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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뒤쫓아온 세이렌 부자 (17/148)


#17화 뒤쫓아온 세이렌 부자
2023.04.17.


르네브가 주인공들의 사랑을 방해하는 걸림돌 역을 맡았다면, 이카르는 루시우스를 성장시키는 발판으로 쓰였다.

황비는 루시우스를 황위에 올려 자신이 큰 권력을 누리려는 야망을 품었다.

그러려면 황제의 눈에 찰 정도로 루시우스의 능력이 다른 황자보다 월등히 뛰어나야 했다.

다행히 루시우스는 황비의 바람대로 자랐다. 파라디움에 루시우스의 적수가 없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런 아들이 황비에겐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느껴졌던 걸까?

황비는 바슈케르의 황자, 이카르를 루시우스의 다음 비교 대상으로 삼았다.

매우 좋지 않은 교육 방식임에는 틀림이 없었으나, 황비가 루시우스의 성정을 잘 파악했던 것 같다.

자존심 강한 루시우스는 황비의 의도대로 이카르를 견제하며 매일 자신을 갈고닦았다.

그렇게 노력이 습관으로 자리 잡았을 즈음, 이카르는 성인이 되지 못하고 죽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카르는 르네브가 첫 번째 삶을 살았을 때에도, 회귀한 후에도 멀쩡히 살아 있는 걸까?

그 외에도 의문은 또 있었다.

사실 바슈케르의 입장에서 파라디움의 서부는 전략적 요충지에 해당했다.

만약 이카르에게 파라디움을 장악할 목적이 있었다면 서부의 세이렌 후작령을 가장 먼저 침범했을 것이다.

세이렌 후작령을 근거지 삼아 영토 확장에 나섰다면 조금 더 수월했을 테니까.

말로 달리면 보름 거리를 순식간에 이동하는 바슈케르와 파라디움이 정면으로 붙었다면 승기를 누가 잡았을지는 불 보듯 뻔했다.

물론 이카르가 그렇게 하지 않았던 덕에 르네브가 더 오래 살 수 있었던 거지만.

르네브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맞은편에서 누군가가 걸어왔다.

“키어넨, 저분은 누구신가요?”

“아실리 백작가의 영애십니다.”

키어넨이 거기까지 말했을 때 아실리 백작 영애와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아실리 백작 영애가 먼저 무릎을 살짝 굽혀 르네브에게 인사해 왔다.

“화원에 머물기로 하셨다는 ‘그분’이시겠군요?”

그분?

정확하게 어떤 의미로 하는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상대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르네브도 살짝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귀빈실의 공사가 늦어지는 동안 화원에서 머물게 됐어요.”

관찰이라도 하듯 르네브를 빤히 보던 아실리 백작 영애가 말했다.

“외국 분이시니 아마도 이곳 실정을 잘 모르실 것 같아서, 한 말씀 드릴게요. 화원이 어떤 곳인지.”

“…….”

“대대로 화원은 황제 폐하의 정부들이 머물렀던 곳이거든요.”

정보를 주려는 건지, 텃세를 부리려는 건지. 그녀의 의도가 정확히 보이지는 않았으나, 르네브는 여상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머무르고 있는 화원이 이전에 어떻게 쓰였는지는 알고 있어요.”

“알고, 계셨어요?”

르네브의 대답에 아실리 백작 영애의 표정이 조금 미묘해졌다.

“네. 하지만 지금의 황제 폐하께선 따로 정부를 두지 않으셨다고 들었어요. 따라서 화원은 전과 같은 기능을 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겠죠.”

르네브는 부러 단호하게 말했다. 아실리 백작 영애가 어설픈 오해를 하지 않기를 바라며.

“알고 계셨다니 다행이네요. 괜한 오해를 하시진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 말씀드렸어요. 그럼, 또 뵐 때까지 평안하시길.”

말을 마친 아실리 백작 영애가 어딘지 후련해 보이는 표정으로 르네브를 스쳐 지나갔다.

르네브는 잠시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하다 키어넨에게 물었다.

“혹시 아실리 백작가와 황제 폐하 사이에 혼담이라도 오가는 중인가요?”

“레이디, 송구하지만 그렇게 중요한 사항에 대해선 잘 모르겠어요…….”

키어넨이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붕붕 저었다.

그렇지만 젊은 황제와의 혼담을 바라는 가문이 많을 거라는 것쯤은 충분히 예측 가능해졌다.

귀족의 혼인은 이른 편에 속했다.

그리고 황족의 결혼은 그보다도 빨랐다.

이전 생에서 르네브가 16세, 루시우스가 18세에 결혼한 것도 늦은 편에 속했으니.

“키어넨, 폐하께서 올해로 20세가 되시는 게 맞나요?”

“네.”

황제로 등극하고 몇 해 되지 않아 정무가 바쁘다고는 하지만, 이카르의 결혼은 확실히 늦은 상황이었다.

“그렇군요.”

르네브가 턱을 감아쥐고 고개를 끄덕이는데, 젊은 시종이 다가와 꾸벅 허리를 숙였다.

“레이디를 찾아온 손님이 계십니다.”

***

곧바로 화원에 돌아온 르네브의 입이 떡 벌어졌다.

르네브 혼자 앉기에는 넉넉하고도 충분히 여유가 돌던 소파에 건장한 두 남자가 꾸역꾸역 앉아 있으니 상당히 비좁아 보였다.

“딸아!”

“르네브!”

세이렌가의 두 남자가 르네브를 보자마자 우렁차게 소리쳤다.

르네브는 얼른 양손으로 귀를 막았다.

잔소리 폭격이 시작될 것이란 예상과 달리 세이렌가의 두 남자는 표정만 험악할 뿐 입은 꾹 다물고 있었다.

하지만 르네브가 귓가에서 슬쩍 손을 떼어 내기 무섭게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렸다.

“어쩜 이리도 매정할 수 있는 거냐!”

“말도 없이 떠나 버리다니, 제정신이야?”

키어넨이 두 사람의 기세에 겁을 먹고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후우…….”

르네브는 키어넨을 내보낸 뒤에, 한참 가족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만약 어머니께서 살아 계셨다면 등짝을 수차례 맞았을 것 같았다.

“이제 좀 진정이 되셨어요?”

두 사람의 목소리가 처음보다 확연히 차분해졌을 무렵에야 르네브는 입을 뗐다.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의 두 남자에게 르네브는 이곳의 쾌적함을 한차례 늘어놓았다.

“정말이라니까요. 보세요. 다친 곳도 전혀 없고, 오히려 이전보다 건강해진 느낌마저 들어요.”

세이렌 후작과 패트릭은 그제야 힐끗 응접실 내부를 훑었다.

“확실히, 냉대하는 것 같지는 않긴 한데……. 흠.”

그러면서 패트릭이 가까이 있는 장식품을 만지작거렸다.

믿기지 않겠지만, 그거 전부 보석이라고 덧붙이려다 르네브는 다른 말을 꺼냈다.

“두 분 모두 여기에 계시면, 서부 후작령은요?”

르네브의 물음에 세이렌 후작이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 모습을 힐끔 보며 패트릭이 대답했다.

“바슈케르 쪽에서 서부 국경으로는 얼씬도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보내 왔어. 네가 여기 있는 3년 동안은 말이야.”

순간 과거의 기억 한 부분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파라디움의 황위를 두고 내분이 극에 달했을 때가 바로 이맘때였다.

바슈케르의 압박이 없었을 때.

그리고 1황녀가 파라디움으로 귀국할 무렵에는 루시우스가 황위에 오르며 상황이 종결됐었다.

“지금 황궁 상황은 어때요?”

르네브의 물음에 세이렌 후작의 눈이 조금 커졌다.

회귀 전의 르네브가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분야였으니, 놀랄 만도 했다.

르네브는 얼른 말을 덧붙였다.

“이번 일로 황후 폐하와 황비 전하 사이의 불화가 커지는 건 아닐지 조금 걱정이 돼서요.”

르네브가 배시시 웃자,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세이렌 후작이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1황자 전하께서 병으로 앓아누우시는 바람에 황후 폐하의 심려가 아주 크시단다.”

이번에는 르네브의 눈이 커졌다.

이전 생에도 1황자는 병으로 죽었다.

하지만 지금보다는 조금 더 먼 미래에 일어나야 할 일이었다.

르네브가 시선을 떨어뜨리고 생각에 잠기자, 패트릭이 조심스레 입을 뗐다.

“르네브. 너 괜찮은 거야?”

“응? 그럼. 그건 그렇고, 바슈케르의 황제 폐하께서 오빠와 아버지의 입국을 허락하실 줄은 예상 못 했네.”

르네브의 물음에 세이렌가의 두 남자가 시선을 교환했다.

“하……, 이걸 르네브 너한테 말해도 될지…….”

패트릭이 거기까지 말했을 때 세이렌 후작이 끼어들었다.

“르네브, 오늘이라도 당장 세이렌 후작령으로 돌아가자꾸나.”

“네?”

세이렌 후작의 터무니없는 제안에 당황했지만, 르네브는 침착하게 설득을 시도했다.

“아버지. 황제 폐하께서는 자신이 뱉은 말을 꼭 지키는 분이세요. 3년 후에는 무사히 고국 땅을 밟을 수 있게 해 준다고 제게 약속하셨어요.”

“…….”

“전 잘 지내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아버지.”

르네브가 옅게 미소 지으며 말했으나, 세이렌가의 두 남자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르네브는 화제를 전환하기 위해 말을 돌렸다.

“그건 그렇고, 아버지. 패트릭에게는 아직 약혼자가 없잖아요.”

갑작스럽게 들어온 공격에 패트릭이 펄쩍 뛰었다.

“가, 갑자기 무슨 소리야! 르네브. 약혼자라니.”

“르네브의 말이 맞다. 패트릭 너도 슬슬 결혼할 나이가 돼 버렸구나.”

패트릭의 약혼 문제로 조금 더 대화를 나누고 난 뒤에야,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이 생기거든. 언제든 서신을 보내거라. 네 뒤엔 항상 세이렌 후작가가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그래. 르네브, 네가 여기 있고 싶지 않다고 한마디만 하면, 언제든 데리러 올 테니까.”

“고마워요. 아버지, 패트릭.”

진심으로 제 걱정을 해 주는 가족들 때문에 괜스레 가슴 한구석이 아려 왔다.

르네브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인 세이렌 후작이 이제 생각났다는 듯이 덧붙였다.

“아 참, 르네브. 앰버가 따라왔단다.”

“앰버가요?”

르네브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앰버는 세이렌 후작저에서 르네브를 모시던 하녀로, 그녀에게는 돌봐야 할 어린 동생과 아픈 어머니가 계셨다.

그래서 먼 곳까지 데려오지 않았던 거였는데.

제 이름을 부르는 걸 들었는지, 옆 방에서 달려 나온 앰버가 르네브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아가씨! 말씀도 없이 그냥 가 버리셔서, 얼마나 서운했는지 몰라요. 세상에, 아가씨! 손목 좀 보세요, 바싹 마른 장작 같잖아요…….”

앰버가 르네브의 손을 꼭 붙잡고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레이디께 바싹 마른 장작이라니, 말이 좀 심하신 것 아닌가요?”

키어넨이 옆에서 앰버를 흘겨보며 구시렁거렸지만, 앰버는 전혀 관심 없는 눈치였다.

앰버가 없는 동안 르네브를 곁에서 모신 사람이 키어넨이니, 아가씨를 잘 모시지 못했다는 핀잔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앰버의 잔소리가 르네브를 향한 걱정에서 우러나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인지 키어넨 또한 큰소리는 내지 않았다.

“충분히 잘 먹고 있어.”

“그래도 그렇지…….”

자신은 무척 잘 지냈다며 르네브가 몇 마디 했으나, 앰버의 눈에는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르네브는 그런 앰버가 조금 귀찮았지만, 싫지는 않았다.

앰버는 정이 많은 아이였다.

르네브보다 나이는 조금 어렸지만, 아픈 어머니와 어린 동생을 돌보며 가장 역할을 해 와서 그런지 나이에 비해 일찍이 철이 들었다.

그 때문인지 앰버에게 마음이 쓰였다.

르네브는 사람의 성격은 태생적인 부분도 있지만, 환경에 의해 많이 좌지우지한다고 믿었다.

나이에 비해 의젓하고, 어른스러운 앰버를 보자 자연스럽게 카엘이 떠올랐다.

르네브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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