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에시카의 도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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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에시카의 도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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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에시카의 도발
2023.04.28.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과 친분을 쌓게 되면, 벤더펠트 공작 부인과는 척을 지는 셈이지.’
르네브는 벤더펠트 공작 부인의 초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현재 바슈케르의 사교계에선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의 입김이 셌다.
하지만 과거와 같은 흐름이 이어진다면, 그녀의 가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실각한다. 수년간의 탈세를 이카르가 곧 문제 삼을 테니까.
그리고 누군가가 실각하면 그 자리를 채우는 누군가가 있기 마련이었다.
앞으로 바슈케르 제국의 사교계를 장악할 사람은 벤더펠트 공작 부인이 될 예정이었다.
르네브는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에게 보낼 편지 봉투에 실링 왁스를 부었다.
그때 앰버가 말을 걸어왔다.
“아가씨. 파라디움에서 편지가 왔어요.”
앰버가 건네 봉투에선 옅은 향수 냄새가 풍겼다. 르네브는 지체 않고 봉투를 뜯었다.
담백한 성격답게 황후의 편지는 짤막한 안부 인사로 시작했다.
「……1황자의 건강을 염려해 주어 고마워요. 세이렌 후작 영애.」
르네브가 이전에 보낸 편지의 답신으로, 1황자의 병세가 호전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르네브는 그 편지에서 언뜻 잘 지내고 있다며 안부를 전하는 형식을 취했으나, 은연중에 1황자 병세에 관한 힌트를 흘렸었다.
오피움의 위험성에 대해 언급한 것이다.
다행히 황후는 뜬금없는 르네브의 안부 편지를 그냥 흘려보내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로써 황후는 르네브에게 두 번이나 큰 빚을 진 셈이다.
3년의 유학 기간 후에 르네브가 파라디움으로 돌아가게 되면, 어떤 방법이 되었든 황후의 도움을 받아 낼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졌다.
***
초대장에 대한 답신을 적다 보니 어느덧 해가 중천에 떠올라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집중하느라 허기를 잊고 있던 르네브는 다소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다이닝 룸으로 향했다.
그녀가 비어 있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을 때 복도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이첼인가?’
그녀는 황궁 무도회 이후로 초대된 곳을 순회하느라 최근 화원에선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오랜만에 그녀와 느긋하게 점심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경쾌한 구두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르네브의 얼굴도 밝아졌다.
그리고 입구로 들어온 여자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르네브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
에시카 또한 화원에 머물고 있으며, 같은 다이닝 룸을 사용하고 있었다.
황궁 무도회 이후로 마주칠 일이 전혀 없던 탓에 잊고 있었지만.
“좋은 오후에요. 영애.”
르네브를 발견한 에시카가 싱긋 웃으며 이쪽으로 걸어왔다. 르네브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에시카에게 인사를 돌려주었다.
“좋은 오후입니다.”
느릿하게 르네브의 테이블 앞까지 다가온 에시카가 걸음을 멈추곤 빤히 르네브를 내려다봤다.
르네브는 앉아 있던 그대로 시선을 마주했다.
“음…… 파라디움에선 좀 다르니?”
에시카가 한쪽 뺨을 감아쥐곤 뒤에 선 하녀를 힐끗 돌아봤다.
“무엇이 말입니까?”
“예법 말이야.”
에시카의 뒤에 선 하녀는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뗐다.
“……바슈케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왕녀님.”
“그렇다고 하네요. 영애.”
에시카가 그제야 생글거리며 르네브에게 시선을 돌렸다.
르네브는 속으로만 한숨을 내쉬었다.
에시카가 말하고자 하는 뜻을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나라마다 문화 차이는 뚜렷이 달랐지만, 예법에서는 그다지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지금은 독립국으로 취급하지만, 근교에 있는 나라들의 뿌리는 결국 앙헬이라는 단일 국가에서 뻗어져 나온 것이었으니.
한마디로 에시카는 르네브에게 높은 신분인 자신이 서 있는데, 네가 어째서 앉아 있느냐고 말하는 것이었다.
“…….”
르네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심한 눈으로 에시카를 쳐다봤다.
그런 르네브를 가만히 응시하던 에시카가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탄성을 내뱉었다.
“아…….”
에시카가 이제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뱉었다.
“파라디움의 영애는 내가 솔티의 왕녀라는 걸 모르는 모양이네요.”
한 수 접어 주겠다는 듯 굽어보는 시선에 르네브는 기가 찼다.
르네브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반듯하게 앉은 자세 그대로 되받아쳤다.
“파라디움은 광활한 대지를 자랑하는 대제국이지요.”
에시카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르네브가 하고자 하는 말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그렇다는 건 에시카가 솔티에 대해 잘 모른다는 말과도 같았다.
솔티는 조그만 왕국이었다.
지리적으로 두 제국 사이에 끼어 있던 탓에, 솔티의 왕은 늘 파라디움과 바슈케르 사이에서 고민해야 했다.
그러던 중 솔티의 선대 왕이 솔티를 중립국으로 선포했다.
그의 선택은 현명하다 볼 수 있었다. 양 제국 어느 한쪽이 솔티를 차지하지 못하도록 만든 셈이니.
한동안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중심을 잘 유지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카르가 솔티에 인질을 요구함으로써 그 암묵적 룰을 깨뜨려 버렸다.
물론 이 일로 파라디움의 황제도 솔티에 인질을 요구하긴 했었지.
양 제국에 자식을 내어 줘야 했던 솔티의 왕이 바슈케르의 쪽에 서지도, 파라디움의 쪽에 서지도 못하게끔 말이다.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솔티가 작은 왕국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르네브는 제국의 후작 영애였다.
세이렌 후작은 서부 변경백으로 실상 공작에 가까운 지위를 지녔고, 제국의 공작은 작은 왕국의 왕과 비슷한 신분으로 취급했다.
국제적 신분으로 보자면 솔티의 왕과 세이렌 후작은 동급이었고, 그들의 딸인 에시카와 르네브의 신분 또한 높고 낮음을 따지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르네브가 라이나의 왕녀인 레이첼에게 존중하는 태도를 보인 것은 그녀의 신분이 르네브보다 높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과거의 인연 및 그녀의 성품이 마음에 들어서였지.
“그리고 저희 아버지이신 세이렌 후작께서는 국제적으로 보자면, 제국의 공작에 준하는 신분을 가지고 계시죠.”
이어진 르네브의 말에 에시카가 미간을 좁혔다. 이제야 르네브의 말뜻을 이해한 모양이었다.
“그것이 영애가 내게 방자한 태도를 보이는 이유인가요?”
불쾌한 표정을 금세 감춘 에시카가 미소 지었다. 그럼에도 꽉 쥔 그녀의 양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르네브는 잠시 그쪽으로 주었던 시선을 거두고 대답했다.
“그래요. 왕녀의 신분이 제국의 황녀와 같다면, 그에 따른 예를 취할 테지만요.”
르네브는 그 말을 끝으로 하녀에게 말했다.
“식기 전에 먹는 게 좋겠는데.”
조금 전부터 르네브의 식사를 가져온 하녀가 숨죽이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예.”
르네브의 재촉에 하녀가 조심히 르네브 앞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여전히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고 그 자리에 서 있는 에시카에게서 시선을 떼어 낸 르네브는 우아하게 식기를 들었다.
가늘어진 눈으로 그런 르네브를 응시하던 에시카가 홱 몸을 돌려 응접실을 나가 버렸다.
르네브는 옅게 한숨을 내쉬고는 들고 있던 식기를 다시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입맛이 싹 가신 탓이다.
이후에도 르네브는 먹는 둥 마는 둥 음식을 깨작거리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원으로 걸음을 옮기던 르네브는 조금 전 일을 반추했다.
그러다 뽀얗고 곱던 흰 얼굴과 달리 거칠어 보이던 에시카의 손을 떠올렸다.
‘어째서 왕녀의 손이…….’
이상한 일이었다.
자신의 손을 한 번 바라본 르네브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 걸음을 옮겼다.
***
발을 쿵쿵 구르며 다이닝 룸을 빠져나온 아드리아의 미간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그녀는 바슈케르 황궁 무도회에서 모두의 주목을 받으며 화려한 데뷔탕트를 치렀다.
당연하게도 그날 이후 바슈케르 귀족들에게 초대장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이 보내온 초대장엔 그녀의 아리따운 미모를 칭송하는 글귀는 기본이었고, 직접 만난 귀족들 모두 그녀에게 극진한 예우를 갖췄다.
바슈케르 동북부에 위치한 솔티 왕국은 상당량의 마법석이 매몰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인접에 자리한 여느 국가 못지않게 부유했고, 그곳의 왕녀인 아드리아는 아름답고 청초한 분위기를 풍겼다.
다들 그런 그녀의 매력에 푹 빠진 것 같았다.
비단 미혼의 젊은 영식뿐 아니라, 귀부인들마저도 그녀의 매력에 매료된 듯했다.
그렇게 꿈같은 나날을 보내던 그녀에게 조금 전 다이닝 룸에서의 상황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아, 배고파…….’
홀쭉한 배를 문지르며 아드리아는 황궁을 돌아봤다.
끼니마다 테이블을 가득 채우던 호화롭고도 정성스러운 요리가 다시 떠오르자, 아쉬워졌다.
하지만 그 오만방자한 여자가 있는 곳에서 식사하고 싶은 마음은 추어도 없었다.
‘감히 왕녀인 내게…….’
아드리아의 행세를 하고 있는 에시카는 황궁 정원을 거닐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얼마 전 솔티 왕국에선 비밀리에 젊은 아가씨들을 수소문했다. 조건은 분홍 머리에 벽안을 가진 10대 후반의 여자.
운 좋게도 에시카는 그 조건에 완벽히 부합했다.
그 덕에 지긋지긋한 하녀 생활을 청산할 수 있게 됐지만, 보수가 좋은 만큼, 위험한 일이라는 예상은 충분히 가능했다.
그럼에도 놓칠 수 없는 절호의 기회라는 건 틀림 없었다.
솔티의 왕은 에시카에게 3년 후, 평민이라면 평생 만져 볼 수 없을 정도의 거액을 건넬 것을 제시했다.
그에 그치지 않고, 귀족가와 혼담을 주선해 주겠다고도 했었다.
그 말대로만 된다면, 그녀도 귀족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런 말에 현혹될 정도로 에시카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게 사실일 리가 없지.’
이전까지 머물던 더글릭 자작가에서의 일을 떠올려 보면 간단한 일이었다.
가령, 더글릭 자작의 아이를 임신한 하녀 하나가 어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춘 일 같은 것 말이다.
게다가 솔티 왕의 제안을 들어 버린 이상 에시카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솔티의 왕이 비밀을 알게 된 에시카를 살려 둘 리가 없으니까.
그렇게 반강제로 솔티 왕녀 아드리아의 대리가 된 에시카는 바슈케르로 떠나기 전, 귀족 예법 및 문화를 주입받듯 공부하게 되었다.
다행이라면 지난 생에서 읽은 원작의 내용을 어느 정도 기억하고 있었기에, 왕녀 행세가 아주 힘들진 않았다.
물론 지금 생각해도 처음 에시카의 몸에 들어왔을 때는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원작은 한미한 귀족 가문 영애와 젊은 황제가 신분 차이에도 굴하지 않고, 사랑을 키워 나가는 달콤한 로맨스물이었다.
그런데 막 에시카에 빙의했을 무렵의 그녀는 바슈케르 귀족가의 하녀로 일하고 있었다.
원작은 시작도 하기 전이었고.
한동안 현실을 부정하던 그녀의 머릿속에 딱 떠오른 건 하나였다.
‘if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