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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치열한 신경전 (31/148)


#31화 치열한 신경전
2023.05.01.


살롱에 모인 귀족들은 바슈케르 제국의 일들을 논하기 바빴다.

정치나 사업 이야기가 나올 때면 지루해서 하품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럴 때마다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이 가벼운 농담을 곁들여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가벼운 차와 다과를 즐기며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즈음, 에시카는 불쑥 의문을 품었다.

“화원에 계신 다른 귀빈들은 오늘 많이 바쁘셨던 모양이죠?”

황궁 무도회 이후 바슈케르 제국 귀족들은 앞다투어 화원의 귀빈들을 제 사교 모임에 초대했다.

듣자 하니, 레이첼 왕녀와 벨케인 소공작은 바슈케르 귀족들과 친목을 다지는 데 여념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오늘 살롱에 초대된 귀빈은 에시카 혼자인 걸까?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이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실 오늘 살롱에는 왕녀님만 초대했답니다.”

“왜죠?”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이 입가를 가린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며 작게 속삭였다.

“저희 살롱에 아무나 초대할 수는 없으니까요.”

잠시 그녀의 말뜻을 곱씹던 에시카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단속했다.

‘그러니까 지금, 화원의 다른 귀빈들은 뒤렌부르크 후작 가의 살롱에 초대하기엔 격이 떨어진다는 소리잖아?’

세이렌 후작 영애.

다이닝 룸에서 자신을 깔보던 그 보라색 눈을 떠올린 에시카는 미간을 살짝 모았다.

“혹, 왕녀님만 초대한 일로 마음이 상하신 건 아니겠죠?”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이 에시카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제 기분을 살피는 귀부인의 태도에 에시카의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뒤렌부르크는 바슈케르 내에서도 명망 높은 가문이었고, 후작 부인인 그녀는 현 사교계의 여왕벌이었다.

편히 사교계에 입문하려면 적절한 뒷배가 필요한데, 그런 면에서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은 제격이었다.

그녀와 친분을 쌓아 두면 에시카의 남은 인질 생활도 한결 편해질 터.

처음엔 그녀도 가짜 왕녀 신분이 들통날까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바슈케르엔 진짜 솔티 왕녀와 친분 있는 귀족이 없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뒤로 에시카는 걱정을 내려놓고 바슈케르 사교계에 녹아들 수 있었다.

“저야말로 귀부인의 초대를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답니다.”

신분이 낮은 쪽이 할 만한 아부성 발언이었으나, 에시카는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왕녀님께서 기뻐해 주셨다니 저야말로 영광이죠.”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은 왕녀가 살롱 안에 들어선 순간부터 그녀의 행동, 말투, 표정 등을 유심히 관찰했다.

바로 최근 왕녀를 둘러싼 소문 때문이었다.

왕녀와 황제가 함께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는 소문.

‘대체 그 냉혈한 황제를 어떻게 꼬셨을까.’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은 단지 솔티의 왕녀가 젊고 아름다워서 황제의 마음을 얻은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미모 면에선 파라디움의 영애 또한 부족하지 않았고, 그녀는 선 황후가 떠오를 정도로 기품이 넘쳐 났다.

여러 가문 영애들의 예법 교육을 맡아 본 바, 자신의 눈은 틀림이 없었다.

그리고 솔티의 왕녀에게선 어딘지 모를 위화감이 들었다.

예절에 있어 확연히 어긋난 부분은 없었지만, 두세 달 정도 바짝 예법 교육을 받은 것 같은 어딘가 어설픈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흠…….’

이내 솔티의 왕이 왕녀를 무척이나 귀애한다던 소문을 떠올렸다.

그 때문에 조금 발랄하고 천진한 것이겠지.

미소를 머금고 왕녀를 품평하던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은 시종에게 눈짓을 보냈다.

본격적으로 황제와의 사이를 알아내기 전에 왕녀의 경계를 늦출 필요가 있었다.

‘마음을 열기에는 이만한 게 없지.’

젊은 시종이 다가와 왕녀에게 포도주를 권했다.

“왕녀님처럼 귀한 분을 위해 아껴 둔 포도주랍니다.”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의 말에 왕녀의 얼굴에 미소가 돌았다.

“그럼 딱, 한 잔만 마셔 볼까요?”

한 잔만 마시겠다던 왕녀는 병을 통째로 비울 기세로 잔을 비워 냈다.

황실에 진상해도 부족하지 않을 고가의 포도주였으나, 뒤렌부크르 후작 부인은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왕녀가 바슈케르의 차기 황후가 되기만 하면 이 정도야.’

그녀를 제 편으로 만들 수 있다면 오히려 싸게 먹히는 셈이었다.

포도주를 한 잔 두 잔 홀짝거리던 왕녀의 뺨이 핑크빛으로 물들었을 때,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은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 미끼를 흔들었다.

“사실 황제 폐하께서 황궁 무도회 때 파트너와 춤을 추신 건 이번이 처음이었거든요.”

그 말을 꺼내자마자 왕녀의 눈빛이 변했다.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어 말했다.

“그 때문인지 황제 폐하께서 파라디움의 귀빈을 마음에 둔 게 아니냐고, 떠드는 사람도 있지 뭔가요.”

여전히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으나, 왕녀의 눈빛에 불편한 심기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은 한결 편안하게 속내를 털어놨다.

“하지만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파라디움의 귀빈은 미모, 신분, 심성 그 어느 것 하나 왕녀님만 못 하다 여겼거든요.”

“그러셨나요?”

에시카는 속살거리는 귀부인을 따뜻한 눈으로 굽어봤다.

‘하는 짓이 제법 귀엽네.’

이런 달콤한 음료수로 자신이 취할 거라고 생각한 건가.

에시카의 몸엔 조금 특별한 구석이 있었다.

빠르게 얼굴이 붉어져 언뜻 술에 약한 것처럼 보이나, 사실 취하지 않는다는 것.

해서 지금 에시카는 상당히 맨정신이었고, 귀부인의 수작에 넘어가 취한 척 연기 중이었다.

그래야 귀부인 또한 어렵지 않게 속내를 털어놓을 테니 말이다.

게다가 귀부인의 속살거림이 에시카의 기분을 즐겁게 만들었다.

“그럼요. 설마 제가 거짓말을 할까 봐서요?”

“물론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시겠죠.”

에시카는 부끄럽다는 듯 양 뺨을 감싸고는 수줍게 덧붙였다.

“귀부인께서 솔직하게 진심을 보여 주시니, 저도 조금 솔직해질까 하는데…….”

“……?”

“사실 서부 변경에서 건너오신 귀빈과 조금 마찰이 있었거든요.”

“어머나, 세상에! 그런 일이 있으셨나요?”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의 미소가 짙어졌다.

“어쩐지 왕녀님과는 대화가 잘 통할 것 같은 예감이 들더라니까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게 살짝 말씀해 주시겠어요?”

***

회의장을 나서는 이카르에게 드한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폐하, 솔티의 그…… 왕녀님께서 말입니다.”

드한의 입에서 솔티의 왕녀라는 말이 튀어나오자마자 이카르의 반듯한 미간에 실금이 드리웠다.

“황궁 정원에서 티 파티를 열어도 괜찮은지 폐하의 의견을 여쭤보셨습니다.”

망아지처럼 정신 사납게 제 주변을 맴돌던 여자를 떠올리자 이카르는 울컥 짜증이 치밀었다.

“가지가지 하는군.”

가짜 왕녀를 보내 바슈케르를 기만했다는 명분을 내세워 당장 솔티와 전쟁을 벌일 수도 있겠으나, 지금은 때가 좋지 않았다.

곧 바슈케르엔 건기가 도래한다.

우기에는 식량을 비축해 두고, 건기에는 그간 비축해 둔 식량을 소모하며 다음 우기를 기다려야 했다.

이카르가 주변 나라들과 3년간의 평화 협정을 맺은 데는 그런 이유가 컸다.

선황제 때까진 주변국과 교류가 적었기에, 바슈케르의 사정을 비밀에 부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부 국교를 개방한 지금은 바슈케르의 상황이 주변국에 알려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가짜 왕녀가 분란을 일으키지만 않는다면, 평화 협정이 끝날 때까지 내버려 둘 작정이었다.

물론 평화 협정이 종료되면 제일 먼저 솔티를 치겠지만.

“폐하, 왕녀님께 안 된다고 말씀드릴까요?”

드한이 조심스레 물었다.

묵묵히 앞만 보고 걷던 이카르가 무심히 내뱉었다.

“그러라고 해.”

다른 귀빈들에게도 황궁에서 티 파티나 무도회를 열어도 좋다고 말해 둔 참이었다.

솔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가짜 왕녀의 요청을 거절한다면 형평성에 어긋났다.

“예. 폐하.”

이카르가 집무실 가까이 다가서자, 문 앞에 있던 기사들이 허리를 꾸벅 숙인 뒤 문을 열었다.

서류를 보던 베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폐하, 귀빈실 공사가 끝났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드한, 오늘 일정이 어떻게 되지?”

이카르의 물음에 드한이 이후 일정을 줄줄이 읊었다.

“책상 위의 서류를 전부 확인하신 뒤에는 벤더펠트 공작과 오찬이 있으십니다. 그 뒤에는 프라벨 상단주 및 잘츠 후작과의 짧은…….”

이카르가 그만하라는 듯 손을 들어 올리자, 드한이 눈치 빠르게 일정을 정정했다.

“잘 조율하면 30분 정도는 비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카르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자 드한이 물었다.

“그럼 세이렌 후작 영애께 시간 괜찮으신지 여쭤보고 오겠습니다.”

“좋아.”

집무실을 나서는 드한에게서 시선을 떼어 낸 이카르는 책상에 앉아 서류를 보기 시작했다.

***

원래도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이카르의 업무 속도는 빨랐지만, 오늘은 빛의 속도에 가까웠다.

오찬 전에 르네브와 새로 지은 귀빈실을 둘러보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이카르가 책상 위의 수북한 서류를 처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책상에 고정되어 있던 드한과 베인의 고개가 들렸다.

“폐하, 지금 세이렌 후작 영애께 가시는 겁니까?”

재킷을 걸친 이카르가 두 사람을 돌아보며 당당하게 말했다.

“귀빈실 건축에 부실함은 없는지 미리 확인하는 것이 황제의 마땅한 도리겠지.”

이카르가 황위에 오르고 나서 황궁 안의 풍경은 많이 달라졌다.

쓸데없이 공간만 차지하던 선황제들의 동상들이 구석으로 내몰렸고, 대신 그 자리를 황궁 고용인들과 기사들의 편의 시설이 채웠다.

황궁 안에 다양한 연구 시설 또한 늘어났다.

실리를 추구하는 성격답게 제국 발전에 도움이 될 시설은 늘리고, 과거의 영광을 되새길 것들은 치워 버린 셈이다.

이 모든 게 드한과 베인의 눈에도 합리적으로 보였다.

다만 황궁 안의 옛것들을 치우고 그 자리를 대신할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설 때마다 이카르는 한결같은 반응을 보여 왔다.

건축 도면부터 자재 등을 세밀하게 살피긴 했으나, 완성된 공간을 직접 찾지 않았던 것이다.

그 근처를 지날 일이 있거든 들여다보기는 했지만, 완공과 동시에 직접 행차해 확인하는 건 귀빈실이 처음이라는 뜻이다.

여러모로 할 말 많은 표정을 짓고 있던 드한과 베인은 간신배처럼 고개를 수차례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폐하께서 직접 납시어 살피시면 귀빈실 공사를 담당했던 이들도 매우 자랑스러워할 겁니다.”

“맞습니다!”

이카르가 풀어 놓았던 셔츠의 목 단추를 채우며 고개를 끄덕이자, 베인이 따라나서려는 듯 몸을 일으켰다.

“혼자 다녀오지.”

베인은 앉지도, 그렇다고 일어서지도 않은 어정쩡한 자세로 대답했다.

“예! 폐하. 다녀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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