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저런, 불쌍한 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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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저런, 불쌍한 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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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저런, 불쌍한 스미스
2023.04.18.
“참! 아가씨, 웬디가 대장간의 스미스에게 청혼을 받았어요.”
한참 잔소리를 늘어놓던 앰버가 막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역시 이번에도 그렇게 되었구나.
“웬디는 승낙했고?”
웬디는 세이렌 후작저에서 르네브의 시중을 들던 하녀였다.
르네브가 루시우스와 약혼하고, 결혼 준비를 시작할 무렵 웬디도 청혼을 받았다.
평민의 결혼 준비는 황족보다 짧았기에 바로 결혼하면 되었다.
하지만 웬디는 모시는 아가씨보다 먼저 시집가는 건 하극상이라 말하며 스미스와의 결혼을 미뤘다.
그 때문에 스미스만 애가 닳았었지.
“아가씨보다 먼저 결혼하는 하녀가 어디 있느냐고 하더라고요. 스미스에겐 아가씨께서 파라디움으로 돌아온 뒤에 결혼하자고 했다나 봐요.”
르네브는 이마를 짚었다.
‘저런, 불쌍한 스미스.’
그래도 과거엔 1년 정도 미뤄졌던 결혼이 이번 생엔 3년 이상 늦어지게 생겼다.
르네브는 웬디에게 편지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갈 수 있는 사람 먼저 가는 게 좋다고 말이다.
이후에도 앰버가 후작저 및 파라디움 제국의 상황에 대해 이런저런 소식들을 알려 주었다.
르네브는 그 중 1황자의 병세에 대해 주목했다.
“키어넨, 말을 많이 해서 그런지 목이 좀 까끌거리네요. 차를 부탁해도 될까요?”
“물론이죠. 꿀을 넣은 꽃차를 준비해 올게요.”
냉큼 대답한 키어넨이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키어넨을 어느 정도 신뢰하고 있기는 하나 그녀는 바슈케르의 사람이었다.
물론 1황자가 죽으면 바슈케르에까지 소문이 퍼지는 건 금방일 것이다.
하지만 굳이 키어넨에게까지 파라디움의 중요한 일을 알릴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앰버, 1황자 전하의 병세는 어떻다고 해?”
르네브가 목소리를 줄이자, 눈치 빠른 앰버도 소리 죽여 대답했다.
“많이 야위신 데다, 간혹 허공을 보시면서 헛소리를 하실 때도 있다고 해요.”
“그렇구나.”
세이렌 후작이 최근 수도에 위치한 후작저에 머무는 만큼, 앰버에게도 1황자에 관한 소문이 들려왔을 것이다.
앰버가 고위 귀족가의 하녀이니 소문에 민감하다고는 하나, 르네브의 생각 이상으로 1황자의 병세가 깊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쉬쉬하는 분위기이긴 한데, 이미 가망이 없다고 보는 모양이에요.”
앰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르네브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로 생각했다.
‘이번에도 원인은 슈트루델이려나.’
슈트루델은 평민들이 즐겨 먹는 페이스트리였는데, 시찰을 나간 곳에서 우연히 입에 댄 이후 1황자는 슈트루델을 즐겨 먹었다.
1황자는 특히 속에 과일이나 고기를 채워 넣는 것보다 오피움 씨를 채워 넣은 몬슈트루델을 좋아했다.
오피움 씨는 바삭하고 달콤해서 빵에 넣어 먹으면 식감을 배가시켜 준다.
하지만 문제는 오피움의 중독성에 있었다.
‘형님께서 좋아하시던 몬슈트루델이군요.’
1황자가 원인 모를 병으로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황족이 모여 앉은 식사 자리에서 누군가가 했던 말이었다.
‘1황자는 오피움 중독으로 죽은 게 아닐까.’
몬슈트루델의 위험성에 대해 알고 있던 르네브는 그렇게 추측했었다.
이미 그는 죽고 난 뒤였으니 알았다고 한들 손쓸 방법도 없었지만.
“레이디, 차를 가져왔어요.”
그때 키어넨이 트레이를 들고 응접실로 돌아왔다.
“고마워요, 키어넨.”
달콤한 꽃차로 목을 달랜 르네브는 책상에 앉아 양피지와 깃펜을 들었다.
괜히 끼어들어 좋지 않은 결과를 낳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들을 가져 본 어미의 양심이 황후에게 언질을 주라 다그쳤다.
***
“후우…….”
르네브는 읽고 있던 책을 탁, 소리 나게 덮고는 크게 기지개를 켰다.
허리를 비틀어 뒤를 돌아보자, 창밖 하늘은 어느새 노을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저 멀리 바슈케르의 시가지를 바라보고 있을 때 시종이 찾아왔다.
“폐하께서 저녁을 함께 들자고 하셨습니다.”
마침 이카르에게 드레스 선물에 대한 감사 인사도 전해야겠기에, 르네브는 서둘러 외출 준비를 했다.
이전 다이닝 룸이 대연회장 못지않게 넓었다면, 오늘 식사할 장소는 10인 테이블 정도로 다소 규모가 작았다.
물론 이전의 규모가 상당해서 그렇지, 지금의 다이닝 룸도 넓기는 매한가지였다.
거기다 테이블 한가득 산해진미가 차려져 있었다. 화려한 황궁 식단에 익숙한 르네브조차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였다.
“왜 그러지? 음식이 변변치 않은가?”
그런 르네브의 반응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이카르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었다.
“그럴 리가 있나요. 음식 가짓수가 너무 많아서 뭐부터 먹어야 할지 고민해야 할 정도인걸요.”
“그렇다면 다행이군.”
무릎 위로 냅킨을 펼치는 르네브를 보며 이카르가 시종들을 물렸다.
“이 편이 서로 말을 편하게 할 수 있겠더군.”
고개를 끄덕인 르네브는 차려진 음식들을 쭉 훑어봤다.
그리고 가장 먼저 그린 빈을 접시에 옮겨 담았다.
“육식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모양이지? 지난번에도 채소 위주로 먹었던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한 이카르가 큼지막이 썬 양고기를 입에 쏙 넣었다.
르네브는 지난번 이카르와의 식사 자리에서 자신이 무엇을 먹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카르는 그걸 다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르네브는 그의 기억력이 대단히 뛰어나다는 사실을 머릿속에 입력했다.
“꼭 그렇진 않아요. 생선류도 잘 먹거든요.”
짧게 대답한 르네브가 포크로 그린 빈을 쿡 찍어 올리자, 이카르가 생선 요리 접시를 르네브 쪽으로 밀었다.
“단백질은 꼭 필요한 영양소야, 근육 형성에도 좋고.”
그 말에 르네브의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졌다. 육식 위주의 식사를 하니, 저렇게 근육질의 몸을 갖게 된 거겠지.
르네브는 무심코 지난번 온천에서 본 이카르의 벗은 몸을 떠올려 버렸다.
금세 르네브의 귓불이 붉어지고 뺨이 달아올랐다.
“안이 더운가? 뺨이 붉군.”
그걸 놓치지 않고, 이카르가 물었다.
실내는 덥지도, 그렇다고 춥지도 않은 쾌적한 온도였다. 한마디로 뺨이 붉어진 이유를 온도 탓으로 돌릴 순 없다는 거다.
르네브가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며 변명할 말을 찾는데, 이카르가 조금 목소리를 높였다.
“안이 좀 덥군.”
그러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이 다이닝 룸으로 들어와 창문을 열고는 빠르게 물러났다.
파라디움과 달리 바슈케르의 밤낮은 온도 차가 컸다. 열어 놓은 창문으로 저녁 찬바람이 스며들었다.
그 덕에 약간 붉어졌던 르네브의 뺨도 금세 원래의 색을 되찾았다.
“이젠 괜찮은가?”
“네, 덕분에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짧게 감사 인사를 한 르네브는 그린 빈을 입에 쏙 넣었다. 앙다문 입을 우물거리던 르네브의 눈이 조금 커졌다.
염도가 딱 알맞은 데다가, 흐물거리지 않고 아삭한 식감이 일품이었다.
“와, 이거 정말 맛있어요!”
“다행이군. 파라디움에서 이름난 요리사를 데려온 보람이 있어.”
이카르의 대답에 르네브는 문득 궁금해졌다.
이렇게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그가 어째서 이전 생에는 결혼하지 않았는지.
“폐하께는 아직 약혼자가 없으신가요?”
레드 와인을 들이켜던 이카르가 작게 헛기침했다.
“괜찮으세요?”
그가 마시던 것이 물은 아니지만, 어쨌든 액체로 사레들리면 답도 없지 않나.
르네브는 빠르게 냅킨을 집어 이카르에게 건넸다. 냅킨을 받아 든 이카르가 입가를 쓱 닦으며 말했다.
“그건 왜 묻지?”
황제에겐 무엇보다 후계가 중요하다.
그 때문에 루시우스가 황후인 르네브 외에도 정부를 들였을 만큼이나.
과거가 떠오르자, 먹은 음식이 명치에 걸릴 것 같았다. 르네브는 불쾌한 기분을 얼른 떨쳐 내며 말했다.
“그냥 조금 궁금했어요. 보통 황족의 혼인은 이른 편이니까요.”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이카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전략적으로 걸맞은 상대를 찾지 못했을 뿐, 다른 이유는 없어.”
전략적으로 걸맞은 상대라…….
“폐하께서 말씀하시는 그 상대의 조건이 뭔데요?”
“궁금한가?”
테이블에 턱을 괸 이카르가 나른한 표정으로 르네브를 쳐다봤다.
별생각 없이 물어본 것뿐인데. 저리 나오시니, 궁금하지 않다고 빼기도 뭐한 상황이 돼 버렸다.
“네. 궁금해요.”
르네브는 짧게 대답하고는 구운 가지를 입에 넣었다.
“바슈케르 제국이 영토 확장 중인 건 영애도 알고 있겠지?”
르네브는 대답을 보류했다.
질문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한 뒤 대답하는 것이 오랜 습관으로 자리 잡아서였다.
조금만 허점을 보여도 그 틈을 파고드는 귀족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 황후가 되고부터는 자연스럽게 갖춘 태도였다.
“대답하지 않아도 좋아.”
이카르가 잔에 남은 레드 와인을 전부 털어 넣고는 말을 이었다.
“영토 확장 중이라는 건 항시 전시 태세라는 뜻이기도 하지.”
르네브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이카르가 설명을 덧붙였다.
“뭐 그렇다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남편을 오매불망 기다릴 부인이 불쌍해서라거나 그런 이유는 아니야.”
르네브도 동의했다.
그녀 앞에서는 살짝 풀어진 모습을 보일 때도 있지만, 과거에도 지금도 이카르가 냉철한 군주라는 사실은 똑같았으니까.
생각에 잠긴 르네브의 앞으로 이번에는 큼지막한 칠면조 요리가 놓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르네브에게 깨달음이 찾아왔다.
‘전략적으로 걸맞은 조건.’
루시우스에게 그 조건에 부합하는 존재는 바로 자신이었다.
군사력이 있으며, 봉신 가문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는 세이렌 후작가의 힘이 필요했기에, 루시우스는 르네브와 결혼했던 거였다.
‘사랑한다더니……. 루시우스 이 나쁜 놈.’
뒤늦게 진실을 깨달은 르네브가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벌써 식사를 마친 건가?”
식사를 멈추고 어두운 기색인 르네브를 보며 이카르가 물었다.
르네브는 빈손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이려 했다.
그러자 이카르의 미간이 좁아졌다.
“체중 조절이라도 할 셈인가?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는 않군. 영애는 잘 먹고 체력을 키울 필요가 있어.”
르네브 앞으로 송아지 스테이크 접시를 내려놓은 이카르가 덧붙였다.
“지난번처럼 픽픽 쓰러져서 또 나를 곤란하게 할 셈인가?”
“……폐하의 말씀대로 조금 더 단백질 보충을 하는 편이 좋겠네요.”
빠르게 감정을 정리한 르네브는 송아지 스테이크를 썰어 입에 넣고 전투적으로 씹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이카르의 입꼬리 끝이 살짝 올라갔다.
매우 흡족해 보이는 그의 얼굴을 흘끗 본 르네브는 큼지막한 양상추 샐러드도 입에 욱여넣었다.
다소 격식에 어긋나는 식사 매너라 볼 수 있었다.
“토끼 같군.”
하지만 이카르는 그저 테이블에 턱을 괸 채로 흐뭇하게 르네브를 바라보며 툭 내뱉었다.
“세상에 이렇게 큰 토끼가…….”
어디 있냐고 말하려던 르네브는 곧 입을 다물었다. 이전에 동굴에서 이카르가 언급했던 자이언트 토끼가 떠오른 것이다.
르네브는 한쪽 뺨을 부풀린 채로 입을 우물거렸다. 그러자 이카르가 작게 큭큭거렸다.
놀리려 한 게 분명하다 생각한 그녀는 가늘어진 눈으로 이카르를 흘겼다.
그러고는 전투적으로 음식을 씹어 삼켰다.
“잘 먹으니, 보기 좋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