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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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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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기만
2023.04.27.
그는 가벼운 흰 셔츠와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게다가 검을 들고 있었다.
“아침 산책이라고 치기엔 시간이 이른 것 같은데.”
“어쩐지 오늘은 눈이 일찍 떠져서요. 폐하께서는 아침 훈련이라도 하신 건가요?”
이카르가 검집을 단단한 허벅지에 툭툭 두드렸다.
“보다시피, 아침 훈련이 끝난 참이지.”
그때 살짝 차가운 새벽 공기가 불어와 르네브의 뺨을 훑고 지나갔다.
바람에 실린 이카르의 옅은 땀 냄새가 코끝에 감겼다.
타인의 땀 냄새가 역할 만도 한데, 이카르의 체향은 시원하고 상쾌했다.
“산책 중이었다면, 동행해도 괜찮겠나? 마침 영애와 상의할 일도 있고.”
그에게 물어볼 것도 있었기에, 르네브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좋아요.”
***
“영애, 국경 근처에서 발견했던 나트하임의 온천을 기억하나?”
이카르가 흘끗 르네브를 쳐다보며 물었다.
“네. 파라디움에서 바슈케르로 오는 길에 발견했던 온천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맞아, 그 일로 영애와 상의가 필요할 것 같더군.”
“상의라니요?”
“그 지역 토지에 다량의 마법석이 묻혀 있었어.”
“폐하, 혹시 그 일대 토지를 매입하셨나요?”
“물론이지.”
이카르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르네브는 속으로만 실망했다.
마법석이 묻혀 있는 것을 그가 벌써 알게 돼 버렸다니.
원작에선 나트하임 온천 지대를 에시카와 루시우스가 처음 발견한다.
처음엔 그곳에 마법석이 묻혀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로 시간이 흐르지만, 나중에 우연히 알게 된다.
마법석은 생활의 편의를 도왔고, 매우 고가였다.
다량의 마법석이 묻혀 있는 땅을 소유한다는 건 현실로 치자면 유전 지대를 손에 넣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르네브는 3년의 유학 기간이 끝나고 나면 차명으로 몰래 그 땅을 사들일 예정이었다.
원작에서도 그 지역에서 마법석이 채굴된다는 걸 알게 된 루시우스가 몰래 그 토지를 사들인다.
바슈케르와 파라디움의 국경 지역이라 어차피 버린 땅과 다름없었기에, 땅 주인은 좋다고 냉큼 그 땅을 팔아 버린다.
뒤늦게 그곳에 다량의 마법석이 묻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속 좀 끓이겠지만.
실망한 것이 르네브의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난 걸까?
이카르가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제국법은 마법석을 처음 발견한 사람에게 소유권이 주어지지.”
르네브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이카르의 적안이 흥미롭게 빛났다.
“영애는 마치 그 지역에 마법석이 묻혀 있다는 걸 꼭 알고 있던 것 같군.”
르네브는 조금 뜨끔했지만, 어깨를 으쓱이며 태연하게 말했다.
“그럴 리가요. 축하드립니다. 폐하.”
평범한 사람에겐 인생 역전의 기회가 주어진 셈이나, 이카르의 대단히 많은 부에 빙산의 일각이 더해진 것에 불과했다.
“그날 그곳에 첫발을 들인 건 나 혼자가 아니었지.”
“설마…… 제게도 마법석의 소유권이 있다는 건가요?”
“맞아.”
선뜻 내놓은 이카르의 대답에 르네브의 눈이 커졌다. 곧바로 이카르의 완벽한 미간이 좁아졌다.
“설마 영애는 나를 날강도쯤으로 생각하고 있던 건가?”
이어지는 이카르의 목소리에 불쾌함이 묻어났다. 르네브는 얼른 손을 내저으며 부정했다.
“그럴 리가요.”
이카르가 혼자서만 마법석 소유권을 독차지할 거란 조금 전의 생각은 얼른 치워 버렸다.
이후에는 마법석 공동 소유권을 문서화하겠다는 이야기가 오갔다.
그러다 보니, 조금 어스름하던 주변의 풍경이 완전히 갰다.
두 사람의 발걸음도 자연스럽게 황궁 쪽을 향하고 있었다.
“영애는 서부 변경에 가 본 적이 없다고 했었지?”
“네.”
르네브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카르가 되물었다.
“틀림없나?”
“……맞을걸요?”
르네브가 말간 얼굴로 이카르를 올려다봤다.
이카르는 르네브의 얼굴에서 떼어 낸 시선을 먼발치로 돌렸다.
그리고 얼마 전 드한의 보고를 떠올렸다.
‘폐하, 당시 그 별장에 세이렌 후작의 가족이 머물렀다고 합니다.’
9년 전, 세이렌 후작과 그의 가족은 서부 변경 근처의 별장에 방문했다.
그런데 어째서 그녀는 서부 국경 지역에 가 본 적이 없다고 하는 건지.
황궁으로 돌아온 이카르는 시중 없이 샤워만 하고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 안에는 언제나처럼 드한과 베인이 서류 작업을 하고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폐하.”
입 모아 인사하는 드한과 베인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이카르는 집무실 중앙에 있는 제 책상에 앉았다.
산처럼 쌓인 서류 더미에 손을 뻗던 이카르는 조금 전 일을 떠올렸다.
이카르는 해가 뜨기 전과 하루 일과를 마친 저녁, 하루 두 번 빼놓지 않고 검술 훈련을 했다.
격하게 몸을 움직이면 복잡한 머릿속을 깨끗이 비울 수 있었다.
그렇게 오늘도 어김없이 동트기 전의 연무장에서 혼자 검을 휘두르고 있을 때였다.
인기척이 느껴졌다.
‘기사들의 훈련 시간은 아직인데.’
누군가 비적비적 걸어가는 게 보였다. 이카르는 의아해하며 그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아직 사위가 어두웠지만, 뒷모습을 보고 이카르는 상대가 누군지 알아차렸다.
기운 없어 보이는 등이 처량 맞은 똥강아지 같았다.
생각에 골몰한 건지 르네브는 이카르가 지척까지 다가서서 말을 걸었을 때가 되어서야 몸을 돌렸다.
“산책 중이었다면, 동행해도 괜찮겠나? 마침 영애와 상의할 일도 있고.”
이카르를 보고 놀랐는지 동그란 자안이 크게 벌어졌다.
파드득 놀라는 꼴이 소동물 같아서 조금 귀여웠다.
이카르는 픽 웃음이 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기운이 없어 보이는 것 같아, 부러 나트하임 지역의 마법석 이야기를 꺼냈다.
세이렌 후작저가 부유하기는 해도, 공짜로 주어지는 금화를 마다할 필요는 없을 테니.
함께 발견한 셈이니, 당연히 공동 소유라 생각했던 이카르와 달리 그녀는 자신을 날강도쯤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괘씸하게.
마법석 이야기에 기뻐 보인 것도 잠깐이었다.
고민이 있는 건지, 기운이 없어 보이는 건 여전했다.
언제나 당차 보이던 그녀였기에, 축 처진 어깨가 어쩐지 거슬렸다.
황궁 무도회에서 황녀 대신 볼모가 되겠다고 자원했을 때조차 그녀에겐 비굴한 기색이 없었다.
되레 당당해 보였다.
처음엔 누군가가 그녀에게 바슈케르로 떠날 것을 강요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겪어 보니, 오히려 그녀의 선택이라 보는 편이 맞을 것 같았다.
연고 하나 없는 먼 타국으로 떠나겠다고 결정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세이렌 후작가처럼 명문가의 영애라면 더더욱.
하지만 그녀는 공식 일정보다 시일을 앞당겨 바슈케르로 떠나기를 원했고, 여행길 내내 군소리 한 번 하지 않았다.
생전 손에 물 한 번 묻혀 본 적 없이 곱게 자랐을 텐데도.
이카르는 그런 그녀의 근성을 높게 샀다.
물론 힘들다, 아프다, 쉬었다 가자는 둥 불평을 줄줄 늘어놓았다 해도 들어줄 생각은 없었지만.
생각이 깊어지자, 이카르는 이쯤하고 오늘 업무를 재개하려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하지만 곧 황궁 무도회 날의 르네브가 떠올랐다.
금붕어 꼬리처럼 나풀거리는 드레스는 그녀에게 아주 잘 어울렸었다.
예뻤다.
비단 이카르만의 생각은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 자리에 있던 귀족들의 시선이 르네브에게서 떠나질 않았었다.
그 눈알을 모조리 뽑아내지 못했던 게 아쉬울 정도로.
생각의 흐름이 제자리에서 빙글 돌며 춤을 추던 르네브의 모습을 지나, 일순 공포에 질린 것처럼 파들파들 떨던 모습에서 멎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무언가 실수했나 하고 되짚어 봤지만, 그럴 만한 정황이 전혀 없었다.
‘영애의 상태가 나빠진 건 분명…….’
아무리 생각해도 솔티의 왕녀가 나타나고부터가 맞았다.
그래서 이카르는 바로 솔티의 왕녀와 르네브 사이의 접점을 알아볼 것을 지시해 두었다.
똑똑.
그때 집무실 문 두드리는 소리에 이카르는 시선을 들었다.
재빨리 문을 열고 방문객을 확인한 베인이 서류를 들고 이카르에게 다가왔다.
“폐하, 전에 말씀하셨던 솔티의 왕녀에 대한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베인이 들고 있던 서류를 이카르에게 내밀었다.
내용을 빠르게 읽어 내린 이카르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 어이가 없네.”
짧게 혀를 찬 이카르가 뇌까리자, 서류 내용을 알 길 없는 드한과 베인이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드한보다 조금 더 용기 있는 베인이 어렵게 입을 뗐다.
“폐하, 무슨 일입니까?”
직접 보라는 듯 이카르가 베인에게 서류를 건네며 다시 한번 헛웃음을 터뜨렸다.
베인과 드한은 이카르에게서 넘겨받은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허…….”
곧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기가 차다는 듯 실소가 터져 나왔다.
때마침 올라온 솔티 왕녀의 보고는 명백히 이카르와 바슈케르 제국에 대한 기만이 틀림없었다.
“미친 건가.”
험악한 표정으로 잔뜩 으르렁거리던 이카르가 돌연 한쪽 입매를 비스듬히 끌어올렸다.
그런 이카르의 표정을 코앞에서 지켜보던 드한과 베인은 겁에 질렸다.
폐하께서 저렇게 웃었을 때 좋은 일이 없었던 탓이다.
드한이 베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그러자 베인이 마지 못해 입을 열었다.
“어,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폐하?”
“죽일까.”
“…….”
잔뜩 가라앉은 이카르의 낮은 음성에 드한과 베인은 마른침을 삼켰다.
무언가 생각하는 듯 시선을 떨어뜨리고 있던 이카르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오히려 잘된 걸지도 모르겠군. 이로써 솔티와의 전쟁엔 정당한 명분이 생겼으니.”
“그럼 바로 솔티와의 전쟁 준비를 할까요?”
조금 전까지 이카르의 기세에 겁을 집어먹었던 베인의 얼굴이 밝아졌다.
사실 베인은 집무실에서 온종일 서류만 들여다보는 게 영 성미에 맞지 않았다.
예전처럼 전장에서 검을 휘두를 때야말로 살아 있다는 걸 실감하는 쪽이었으니까.
잠깐 생각하는가 싶던 이카르가 툭 내뱉었다.
“조금 더 지켜보는 편이 재밌을 것 같군.”
기다리라는 이카르의 말에 베인의 어깨가 시무룩하게 처졌다.
“예, 폐하.”
반면 평화주의자인 드한은 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
황궁 무도회 이후로 르네브에게는 각종 초대장이 쏟아져 들어왔다.
소규모 티 파티에서부터 귀족가에서 열리는 무도회와 살롱의 초대까지.
르네브에게 쏟아지는 바슈케르 귀족들의 관심이 달가웠던지 키어넨은 매우 기뻐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외출하지 않는 르네브를 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레이디.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의 초대도 거절하실 건가요?”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의 초대를 거절하는 편지를 작성하며 르네브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벙긋거리던 키어넨이 곧 포기한 듯 티 포트를 매만졌다.
“차가 식었네요. 새로 내올게요.”
르네브는 티 포트를 들고 멀어지는 키어넨의 뒷모습을 흘끗 보고는 마저 편지를 작성했다.
그간 르네브는 화원에만 머물며 앰버와 레이첼 왕녀를 통해 바슈케르 귀족들에 대한 정보를 모았다.
권력 지배 구조와 응집된 세력들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르네브는 그녀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