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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웃으니까, 꽤 귀엽잖아 (24/148)


#24화 웃으니까, 꽤 귀엽잖아
2023.04.24.


르네브는 이카르가 보내 준 재봉사가 준비한 시안 중에서 드레스를 고르고, 새 드레스가 완성되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키어넨, 오늘이었나요? 폐하께서 보내 주신다던 보석상이 방문하기로 한 날이.”

침실을 나서려던 르네브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키어넨을 쳐다봤다.

“맞아요. 레이디. 3시에 방문하기로 했어요.”

키어넨의 밝게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르네브는 침실을 나섰다.

다이닝 룸으로 향하는 긴 복도를 걷는데,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은 아침이에요. 영애.”

고개를 돌리자, 빠른 걸음으로 걸어오는 레이첼이 보였다.

“좋은 아침이에요. 왕녀님.”

그런데 언제나 맑고 투명하기만 하던 레이첼의 눈 밑에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조금 피곤해 보이시는데, 괜찮으세요?”

르네브가 걱정 섞인 목소리로 묻자, 레이첼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황궁 무도회 준비로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라이나에서 주로 사용하던 원단은 여기 들여오지 않는 모양이더라고요. 원단들이 얇아서 그런지 제가 원하는 디자인으로는…….”

첫 무도회인 만큼 최고의 드레스를 선보이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아 답답해하는 것 같았다.

“너무 제 얘기만 해서 죄송해요. 영애는 준비 잘되어 가고 있나요?”

“그런 편이에요.”

드레스와 장신구에 대해 조금 더 대화를 나눴을 때였다.

레이첼이 돌연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목소리를 죽였다.

“그런데 영애께선 황궁 무도회 파트너를 구하셨나요?”

“네.”

르네브가 고개를 끄덕이자, 레이첼의 눈이 반짝였다.

“설마! 벨케인 소공작의 에스코트를 받기로 한 건 아니죠?”

레이첼의 얼굴이 ‘아니라고 말해!’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건 아니에요.”

르네브는 살포시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레이첼이 묘하게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벨케인 소공작에게 황궁 무도회 파트너가 돼 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거든요. 정말 다행이에요. 영애께서 다른 파트너를 구하셔서…….”

레이첼이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때마침 이쪽으로 걸어오던 벨케인 소공작이 산뜻한 얼굴로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영애. 좋은 아침입니다, 왕녀님.”

“…….”

“…….”

벨케인 소공작의 벽안이 빠르게 두 사람을 차례로 살폈다.

그의 등장으로 어색해진 분위기를 기민하게 눈치챈 듯 벨케인 소공작의 눈매가 조금 휘어졌다.

“두 분이서 무척 재미난 이야기라도 나누고 계셨나 봅니다? 가령 제 이야기를 하고 계셨다든지요.”

르네브의 입이 ‘아’ 하고 작게 벌어졌고, 잠깐 당황하던 레이첼이 재빨리 대화 주제를 바꿔 버렸다.

“아, 참! 솔티의 왕녀께선 아직도 바슈케르에 오지 않았다던데, 대체 어찌 된 일일까요?”

서둘러 다이닝 룸 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레이첼이 르네브에게 눈을 찡긋해 보였다.

황궁 무도회 파트너 제안은 벨케인 소공작과 단둘이 있을 때 하려는 모양이었다.

‘은근히 쑥스러움쟁이네.’

르네브는 레이첼의 새로운 일면을 발견한 것에 만족하며 그녀의 뜻대로 모른 척하기로 했다.

***

“폐하, 완성된 슈트가 도착했습니다.”

집무실 책상에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를 빠르게 훑어 내리던 이카르가 고개를 들었다.

“세이렌 후작 영애의 드레스는?”

“재봉이 끝났다고 보고받았습니다. 오늘 중으로 재봉사가 방문한다고 합니다.”

“그렇군.”

다시 서류로 시선을 떨어뜨리던 이카르의 눈에 시계가 들어왔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

“예…….”

드한이 힘없이 대답했다.

그제야 서류에서 시선을 떼어 낸 베인이 홀쭉한 배를 문질렀다.

“폐하께선 잠깐 서류를 본다고 하시고선, 항상 점심시간을 훌쩍 넘기곤 하시죠.”

주군께서 제때 식사를 하지 않으니, 베인과 드한도 매번 식사 때를 놓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제 할 일만 잘 처리한다면, 베인과 드한이 업무시간에 낮잠을 잔다 해도 이카르는 별말 하지 않을 위인이었다.

그럼에도 베인과 드한은 이카르보다 먼저 식사를 하지 않았다.

일종의 의리. 상사가 굶고 있는데, 자신들만 배를 채울 성격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미련하게.

“간단히 먹을 수 있는 것으로 준비해.”

오늘 점심도 샌드위치라는 소리였다.

“예, 폐하.”

***

여느 때보다 르네브의 하루는 바쁘게 돌아갔다.

손가락이 물에 불어 쭈글쭈글해질 때까지 뜨거운 욕조에서 몸을 풀고 나자 하녀들이 르네브를 정성스레 씻겼다.

그 후엔 전신 마사지를 받았다. 온몸 구석구석에 향유를 듬뿍 바르고 나서야 르네브는 드레스를 입을 수 있었다.

“정말, 진짜, 너무 아름다우세요!”

르네브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쭉 훑었다.

향유를 바른 은발이 물미역처럼 르네브의 가녀린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고, 가슴 위쪽과 쇄골이 훤히 드러나는 시원한 네크라인이 돋보였다.

그 아래로 큼지막한 리본과 레이스로 상체 장식이 되어 있었다.

소맷단은 잉어의 지느러미처럼 하늘거렸고, 드레스 끝단과 중간 부분은 과하지 않을 정도의 레이스 장식과 꽃 자수가 놓여 있었다.

“키어넨, 목걸이 좀 꺼내 줄래요?”

“네, 레이디.”

키어넨이 붉은색 보석 상자를 내밀었다.

뚜껑을 열자, 레드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영롱한 광채를 뿜었다. 드레스와 어울릴 거라며 보석상이 강하게 추천하던 것이었다.

레드 다이아몬드.

그러니까 1캐럿당 100만 골드에 가까운 대륙에서 가장 값비싼 보석.

르네브는 이전 생에서도 레드 다이아몬드를 본 적이 있었다. 어느 날 에시카가 손가락에 끼고 나타난 반지 장식으로.

알맹이가 참새 눈곱만 한 크기였음에도 황제가 정부에게 거액의 선물을 했다는 것 자체로 큰 화제가 됐었다.

당연하게도 르네브의 얼굴엔 먹칠한 셈이었고.

그때 에시카가 루시우스에게 받았던 레드 다이아몬드보다 10배는 큰 크기를 보며 르네브는 미간을 모았다.

‘괜찮은…… 거겠지?’

슬슬 르네브는 바슈케르의 국고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레드 다이아몬드 목걸이는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았다. 대여의 개념으로 생각하면 되니까, 하루 잘 사용하고 다시 돌려주는 식으로.

문제는 드레스였다.

황후의 일상복도 화려한 편에 속했지만, 지금 입은 드레스는 확실히 도가 지나쳤다.

주 생산지인 베니스탄에서조차 아주 극소량만 얻을 수 있는 비큐나 원단이 덧대어져 있으니 말이다.

거기다 목걸이와 달리 드레스는 르네브의 체형에 맞춘 것이기에, 재사용도 불가했다.

르네브가 이카르의 주머니 사정에 대해 걱정할 때였다.

“오래 서 계실 것 같아, 바닥에 쿠션을 넣어 뒀어요.”

붉은 펌프스를 가리키며 키어넨이 헤헤 웃었다. 르네브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고마워요. 키어넨. 오늘 고생 많았어요.”

“전혀요! 이렇게 예쁘게 치장하신 레이디를 제일 처음 볼 수 있는 사람이 저잖아요. 이런 영광을 누릴 수 있어서 너무 좋은걸요.”

마치 멀리서만 지켜보던 최애의 일일 매니저라도 된 듯한 반응이었다.

그게 너무 귀여우면서도 웃겨서, 르네브의 입에서 푸스스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면서 르네브는 뒤늦게 걱정했다.

‘방금 좀, 기품 없어 보였던 거 같은데.’

그러나 뭐가 그리 좋은지 르네브를 바라보는 키어넨의 눈은 보석처럼 반짝거릴 뿐이었다.

“그럼, 다녀올게요.”

“네! 무도회에 참석한 모든 분을 홀리고 오세요.”

키어넨의 말에 르네브는 살짝 이마를 짚으며 시선을 떨어뜨렸다.

민망했다.

“……노력은 해 볼게요.”

어렵사리 그리 대답한 르네브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때 마침 노크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곧바로 익숙한 저음이 들려왔다.

“준비는 끝났나?”

타이밍 적절하게 이카르가 찾아온 모양이다.

“이제 막 끝난 참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르네브는 침실 문을 열었다.

“……!”

르네브의 자색 눈이 커졌다.

이카르를 보자마자 바로 든 생각은 ‘와, 미쳤다……!’였다.

왜냐하면.

목 끝까지 단정히 잠근 검푸른 제복은 금욕적인 느낌을 풍겼고, 쉼표 스타일로 깔끔하게 정돈한 앞머리는 향유를 바른 듯 살짝 젖어 있었다.

마치, 욕실에서 막 튀어나온 것처럼 보인달까?

쉽게 말해서.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될 경건한 사제의 느낌을 주는 동시에 오는 여자 막지 않고, 가는 여자 잡지 않는 바람둥이의 느낌이 공존했다.

게다가 자신을 쳐다보는 이카르의 눈빛이 오늘따라 끈적해 보인다면 착각일까?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데, 이카르가 손을 내밀었다.

르네브는 커다란 이카르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악마에게 홀린 어린 양처럼.

전에 그랬듯, 이카르의 손은 따듯하다 못해 뜨거웠다.

르네브가 맞잡은 손을 잠시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이카르가 손을 고쳐 잡았다.

“……?”

그 행동의 의미를 알 수 없는 르네브의 고개가 갸웃 기우는 순간.

“……!”

이카르가 그녀의 손을 살짝 끌어당기더니, 손바닥에 입술을 묻었다. 부드럽고 말랑한 입술의 감촉이 매우 생경했다.

간질거리는 감각이 몸 구석구석으로 번져 나갔다.

르네브는 눈을 크게 뜬 채로 굳었다.

이카르가 시선을 들어 르네브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드레스, 보석 다 그대와 잘 어울리는군. 아름다워.”

왜인지 르네브의 목구멍이 바싹 조여 왔다. 잠시 고장 난 로봇처럼 삐걱거리던 르네브는 입술을 달싹였다.

“폐하께서도, 오늘 정말 멋있으세요.”

이카르 눈이 사르르 휘어지고, 입꼬리 끝이 말려 올라갔다.

“영애의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군. 그럼, 가지.”

이카르가 팔을 살짝 내밀었고, 르네브는 그 위에 손을 얹었다.

“네, 폐하.”

맞닿은 손끝으로 이카르의 단단한 팔 근육을 느낄 수 있었다. 르네브는 애써 그 감각을 무시하고 걸음을 내디뎠다.

‘근데…… 웃으니까, 꽤 귀엽잖아.’

조금 전 이카르의 미소를 떠올리며, 르네브의 입매도 약간의 호선을 그렸다.

***

그레이트 홀로 들어서는 이카르와 르네브에게 귀족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그 시선들이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황후로 늘 받았던 시선과 달리 낯선 이방인의 존재에 대해 궁금해하면서도, 배척하는 시선이 뒤섞여 있었다.

“원하는 만큼 충분히 먹고 마시고 즐기도록.”

이카르가 간단히 아니, 담백하게 무도회 시작을 알렸다.

르네브는 눈을 끔뻑였다.

‘설마…… 끝인가?’

귀족들을 모아 놓고, 일장 연설을 늘어놓던 루시우스에게 익숙한 르네브는 조금 당황했다.

그래서 주변을 둘러보며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

몇 보 떨어진 거리에서 드한과 베인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다른 귀족들도 파트너와 대화를 나누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러다 익숙한 얼굴들을 발견했다.

벨케인 소공작과 레이첼 왕녀가 함께였다.

눈이 마주치자, 레이첼이 르네브 쪽으로 다가오려 했다.

그러나 근처에 있던 젊은 귀족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괜찮으니 대화 나누라며 그녀에게 눈빛을 보내는데, 귓가로 나지막한 저음이 파고들었다.

“무도회의 첫 춤은 언제나 황제의 몫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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