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솔티의 왕녀, 아드리아 인사드립니다 (26/148)


#26화 솔티의 왕녀, 아드리아 인사드립니다
2023.04.26.


르네브는 커다란 창가 앞 기다린 소파에 앉아 새까만 하늘을 올려다봤다.

둥근 빵처럼 꽉 차오른 만월이 밝았다.

르네브의 시선은 아름다운 밤하늘을 향해 있었으나, 머릿속은 오늘 황궁 무도회에서의 일을 계속해서 반추했다.

‘솔티의 왕녀, 아드리아. 바슈케르의 태양께 인사드립니다.’

르네브가 기억하던 것보다 훨씬 앳된 모습이었지만, 한 떨기 꽃처럼 아름다웠다는 것만큼은 똑같았다.

여주인공 버프가 확실히 있긴 있구나 싶을 정도로.

이카르를 오롯이 담고 있던 에시카의 푸른 눈을 떠올린 르네브는 불쑥 든 생각에 조금 초조해졌다.

‘어떻게 해도 원작에서 벗어날 순 없는 건가.’

회귀 전에도 달라진 르네브의 행보로 잠시 미래가 바뀌는 듯싶었으나, 결국 제자리였다.

그래서 이번엔 루시우스와 멀리 떨어지는 길을 택했다.

르네브가 사라져 줬으니 원작 주인공인 루시우스와 에시카, 두 사람을 방해하는 장애물도 제거된 셈이다.

이번에야말로 그들 사이에 끼인 불순물이 된 것 같은 더러운 기분을 더는 느낄 필요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운명을 거스를 순 없다 이건가.

“하, 참…….”

르네브의 입에서 헛웃음이 비죽 새어 나왔다.

정말이지 공교로운 등장이 아닐 수 없었다.

과거 에시카가 처음 르네브 앞에 등장했던 건 파라디움의 황궁 무도회였다.

그리고 이번엔 그 장소가 바슈케르로 바뀌었을 뿐, 첫 등장 무대는 이전과 같았다.

아니, 지난번보다 훨씬 주목을 받는 상황에서 등장했지.

과거엔 그저 데뷔탕트를 치르는 여러 영애 중 하나일 뿐이었다면, 이번에는 무려 일국의 왕녀였다.

이카르가 평화 협정을 제안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슈케르에 도착한 다른 귀빈들과 달리, 솔티의 왕녀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바슈케르행을 미뤘다.

차일피일 바슈케르행을 미루는 솔티의 왕에게 이카르는 제한 시간을 지정해 두는 방법을 택했다.

황궁 무도회가 있는 날까지 솔티에서 왕녀를 보내지 않는다면, 평화 협정은 물 건너가는 거라고.

당연하게도 바슈케르의 귀족들은 솔티 왕녀의 행보를 주목했다.

전쟁이 발발해 병사로 차출되는 건 평민들의 사정이었고, 귀족들은 전쟁으로 막대한 이익을 챙길 수가 있었다.

자신의 영지에서 마땅한 병사를 보내고, 승전 시에는 그에 합당한 보상금을 황제에게 요구하면 그만이니까.

연이은 이카르의 승리에 도취한 귀족들은 바슈케르가 전쟁에서 질 거라고는 요만큼도 생각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전쟁의 위험을 해소하며 에시카가 황궁 무도회에 느지막이 참석한 것이야말로 지극히 여주인공다운 등장이라 볼 수 있었다.

“악역은 어떻게 해도 악역이라는 건가.”

마치 자석처럼 르네브가 어디에 있든 끌려오는 에시카를 보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루시우스에게서 멀리 떨어졌더니, 이번 생의 남자 주인공이 이카르로 바뀌기라도 한처럼.

그렇게 생각하자, 입안이 썼다.

“…….”

르네브는 다시 한번 허탈하게 웃었다. 그러나 금세 눈가가 촉촉해졌다. 르네브는 끌어안은 무릎에 얼굴을 묻고 조금 흐느꼈다.

***

르네브는 자신의 응접실 창가 앞 긴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날은 따뜻했고, 키어넨이 내온 꽃차는 향긋했다.

응접실 안은 습도 및 온기가 적절해 상당히 쾌적했다.

다 읽은 책을 테이블에 올려 둔 르네브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빽빽한 활자에 혹사당한 눈이 시원해질 정도의 탁 트인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푸른 하늘과 저 멀리 보이는 녹색의 산맥 사이로 하강하는 노을이 아름다웠다.

언제봐도 질리지 않는 풍경이었다.

그때 무심코 내린 르네브의 시야로 황궁 정원이 들어왔다.

“……!”

연한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의 분홍 머리가 시야에 들어오자 곧바로 르네브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분홍 머리가 흔한 것은 아니었기에, 르네브는 여자가 에시카일 거라 바로 추측했다.

르네브는 미간을 좁힌 채로 여자를 눈으로 좇았다.

종종걸음으로 너른 황궁 정원을 가로지르던 에시카의 걸음에 속도가 붙었다.

여자의 맞은편으로 멀리서 봐도 키가 훤칠한 남자가 황궁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흑발에 장신 또한 흔치 않았기에, 남자가 이카르라는 걸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에시카가 이카르에게 꾸벅 허리를 숙였다.

이카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황궁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에시카는 이카르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커다란 분수대를 지나 건물 입구로 들어설 때까지 에시카가 끊임없이 뭐라 종알대는 모양새였으나, 거리가 멀어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는 없었다.

르네브는 두 사람의 모습이 황궁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조용히 지켜봤다.

“하아…….”

르네브의 입에서 옅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설마 아니겠지 싶으면서도 좋지 않은 방향으로 생각의 흐름이 흘러갔다.

‘기어코 원작 흐름대로 이어지려는 건가.’

원작에서의 주요 무대는 파라디움이었다.

그리고 회귀한 후에는 마치 그 주 무대가 바슈케르로 바뀐 것만 같았다.

캐스팅 또한 여주인공 에시카와 악역 르네브는 그대로고, 남자 주인공만 이카르로 바뀐 것처럼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등 뒤에서 앰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잠시 시간 괜찮으세요?”

“어? 응.”

고개를 끄덕인 르네브가 맞은편 소파 쪽으로 손짓했다.

“감사해요, 아가씨.”

르네브에게 허리를 꾸벅 숙인 앰버가 소파에 앉아 종아리를 통통 두드렸다.

온종일 넓은 황궁 안을 돌아다녔을 앰버를 상상하자 괜히 짠했다.

르네브는 앰버에게 차를 한잔 따라 줬다. 앰버가 히죽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잘 마실게요. 아가씨.”

앰버는 사교적인 성격이었다. 후작저에서도 사람 가리지 않고, 먼저 친근하게 말을 걸고는 했었다.

그 덕에 그녀는 하녀들 사이에서 정보통으로 통했다.

그리고 세이렌 후작을 따라와 이곳, 바슈케르 황궁에서 머물게 된 뒤부터 앰버는 황궁 구석구석을 쏘다녔다.

의지할 사람 하나 없을 텐데도, 일주일 정도 지났을 무렵에는 제법 쓸 만한 정보들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솔티의 왕녀님을 모시는 하녀와 대화를 조금 나눌 수 있게 되었어요.”

르네브가 건넨 차로 마른 목을 축인 앰버가 에시카의 시중을 드는 하녀와 친해지게 된 경위를 짧게 설명했다.

그녀는 오늘 황궁 안을 돌아다니며 주워들은 이야기를 르네브에게 주절주절 늘어놓았고, 르네브는 그 안에서 필요한 정보를 취합하는 식이었다.

“그리고 이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 같긴 한데요.”

“괜찮으니까 말해 봐.”

과거 르네브에게는 눈과 귀가 되어 주던 정보꾼이 있었다.

그녀들은 황궁 안팎의 크고 작은 일들 중에서도 르네브에게 필요한 정보만 추려서 전달했다.

하지만 지금의 르네브에게는 그럴 만한 존재가 따로 없었다.

키어넨은 눈치가 상당히 빠른 편에 속하니, 바슈케르 황궁 안에서 충분히 르네브의 눈과 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카르의 사람이었다.

르네브는 키어넨이 이카르에게 자신에 대해 보고할 것이라 추측했다.

그래서 키어넨 앞에서는 이카르의 귀에 들어가도 될 것과 그러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했다.

그리고 지금 앰버가 전하는 것들은 키어넨이 몰라도 좋은 종류의 것이었다.

“솔티의 왕녀님은 모시기 수월한 편이라고 해요.”

“어떤데?”

“의복이나 입맛도 까다롭지 않으시고…….”

앰버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르네브의 고개가 갸웃 기울었다.

루시우스의 정부일 적 에시카와는 확연히 다른 면모였다.

그때 에시카의 시중을 들던 시녀 대다수가 두 손 두 발 다 들고 황궁을 떠났었다.

예민한 황제 폐하보다 더 까다로우신 정부의 변덕을 받아 주기 힘들다고 말이다.

르네브는 황궁 연회와 같이 크고 작은 일들을 관리했는데, 황궁에서 일하는 시녀들의 관리도 그중 하나였다.

에시카에게 시녀를 붙여 주는 역할 또한 르네브가 해야 했던 것이다.

황궁 시녀직은 보수도 상당했지만, 부수적으로 떨어지는 콩고물이 더 거대했다.

가령 곧 개발될 지역과 같은 호재 및 제국의 공사다망한 일들을 미리 알고 대처할 수 있다.

거기다 사교 모임 이외의 장소에서 미혼의 남녀가 마주치는 일이 드물었던 시대 상황에서 보자면, 미혼 영애들에게도 황궁 시녀직은 환영할 만했다.

황궁에는 유력 귀족 가문의 자제들이 자주 드나들었고, 그들을 가까이서 마주할 기회였으니까.

이런 여러 이점을 두고도 에시카의 곁을 떠나는 시녀들은 많았다.

에시카의 가문은 하급 귀족가였고, 대체로 시녀들의 신분이 그녀보다 높았다.

그래서 에시카에게 시녀를 붙여 주는 일로 르네브는 여러모로 애를 먹었었다.

황제가 총애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뒤부터는 에시카에게 붙으려는 귀족의 수가 늘었음에도 말이다.

‘그런데 모시기 쉽다는 말이 나오다니.’

순간 에시카의 속 알맹이가 바뀌기라도 한 건가 싶었지만, 이어진 앰버의 말에 르네브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아 참! 그리고 말이에요. 솔티의 왕녀님께서 황제 폐하 이야기를 자주 하신다더라고요.”

마침 조금 전 황궁 정원에서 둘의 모습을 봤던 참이었다.

“그러니?”

되묻는 르네브의 목소리가 살짝 떨려 나왔다. 자신이 품었던 가정에 약간의 힘이 실리는 듯했다.

남자 주인공이 루시우스에서 이카르로, 주요 무대가 파라디움 황궁에서 바슈케르 황궁으로 바뀐 것 같다는.

***

그날 르네브는 늦게까지 잠 못 이뤘다. 과거가 반복될 거라는 불안이 엄습한 탓이다.

그리고 꿈을 꿨다.

선잠이 들었던 모양인데, 르네브의 불안을 현실처럼 보여 주는 생생한 꿈이었다.

꿈속의 르네브는 황후의 관을 쓰고 있었다.

다만 현실과 다른 점이 있다면, 황제는 루시우스가 아닌 다른 남자였다.

꿈이 언제나 그렇듯 장소와 시간관념이 허물어져 있었지만, 확실한 건 있었다.

황제의 곁에 있는 여자가 르네브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희고 고운 얼굴로 사랑스럽게 웃는 여자의 푸른 눈과 시선이 마주쳤고, 르네브는 그대로 손을 뻗어 여자의 목을 움켜쥐었다.

고통스럽게 얼굴을 일그러뜨린 여자는 곧 축 늘어졌다.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울컥 치밀어오르는 기분을 느낀 순간 르네브는 꿈속에서 빠져나왔다.

‘왜 그런 꿈을 꾼 거지.’

침대에 모로 누워 있던 르네브는 꿈의 기억을 더듬다 몸을 일으켰다.

꿈과 현실의 경계 모호했던 것도 잠시. 르네브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해가 막 떠오르고 있었다.

르네브는 좋지 않은 생각을 떨쳐 내려 침실을 빠져나왔다.

식사 전에 산책이라도 할 요량으로 르네브는 황궁 정원을 걸었다.

올라오는 이런저런 생각들에 한참 집중하고 있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뒤돌아서자 이카르가 서 있었다.

16825090716712.jpg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