은 약과였다는 걸 깨달았다.
파라디움 황궁이 미로라면, 바슈케르 황궁은 미궁이라 봐도 무방했다.
황궁 지리를 익히기 위해 틈나는 대로 이곳저곳을 쏘다녔음에도, 여전히 모르는 길이 많았다.
이카르를 놓치면 금방 미아가 될 게 분명했다.
그렇게 드넓은 복도를 부지런히 걷다 보니, 막다른 길이 나왔다.
‘황제라도 황궁 구석구석을 전부 다 아는 건 아닐 테니까.’
길을 잃을 만도 하다.
르네브는 웃음이 나려는 걸 가까스로 참으며 묵묵히 이카르의 뒤를 따라갔다.
제집에서 미아가 된 이카르가 민망하지 않도록.
황제가 주로 다니는 길과 잡일을 하는 사용인들의 주요 이동 경로는 달랐고, 자주 가지 않는 길이라면 헤맬 수도 있으니.
“저, 폐하…….”
이카르가 창피해하지 않게끔 말을 고르는데, 이카르가 돌연 걸음을 멈췄다.
드르륵.
“……?”
그가 벽에 손을 대자 묵직한 돌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막다른 길 왼쪽에 작은 통로가 생겨났다.
큼큼.
르네브는 터무니없는 착각으로 이카르를 가여워한 스스로가 부끄러워 헛기침했다.
그러자 앞서 걷던 이카르가 르네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할 말 있냐는 듯한 그의 시선에 르네브는 서둘러 입을 뗐다.
“그…… 유사시에 황족이 이용하는 비밀 통로 같은 건가요?”
“맞아. 잘 아는군.”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이카르가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카르가 제 생각을 눈치채지 못해 다행이라 생각하며 르네브도 걸음을 옮겼다.
얼마쯤 더 걷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황족 전용 비밀 통로란 무엇인가.
적군의 침입 혹은 암살자의 습격같이 위급한 상황에서 빠른 대처를 하기 위한 통로다.
그런데 외부인인 자신에게 이 길을 알려 줘도 괜찮은 걸까?
르네브는 그런 의문을 품으며 이카르의 뒤를 따라 걸었다.
길은 꽤 비좁았고, 내부는 다소 어두웠다.
르네브는 순간 단두대에 목이 떨어지기 전 잠깐 투옥되었던 지하 감옥과 이곳을 겹쳐 보았다.
음습하고, 큼큼한 악취가 풍기는…….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잘 안다.
잘 아는 데도 이 길 끝에 성난 군중들과 단상 위에 손발이 묶인 채 무릎 꿇은 패트릭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심장의 고동이 빨라졌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고,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가빠 왔다.
르네브가 벽을 붙잡고 거친 숨을 몰아쉴 때였다.
“영애?”
뒤따라오는 발소리가 사라진 걸 눈치챈 걸까?
이카르가 르네브 쪽으로 몸을 돌렸다.
르네브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했는지 그의 미간이 좁아졌다.
급기야 르네브가 바닥에 주저앉는 지경에 이르자 이카르가 한달음에 다가와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왜 그래? 어디 아픈가?”
“잠시, 만요…… 폐하.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금방 괜찮아질 거예요.”
르네브가 힘겹게 입꼬리를 끌어올리자, 이카르의 미간이 더욱 구겨졌다.
“하, 참.”
기가 차다는 듯 헛숨을 내쉰 이카르는 그녀를 끌어안더니 등을 어루만지고 토닥였다.
‘또 다.’
왜 이 커다란 손이 등을 쓸어내릴 때마다 안도감이 드는 건지.
르네브는 진정될 때까지 한동안 이카르의 품에 안겨 있었다.
차츰 르네브의 호흡이 고르게 돌아왔다.
“폐하. 등을 토닥이는 거예요, 아니면 때리는 거예요?”
“이제 좀 살 만한가 보군. 농담도 하고.”
안정된 르네브의 호흡을 확인한 이카르가 빈정거렸다.
그러나 말과 달리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조금 더 부드러워졌다.
“폐하, 이제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지난번에도 이번에도 그의 품에서 그녀는 안정을 되찾았다.
이카르가 맞닿은 상체를 살짝 떨어뜨리곤 르네브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자연히 르네브의 시선도 이카르의 붉은 눈에 고정됐다.
“…….”
그제야 르네브는 자신이 적막만이 감도는 좁은 공간 안에서 이카르의 품에 끌어안겨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상황을 깨닫자마자 얼굴에 피가 몰렸다.
목까지 붉어진 르네브와 달리 이카르의 얼굴은 평소처럼 태연했다.
세상사에 무심하고, 초연하면서도 오만해 보이는.
그러나 붉은 눈에 비치는 열망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둘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주변이 너무 조용했고, 침 삼키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길어지는 침묵 속에 이카르의 얼굴이 서서히 르네브 쪽으로 기울었다.
르네브의 얼굴 위로 이카르가 만든 그림자가 드리웠다.
숨결이 닿을 거리까지 이카르의 얼굴이 가까워진 순간.
르네브는 겨우 떨리는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폐, 폐하?”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이카르가 말했다.
“속눈썹 떨어졌군.”
“아…….”
르네브는 그제야 이카르의 행동이 이해가 갔다.
“떼도 되겠나?”
“아, 아뇨. 제가 할게요.”
“어디 붙어 있는지 알고?”
이카르가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나지막이 말했다.
“제가 할 수 있어요.”
르네브는 마구 얼굴 이곳저곳을 문질렀다.
르네브가 어디 붙어 있는지 모를 속눈썹을 떼려고 얼굴을 마구 털어 내는 모습을 지켜보며 이카르가 덧붙였다.
“고집은.”
“괜찮아요. 할 수 있어요.”
그 모습을 한심한 눈길로 바라보던 이카르가 후, 하고 입바람을 불었다.
“이제 떨어졌군.”
무심하게 툭 내뱉고는 이카르가 앞서 걸어갔다.
‘……키스하려는 줄 알았네.’
르네브는 이카르의 넓은 등을 바라보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데 이카르가 향하는 방향은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쪽이었다.
“폐하? 어디 가시는 거예요?”
“그만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군. 돌아가는 대로 주치의를 불러 주지.”
오늘 아침 일찍 화원에 방문한 드한의 말에 의하면, 최근 이카르는 제국 간의 무역 일로 상당히 바쁘다고 했었다.
그러면서도 귀빈실을 안내해 주겠다며 시간을 내라기에, 르네브도 처음에는 괜찮다고 사양했다.
굳이 바쁜 사람과 함께 이사 갈 곳을 둘러볼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드한은 한사코 폐하와 함께 가서 새로 공사가 필요한 곳은 없는지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랬는데 지금 돌아가면 이카르는 공연히 귀한 시간을 허비한 셈이다.
르네브는 종종걸음으로 이카르를 따라잡아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폐하!”
“뭐지?”
“저 정말 괜찮아요. 진찰은 이따가 따로 받을 테니, 일단은 함께 귀빈실로 가요.”
“이번이 두 번째야.”
“네?”
“호흡 곤란이 찾아온 것 말이야.”
르네브는 살짝 고개를 숙여 표정을 감췄다.
회귀 이후 처음으로 에시카를 대면한 날. 그날도 조금 전처럼 몸에 이상 반응이 나타났었다.
그 모습을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서 이카르가 전부 지켜봤고.
변명할 말이 없었다.
르네브는 따갑게 쏟아지는 이카르의 시선을 피해 입술만 깨물었다.
이카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영애, 내겐 그대의 안위가 중요해.”
“알아요.”
르네브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슈케르에 있는 동안 르네브에게 변고라도 생긴다면 양국 간의 평화 협정도 물 건너가는 셈이 된다.
제일 먼저 세이렌 후작 가에서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파라디움 황가 또한 자국민을 보호하지 못했다는 불명예를 피할 수 없을 거다.
황녀 대신 유학길에 오른 르네브의 희생을 익히 아는 귀족들의 신의도 잃게 될 것이다.
법적으로는 성인이라도 해도 그녀는 아직 어린 소녀에 불과하다.
그런 그녀가 연고도 없는 타국에서 곤란한 일을 겪은 사실이 알려진다면 제국민 또한 분개할 게 분명했다.
그러니 이카르가 이토록 신경을 쏟는 거겠지.
르네브는 현실을 직시했다.
괜찮은 줄 알았지만, 사실 자신은 아픈 게 맞았다.
신체적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 일이니,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치료를 받으면…….
“영애의 고집엔 못 당하겠군.”
그때 머리 위에서 한숨이 섞인 저음이 내려앉았다.
르네브는 눈을 크게 뜨고 이카르를 올려다봤다.
“그렇다면 이번엔 영애가 앞장서.”
이카르가 정면을 향해 고갯짓했다. 르네브가 쳐다보기만 하자 그가 이어 말했다.
“영애가 또 호흡 곤란을 일으켜 뒤처지면 곤란한 건 나라니까.”
르네브는 그제야 이카르의 말뜻을 알아듣고 앞장서 걸었다.
“네.”
꽤 긴 복도를 걷는 내내 르네브는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이카르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등 뒤에서 들려오는 구두 소리가 왜인지 르네브의 마음을 안심케 했다.
아무리 새벽이 어둡다 한들 결국 해는 뜬다고, 지하 감옥을 떠올리게 했던 비밀 통로에도 끝은 있었다.
밖으로 나오자 상쾌한 공기와 따스한 오후의 태양이 르네브를 비췄다.
“다음부터 영애는 비밀 통로 출입 금지야. 그렇게 알아 둬.”
르네브를 힐끗 쳐다보며 이카르가 차갑게 말했다.
“네. 폐하께서 하신 말씀 명심, 또 명심할게요.”
르네브가 거듭 고개를 끄덕이자, 이카르의 눈매가 한층 가늘어졌다.
“나 지금 진지한데.”
이카르가 미간을 모으며 엄히 말했고, 르네브는 더 대답하지 않고 살짝 눈을 굴리다 기사와 대화를 나누는 드한을 발견했다.
눈이 마주치자 드한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늦으셨습니다. 폐하.”
르네브에게 가볍게 묵례한 드한이 곤란한 표정으로 이카르를 재촉했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진실의 미간을 한 이카르를 본 드한이 냉큼 르네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럼 영애께서 사용하게 되실 귀빈실로 안내하겠습니다.”
“부탁할게요. 드한 경.”
르네브는 드한과 함께 귀빈실 쪽으로 걸음을 옮기다 이카르의 부재를 깨닫고 뒤를 돌았다.
그는 얼마쯤 떨어진 거리에 서서 시종에게 뭐라고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이번에 새로 지은 곳은 독채로 사용하실 수 있게 했습니다. 앞으로 영애께선 이곳을 사용하시면 됩니다.”
드한이 뿌듯함 담긴 목소리로 귀빈실 자랑을 늘어놓았다.
“확실히 자랑할 만하네요.”
르네브는 내부를 둘러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새로 지은 귀빈실 내부는 심플하면서도 세련미가 돋보였다. 화려함의 극치였던 화원과 달리 실용성을 중시한 듯했다.
그리고 르네브는 화원보다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