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그대의 첫 춤, 나와 함께하겠나? (25/148)


#25화 그대의 첫 춤, 나와 함께하겠나?
2023.04.25.


이카르는 어느샌가 르네브의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의 말대로, 황제가 첫 춤을 추는 것은 파라디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에시카가 등장한 이후로 르네브는 루시우스와 첫 춤을 춘 적이 없었다.

해서 잠시 착각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홀 중앙에서 춤을 추고 난 뒤가 자신의 차례라고.

“그대의 첫 춤, 나와 함께하겠나?”

“잘 부탁합니다. 폐하.”

두 사람이 홀 중앙에 멈춰 서자, 바이올린 연주자가 활을 들었다.

이어서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연주가 시작됐다.

***

“폐하, 정말 의외의 면이 있으시네요.”

“어떤 부분을 말하는 거지?”

검을 쓰거나, 국력으로 상대를 압박하는 능력만 특출한 줄 알았다.

그런데.

“춤을 꽤 잘 추시네요?”

아첨이 아니라, 음악에 맞춘 움직임이 물 흐르듯이 아주 자연스러웠다.

르네브의 칭찬에 이카르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당연하지. 영애도 제법 움직임이 괜찮군.”

르네브는 순간 이카르와 똑같은 대답을 내놓을 뻔했다.

당연하다고.

르네브는 어언 사교계 짬밥 10년이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밝힌다 해도 뒷받침할 근거를 댈 수가 없다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아 참. 준비해 주신 드레스와 목걸이 정말 감사해요.”

“마음에 드나?”

“네.”

르네브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카르가 물었다.

“다행이군. 이곳 생활은 어떻지?”

“덕분에 만족스러워요.”

“바슈케르로 망명하고 싶을 정도로?”

훅 치고 들어오는 질문에 르네브는 눈을 깜빡였다.

“네?”

“……그 정도로 만족스럽진 않은 모양이군.”

이카르가 아랫입술을 살짝 삐죽였다.

의외의 질문에 당황한 것도 잠시, 그 모습을 보자니 조금 전 손바닥에 키스하던 이카르의 모습이 떠올랐다. 르네브의 시선이 이카르의 입술에서 멎었다.

이내 살짝 벌어진 붉은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온 붉은 혀가 느리게 아랫입술을 핥았다.

그저 마른 입술을 핥은 것뿐인 별것 아닌 행동에 왜 긴장이 되는 걸까.

“몸에 힘을 빼. 왜 갑자기 긴장한 건지 모르겠군.”

이카르가 르네브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그의 숨결이 내려앉자, 솜털이 삐죽 솟았다.

르네브의 귀가 확 달아올랐다.

“기, 긴장하지 않았어요. 전 굉장히 편안한 상태라고요.”

말을 더듬은 것은 물론이고 르네브의 눈이 갈 곳을 잃고 허공을 방황했다.

그런 르네브를 가만히 쳐다보던 이카르가 느리게 말했다.

“영애는 좀처럼 속내를 감출 줄 모르는군.”

가늘어진 적안이 르네브를 지그시 바라본다.

치부를 들킨 것 같아, 르네브는 샐쭉한 표정으로 이카르의 시선을 회피했다.

“귀여워.”

이카르가 눈을 휘며 뱉은 말에 르네브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지금 제대로 들었는지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데,

“영애는 정말 귀여워. 지켜보는 맛이 있단 말이야.”

이내 그가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한 르네브는 조금 뾰족해진 시선으로 이카르를 쳐다봤다.

그런데 이카르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더 진지했다.

“…….”

그 순간 기억의 편린이 떠올랐다.

흘러내린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기며 제게 질린다는 듯 말하던 루시우스의 모습.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는 말도.

‘황후. 그대는 정말 귀여운 맛이라고는 없어. 에시카처럼 좀 사근사근하게…….’

급격히 기분이 가라앉았다. 르네브는 표정을 감추려 시선을 떨어뜨렸다.

“귀엽다는 말이 싫은 모양이군.”

이번에는 정말 놀리려는 것 같아, 살짝 발끈한 르네브는 시선을 들었다.

이카르의 눈은 여전히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 빤히 들여다보이는 호의.

“…….”

몸을 움직일 때마다 이따금 코끝에 감기는 남성적이면서도 기분 좋은 체향. 맞닿은 몸을 통해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

르네브는 잠시 꿈을 꾸는 건가 싶었다.

오직 자신만을 바라보는 사람이라니.

그토록 바랐지만, 루시우스는 절대 주지 않았던 감정, 그게 이카르에게서 읽혔다.

르네브는 이카르가 자신에게 보이는 호의가 고마운 한편 의아했다.

그와 자신은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르네브는 이카르에게 무언가를 해 준 적이 없었다. 정확하게는 아무것도 해 준 게 없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런데 왜?’

르네브는 무엇이든 자신이 상대에게 주는 만큼 받을 수 있다고 믿어 왔다. 그게 물질이든 감정이든.

그런 믿음 때문에 루시우스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걸 줬다.

물론 르네브가 보인 호의가 루시우스에게선 반의 반절도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루시우스에게 더욱 잘해 주면 된다고 생각했었으니까.

그래서 이카르의 호의가 더더욱 낯설었다.

‘조금 귀찮을 수 있었던 외교 문제를 빠르게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어서일까?’

하지만 그 부분은 르네브가 먼저 나서지 않았더라도, 쉽게 해결되었을 것이다.

회귀 전에도 이카르는 별 어려움 없이 황녀를 인질 삼았다. 르네브가 중간에 개입하지 않았더라도 마찬가지였을 터다.

그리나 그 외의 것은 딱히 떠오르지도 않았다.

르네브가 종잡을 수 없는 이카르의 심리에 대해 거듭 생각할 때 홀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무슨 일이지?’

르네브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소란의 중심으로 돌아갔다.

“……!”

홀 안으로 천천히 걸어오는 여자의 모습을 보고 순간 르네브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순백의 하늘거리는 드레스는 그녀의 청초한 매력을 돋보이게 했고, 한쪽 어깨로 늘어뜨린 구불거리는 분홍 머리는 솜사탕처럼 달콤해 보였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귀족들의 시선이 부끄럽다는 듯 그녀의 뽀얗고 흰 양 뺨에는 수줍게 핑크빛 홍조가 드리워져 있었다.

“솔티의 왕녀인 모양이군.”

그때 머리 위에서 나지막한 저음이 내려앉았다. 르네브는 이카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솔티의 왕녀라고요?”

이카르가 여자에게 시선을 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으로 사뿐사뿐 걸어오고 있는 여자는 다름 아닌 에시카였다. 원작의 여주인공이자, 회귀 전 루시우스의 정부였던.

르네브의 몸이 분노로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영애?”

그 떨림을 감지한 듯 이카르가 미간을 좁혔다.

르네브는 태연한 얼굴로 이카르를 마주 볼 자신이 없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얼른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해야 하는데.’

아교로 붙여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맞붙은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왜 그러지?”

이카르가 재차 물었지만, 르네브는 대답할 수 없었다.

하늘거리는 드레스 위로 비죽 솟아오른 가느다란 에시카의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는 걸 르네브는 잘 알았다.

치밀어오른 감정을 있는 그대로 분출했을 때 어떤 결과가 돌아오는지를.

과거에 에시카는 유독 사람이 많은 곳에서 르네브를 자극하곤 했었다.

아마도 남편의 정부에게 질투한 나머지 꼴사나워진 황후의 모습을 모두에게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런 의도를 눈치채고 꾹꾹 눌러 참다 한번은 그 도발에 넘어가 버렸다.

에시카의 뺨을 때려 버린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루시우스는 에시카를 감쌌고, 르네브는 장소 불문하고 남편의 정부에게 손을 올린 꼴이 되고 말았다.

그 후엔 어땠나.

공식적인 장소에서 뺨을 때릴 정도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얼마나 정부를 핍박할지 눈에 훤하다는 추문이 그녀를 따라다녔었다.

그때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묵직한 무언가가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숨 쉬는 걸 잊어버린 듯 호흡이 가빠왔다.

“……!”

그때, 뜨거운 손이 르네브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천천히 숨 들이마시고 내쉬어.”

르네브는 흔들리는 눈으로 시선을 들었다.

이카르의 붉은 눈이 그녀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말없이 그저 등을 살살 쓸어내리는 손길이 다정했다.

가빴던 르네브의 호흡이 차츰 정상으로 돌아왔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저 말없이 등을 쓸어내리는 것만으로 안심이 되다니.

“괜찮나?”

나지막한 이카르의 음성에 날카로운 것으로 찌르는 것 같은 가슴 통증이 일었다.

르네브는 항상 저 말이 듣고 싶었다. 루시우스에게서.

그는 끝끝내 르네브에게 해 주지 않았던 말이었지만.

“그럼요.”

르네브는 눈물이 나오려는 걸 꾹 참고 웃어 보였다. 그러자 이카르가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영애는 참 이상하군.”

“뭐가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미소 짓는 것 말이야. 상당히 이상해.”

속내를 꼬집는 이카르의 예리한 말에 르네브는 더욱 활짝 웃어 보였다.

“울다니요? 제가 무슨 어린 애도 아니고…….”

“영애의 말대로라면, 어른은 울면 안 된다는 뜻이 되겠군.”

이카르가 눈매를 가늘게 좁힌 채로 르네브를 쳐다봤다.

“…….”

그러고 보면 누구도 르네브에게 울면 안 된다는 말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저 황후는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고 스스로 되뇌었을 뿐.

“……그렇다고 아무 앞에서나 울진 않았으면 좋겠군.”

르네브가 그게 무슨 뜻이냐고 반문하려던 순간이었다.

“안녕하세요.”

이카르의 너른 가슴팍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솔티의 왕녀, 아드리아. 바슈케르의 태양께 인사드립니다.”

이카르가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몸을 돌렸다.

르네브의 시야에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로 이카르를 올려다보고 있는 에시카의 모습이 들어왔다.

“늦었군. 솔티의 왕녀.”

“황궁 무도회에 맞추려 서둘렀지만…….”

에시카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뭐라 둘러댔지만, 르네브의 귀에는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어째서 에시카가 솔티의 왕녀가 된 거지?’

원작은 파라디움에서 시작되었다.

탁월한 말솜씨와 더불어 사랑스러운 외모와 상황에 맞는 애티튜드를 갖췄던 에시카는 사교계 등장과 동시에 뭇 귀족 남성들의 흠모를 받게 된다.

루시우스 또한 그중 한 사람이었다.

당시 아버지의 전사 소식과 더불어 유산의 아픔까지, 르네브의 심신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원작 르네브에겐 남편의 관심을 앗아 간 에시카가 달가울 리 없었다.

처음에는 귀족들 앞에서 망신을 주는 정도에 그치지만. 나중에 가선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만들 정도로 에시카를 몰아붙인다.

그렇게 원작 르네브는 악녀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 준다.

물론 여주인공 버프를 잔뜩 받은 에시카는 르네브가 뻗는 마수를 족족 해결해 독자들에게 사이다를 안겨 줬다.

원작은, 변변치 않은 파라디움의 귀족 영애인 에시카가 자신의 지혜와 재치를 발휘해 가장 높은 곳까지 오르게 되는 스토리란 뜻이다.

‘그런데 왜?’

원작에서도 회귀 전에도 에시카가 솔티의 왕녀였던 적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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