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뜻밖의 제안 (21/148)


#21화 뜻밖의 제안
2023.04.21.


이번에는 이카르가 말없이 베인을 쳐다봤다.

“그런데 그보다 3살이나 더 많은 9세입니다. 그런 왕녀를 대신해 자원하다니요? 어쩌면 평화 협정을 빌미로 다른 국가들과 동맹을 맺으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베인, 난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도무지 모르겠는데.”

참다못한 드한이 베인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베인이 드한의 가슴팍을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어제의 적은 오늘은 동지. 초청한 귀빈들의 나라 모두 이전까지는 서로 견제하는 사이였습니다.”

가만히 베인의 말을 듣고만 있던 이카르가 입을 열었다.

“베인, 벨케인 소공작이 세이렌 후작 영애에게 은밀한 동맹을 제안할 거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

“맞습니다, 폐하! 제가 드리려던 말씀이 바로 그겁니다.”

드한은 조금 흐린 눈으로 베인을 쳐다봤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베인의 말이 전혀 허무맹랑하지는 않았다.

“어! 폐하, 저기를 보십시오.”

그때 베인이 창가를 가리켰다. 이카르와 드한의 시선이 창문 너머로 향했다.

다소 먼 거리이기에 얼굴까지 정확히 보이지는 않았으나, 긴 은발의 여성과 금발의 남성이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다.

“저건 또 뭐야.”

이카르가 씹어뱉듯 낮게 으르렁거리자, 베인이 더욱 당당하게 주장했다.

“보십시오. 폐하! 은밀히 물밑 작업을 시작한 게 아닐지 충분히 의심해 볼 만한 정황입니다.”

“베인, 너 오늘 좀…….”

드한이 흥분한 베인을 진정시키려 할 때였다.

이카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집무실을 나가 버렸다.

남겨진 베인이 드한을 쳐다보며 물었다.

“폐하께서 즉시 귀빈들의 목을 베어 버리지는 않으시겠지?”

베인의 근거 있는 주장에 드한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폐하라면 충분히.”

그리고 언제나처럼 그 뒷수습을 맡아야 하는 것은 자신이었다.

“뒤따르는 게 좋겠지?”

드한이 시선을 보내자, 베인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

***

“그렇다는 말씀은, 소공작께서도 자원하셨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왕녀님같이 어린 나이에 부모님과 떨어져 먼 곳에서 혼자가 된다는 건 너무 가혹하니까요.”

벨케인 소공작의 투명한 눈망울에 약간의 연민이 어렸다. 아마도 어린 왕녀를 떠올리는 듯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셨을 텐데, 소공작께서는 왕녀님을 많이 아끼시나 보네요.”

“왕녀님을 두고 할 적절한 표현은 아니지만, 어찌나 귀여우신지…….”

벨케인 소공작이 사촌 동생 자랑을 조금 늘어놓았다. 르네브도 그 마음을 모르지 않았기에, 옅게 미소 지은 채로 벨케인 소공작의 말에 귀 기울였다.

게다가 벨케인 소공작의 약간 탁한 미성은 듣기 좋았다.

“아, 이런. 제가 너무 혼자 떠들었나 봅니다. 지루하지는 않으셨는지요?”

그러다 갑자기 민망해졌는지 벨케인 소공작이 목덜미를 긁적이며 르네브의 눈치를 살폈다.

르네브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계속 듣고 있다 보니, 왕녀님을 한 번쯤 뵙고 싶단 생각이 드는걸요.”

르네브의 긍정적인 반응 때문인지, 벨케인 소공작의 얼굴에 다시금 미소가 떠올랐다.

“영애께서도 아이를 좋아하십니까?”

르네브는 쉽사리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물론 지난 생에서 카엘을 사랑했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이번 생에는 아이를 낳을 자신이 없었다.

어차피 루시우스가 아닌 다른 누군가와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다고 해도 그게 카엘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스러운 아이를 끝끝내 지켜 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앞섰다.

“아, 방금 질문은 잊어 주십시오. 제가 영애를 곤란하게 만든 것 같군요.”

르네브가 바로 대답하지 못하자, 벨케인 소공작이 얼른 말을 돌렸다.

이후에도 르네브는 황궁 정원을 거닐며, 벨케인 소공작과 대화를 나눴다.

만난 지 얼마 안 되었다는 사실을 잊을 만큼 벨케인 소공작에게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회귀 후 경계심이 가득한 르네브를 방심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래서 르네브는 더욱 주의를 기울였다.

빠르게 훅 들어오는 사람일수록 조심해야 한다는 크나큰 교훈을 루시우스를 통해 얻지 않았나.

“그나저나, 오늘은 산책하기에 날이 참 좋군요.”

저 멀리 보이는 푸르른 산맥을 바라보며 벨케인 소공작이 말했다.

“그러네요. 하늘도 파랗고.”

르네브도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슈케르와 베니스탄을 가르는 너른 산맥과 맑은 하늘, 수도 시가지 등이 어렴풋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까 침실에 방문했을 때 책을 읽고 계시던데, 책 읽는 걸 좋아하시나 봅니다?”

“맞아요. 3년간은 황궁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니까 취미를 가져야죠.”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벨케인 소공작이 이후에도 여러 가지 질문을 해 왔다.

그리고 그가 건넨 마지막 질문은 이거였다.

“곧 있을 황궁 무도회의 파트너가 돼 주시겠습니까?”

순진한 줄만 알았는데.

이제 보니, 선수가 따로 없다.

일단 긍정적인 대답이 나올 만한 질문을 반복적으로 던진 다음, 진짜로 묻고 싶던 것을 묻는 화법을 쓰다니.

르네브는 벨케인 소공작의 의중을 바로 눈치챘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제안이었기에, 당황스러워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바로 결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무도회까지 아직 2주가 남았으니 천천히 생각해 보시고 결정하셔도 괜찮습니다.”

그게 꼭, 2주 안에 파트너 제안을 수락하게 만들 거라는 뜻처럼 들렸다.

“…….”

르네브가 말없이 눈만 깜빡이자, 벨케인 소공작이 머쓱해하며 덧붙였다.

“부담을 드리려고 한 건 아니었습니다만.”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르네브는 벨케인 소공작의 대답 여부에 따라 결정을 내리기로 마음먹었다.

“네, 말씀하십시오.”

“어떤 의미로 파트너 신청을 하신 건지 들을 수 있을까요?”

“굳이 의미를 두자면, 아시다시피 저도 영애께서도 이곳에서는 이방인이나 마찬가지죠.”

차분하게 이어지는 벨케인 소공작의 목소리를 들으며 르네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도회 참석은 남녀 한 쌍이 기본 원칙이고요.”

‘아, 혹시 파라디움은 다릅니까?’ 하고 덧붙이는 말에 르네브는 살포시 웃었다.

“파라디움도 똑같아요.”

“역시 무도회 참석이 남녀 한 쌍이라는 것만큼은 만국 공통인가 봅니다.”

벨케인 소공작이 티끌 하나 없이 해맑게 웃었다. 정말로 더러운 속내 따윈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무해한 얼굴이었다.

마치, 자신의 품에 안겨 들던 그녀의 아들 카엘처럼.

르네브는 잠시 벨케인 소공작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러자 그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우윳빛 흰 뺨을 감싸는 커다란 손을 본 순간 르네브는 과거에서 빠져나왔다.

“왜 그렇게 보시는지? 혹시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르네브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벨케인 소공작님께서 하시려는 말씀은 서로 파트너가 없고, 구할 수도 없는 처지라는 거죠?”

“뭐, 꼭 그런 뜻으로만 말씀드린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 맞습니다.”

변명하는가 싶던 벨케인 소공작이 빠르게 르네브의 말에 수긍했다.

확실히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이카르가 먼저 무도회 파트너 제안을 하긴 했지만, 그는 이 나라의 황제고 벨케인 소공작은 르네브와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다.

게다가 바슈케르 귀족들과의 첫 대면 자리에서 괜한 의심을 살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미혼에 젊고, 잘생긴 황제의 옆자리를 노리는 영애들은 바슈케르에 차고 넘칠 테니.

논리적으로는 벨케인 소공작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맞다.

그러나 만약 그가 자신에게 이성적 호감을 느끼고 있는 거라면 거절하는 게 옳았다.

짝이 없기는 마찬가지인 레이첼을 두고 자신에게 파트너 제안을 했는지.

그 사정을 듣고 난 뒤에 결정을 내리기로 르네브는 마음먹었다.

“그…….”

르네브가 질문을 하려고 막 입을 열었을 때 머리 위로 익숙한 저음이 내려앉았다.

“혼자서는 외로웠나?”

르네브는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손 뻗으면 닿을, 아니, 그보다 근거리에 이카르가 서 있었다.

고집스레 꽉 다물린 입술, 어딘지 냉랭해 보이는 적안이 르네브를 응시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의 등장에 조금 놀랐지만, 르네브는 빠르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벨케인 소공작도 허리를 숙였다.

마치 불순물이라도 되는 양 벨케인 소공작을 무심하게 쳐다보던 이카르가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매우 즐거워 보이더군.”

“벨케인 소공작께서도 바슈케르에 자원해 오셨다더라고요.”

르네브는 조금 전 그와 나눈 대화에 대해 짧게 설명을 덧붙였다.

눈동자만 힐끔 굴려 벨케인 소공작을 가리키며 이카르가 물었다.

“그래서 동병상련이라도 느꼈나?”

“혼자 살 수는 없는 거니까요. 비슷한 처지끼리 의지할 수 있으면 좋잖아요.”

르네브의 대답에 이카르의 눈이 가늘어졌다.

“의지할 수 있어 좋다? 마치, 벨케인 소공작을 의지하고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군?”

“세이렌 공작 영애께서도 그렇고, 저도 자원해서 그런지 대화가 잘 통하더군요.”

벨케인 소공작이 예의 그 천진한 얼굴로 말하곤 르네브를 쳐다봤다. 그의 눈이 르네브의 동의를 구하는 것 같았다.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르네브가 말을 고르는데,

“소공작, 그대에게 발언권을 허락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만.”

이카르가 잔뜩 낮아진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이카르에게서 위험한 살기가 넘실거렸다.

몸이 바짝 긴장될 정도의 위압감에 르네브는 마른침을 삼키며 벨케인 소공작을 힐끔거렸다.

여기서 그가 보일 반응은 두 가지.

이카르의 기세에 눌려 꼬리를 내리거나, 호기롭게 발끈하거나.

그러나 벨케인 소공작은 그런 르네브의 예상을 간단히 빗겨 나가는 반응을 보였다.

“결례를 범했군요. 말씀 중에 끼어들어서 죄송합니다.”

벨케인 소공작이 그린 듯한 미소를 머금고 빠르게 사과했다. 매우 정중하고 산뜻하게.

만약 그가 욱하는 심정에 이카르에게 반발심을 드러냈다면, 이카르는 두 남자 사이의 서열을 확실히 되짚어 보는 기회를 얻는 셈이다.

반대로 비굴하게 허리를 숙였다면, 르네브 앞에서 자존심을 잔뜩 구기게 되겠지.

‘호오…….’

르네브가 벨케인 소공작의 적절한 대처에 속으로만 감탄하는데, 이카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다시금 사과드립니다.”

벨케인 소공작이 생글생글 미소 지으며 한 번 더 정중하게 사과했고, 이카르의 표정엔 불쾌감이 짙어졌다.

웃는 얼굴에 침을 뱉을 것 같다.

르네브는 사달이 나기 전에 분위기를 전환시키려 입을 뗐다.

“오늘 날씨가 참 좋네요. 폐하께서도 정원 산책을 나오셨나요?”

“산책?”

이카르의 눈썹이 삐뚜름히 기울었다. 괜히 불똥이 튀는 건 아닌지 걱정하며 르네브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면 어딘가 가시던 중이셨거나요.”

“그렇지. 마침 휴식을 취할 겸 바깥 공기를 쐬러 나온 참이었지. 동행하겠나, 영애?”

찌푸렸던 이카르의 미간이 풀어진 것은 다행이나 벨케인 소공작과 정원을 꽤 걸었던 데다, 새 구두에 혹사당한 발이 조금 아팠다.

르네브는 화원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황제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도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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