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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르네브의 취향 (16/148)


#16화 르네브의 취향
2023.04.16.


이카르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긴장감이 밀려들었지만 르네브는 태연히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며 여상히 말했다.

“소문으로 바슈케르의 황제 폐하께서는 흑요석처럼 검은 머리에 붉은 눈을 가지고 계신다 들었습니다.”

“…….”

“그리고 드한 경은 금발에 녹안이시라고 들었죠.”

르네브의 보폭에 맞춰 걸으며 이카르가 물었다.

“그게 내가 황제임을 알아본 단서의 전부인가?”

“더 있습니다.”

이카르가 말해 보라는 듯 눈짓했다.

“소문에 의하면 드한 경은 가녀린 체격의 미소년 같은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폐하께서는?”

르네브는 이카르의 단단한 팔을 바라보며 말했다.

“체격이 아주 건장하시죠. 웬만한 기사는 상대도 안 될 정도로요.”

“파라디움까지 그런 소문이 난 줄은 몰랐군.”

이카르가 조금 심각한 표정으로 낮게 읊조렸다.

물론 파라디움에 그런 세세한 소문 따위는 돌지 않는다. 그저 르네브가 회귀 전 둘의 실물을 봤기 때문에 알고 있을 뿐.

자신이 회귀했다는 말을 해 봐야 머리에 꽃을 단 사람 취급을 받을 게 분명했으므로 르네브로선 이게 최선의 대답이었다.

“그리고 아실진 모르겠지만, 두 분 모두 대단한 미남이라는 소문도 돌고 있답니다.”

이건 사실이었다.

건국제에 그가 깜짝 등장한 이후 파라디움 사교계엔 한동안 이카르의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두 분 모두?”

그러나 이카르는 다소 엉뚱한 부분에 꽂힌 것 같았다. 르네브는 얼른 태세 전환에 나섰다.

“물론. 특히! 황제 폐하의 외모가 압도적으로 아름답다고 입을 모으더군요.”

“그렇다면, 그대의 취향은 어느 쪽이지?”

“제 취향이요?”

“그래. 비리비리한 미소년 쪽인지, 아니면 기사보다 건장한 쪽인지.”

르네브는 퍽 난감해졌다.

며칠 함께 지내면서 이카르를 파악하려 애썼으나, 그는 도통 종잡을 수 없는 타입에 가까웠다.

행동이나 말에는 일관성이 있었지만, 이따금 의외성을 띄었다.

그래서 지금 어떤 말을 해야 이 위기를 잘 모면할 수 있을지 르네브는 고민했다.

“바로 대답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그대의 취향은 비리비리한 쪽에 가까운 모양이군.”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던 르네브는 이카르와 시선이 맞자마자 흠칫 놀랐다.

그의 눈은 살짝 휘어져 있었고, 입꼬리 역시 살짝 올라가 있었다.

하지만 상당히 불쾌한 오라를 뿜어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검을 뽑을 듯 흉흉한 기세였다.

르네브는 얼른 입을 열었다.

“제 취향이 그리 중요한 건 아니겠지만, 역시 건장한 쪽이 제 취향에 가깝겠네요.”

이건 사실이었다.

루시우스가 검을 익히기는 했지만, 집무실에서 서류 작업을 할 때가 많아서 그런지 근육질의 몸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이카르와 비교하면 비리비리 한 쪽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건 르네브에게 제 취향이 매끈하고 늘씬한 미남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는 계기가 됐었다.

“허여멀건 겉보기와 달리 드한도 힘이 꽤 센 편이지.”

그제야 이카르가 흥미로운 눈으로 물었다.

“또…… 햇볕에 그을린 건강미 넘치는 피부도 멋있다고 생각해요.”

이카르가 더욱더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호오, 나처럼 말인가?”

“물론이죠, 폐하처럼요.”

르네브가 힘겹게 한 자씩 뱉었다.

마침내 이카르의 얼굴에 만연한 미소가 깃들었다. 칭찬은 드래곤도 훌라 춤을 추게 한다는 말이 딱 맞아떨어지는 순간이었다.

***

갑자기 심기 불편해진 그를 다독이느라 르네브가 진땀을 뺐다는 사실을 모르기에, 이카르의 기분은 한결 나아진 상태였다.

“폐하, 집무실로 가십니까?”

복도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드한이 물었다.

“그렇지.”

“마침 보고드릴 것이 있었는데, 잘 됐습니다. 지난번에 말씀하신…….”

서류를 내려다보던 드한이 갑자기 고개를 쳐들었다.

왜냐면, 이카르가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주군을 모신지 어언 십여 년이 넘은 드한조차 이처럼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이카르는 처음 봤다.

“……폐하?”

“뭐지?”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기분 좋은 일?”

태연하게 집무실로 걸음을 옮기던 이카르의 입꼬리 끝이 살짝 말려 올라갔다.

드한은 바짝 긴장했다. 저 표정을 보고 난 뒤에는 항상 곤란한 일이 생겼으므로.

“생각해 보니 있었군.”

“무엇입니까? 기분 좋은 일이라는 것이.”

“굳이 말하지 않으려 했지만, 드한 네가 궁금해하는 것 같으니, 친히 말해 주는 것이 도리에 맞겠군.”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리 뜸을 들이는 건가 싶었지만, 드한은 가만히 돌아올 대답을 기다렸다.

“조금 전 산책을 하러 갔다가 대정원에서 세이렌 후작 영애를 만났지.”

“그러셨습니까.”

“영애가 자신의 이성 취향을 알려 주더군.”

드한이 적절한 호응을 곁들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세이렌 후작 영애의 이성 취향 말입니까?”

이카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드한, 궁금한가?”

“예? 뭐, 네. 말씀해 주십시오.”

순간 이카르의 입가에 머물던 웃음기가 싹 가셨다.

처음 르네브의 남성 취향을 들었을 때만 해도 드한에게 똑똑히 알려 줄 생각이었다.

드한과 그녀 사이엔 결코 넘을 수 없는 취향의 벽이 있다고.

그러나 이카르는 곧 마음을 바꿔 먹었다.

‘굳이 알려 줄 필요까진 없겠지.’

쥘베른 자작 성에서 드한을 지그시 바라보던 르네브의 모습이 떠오른 탓이다.

“베인, 늦은 시간까지 고생이 많군.”

집무실 안에서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던 베인이 고개를 들었다.

“늘 있던 일인데요. 오히려 폐하께서 식후에도 집무실을 찾지 않으셔서 허전했습니다.”

베인이 졸음이 내려앉은 눈을 비비며 말했고, 이카르가 책상에 앉아 서류 작업을 시작했다.

“저, 폐하?”

드한이 이카르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제야 이카르는 시선을 들어 드한을 쳐다봤다.

“뭐지?”

“말씀하시다 만 것이 있으십니다만……?”

드한이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베인, 이 서류는 다시 확인해 보는 편이 좋겠군.”

베인이 냉큼 다가와 서류를 들여다봤다.

“아, 수치에 오류가 있었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폐하. 얼른 수정하겠습니다.”

다시 서류로 시선을 내렸던 이카르는 여전히 앞에 우뚝 서 있는 드한을 쳐다봤다.

“드한. 침실로 가서 잘 게 아니라면, 밀린 업무를 보는 게 어떻겠나?”

“……예, 폐하.”

드한이 허망하게 입을 뻐끔거리다, 베인의 옆자리로 가 앉았다.

그렇게 여느 때처럼 황제의 집무실은 새벽까지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

욕실에서 나온 르네브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이게 다, 뭔가요?”

“폐하께서 레이디께 하사하신 물품들입니다.”

침실 안은 못 보던 드레스들로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귀빈에게 아낌없는 지원을 하겠다던 말을 지키려는 모양이었다.

르네브가 심란한 표정으로 드레스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키어넨이 밝게 말했다.

“레이디, 오늘은 어떤 드레스로 하시겠어요?”

모시는 아가씨가 귀한 대접을 받은 게 좋은 모양이었다.

“이게 좋겠네요.”

르네브가 고른 건 연한 푸른색 옷감에 크림색 레이스를 덧댄 퍼프소매 드레스였다.

선택이 끝나자 하녀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방을 가득 메운 드레스 행거를 옆방으로 옮기고, 르네브의 환복을 도왔다.

“정말 잘 어울리세요!”

르네브가 새 드레스로 갈아입고 거울 앞에 서자, 키어넨이 꽉 쥔 주먹을 얼굴께로 모으고는 붕붕 흔들었다.

“고마워요, 키어넨. 앞으로 잘 부탁해요.”

르네브가 살짝 미소 짓자, 키어넨이 뺨을 붉히며 말했다.

“레이디 같은 분을 모실 수 있게 돼서 정말 영광이에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고개를 끄덕인 르네브는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그런데 키어넨, 다른 분들은 어디서 식사하시나요?”

“다이닝 룸에서 드시는 분도 계시고, 개인실에서 드시는 분도 계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럼 오늘 식사는 다이닝 룸에서 들도록 할게요.”

키어넨이 냉큼 침실 문을 열고 말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레이디.”

다이닝 룸으로 들어서자, 이제 막 온 듯 자리에 앉으려는 사람이 보였다.

라이나의 왕녀, 레이첼이었다.

그녀는 르네브가 황후 시절 파라디움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당시 레이첼은 자신이 황후라도 된 양 거만하게 구는 에시카의 면전에 쓴소리를 내뱉은 적도 있었다.

그녀는 당연한 이치를 꼬집었을 뿐이다.

하지만 당시의 파라디움에선 그 당연한 이치를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루시우스는 점점 폭군이 돼 버렸으니까.

그 때문인지 르네브는 레이첼이 친근하게 느껴졌다. 거기다 연령도 비슷해서 그런지 대화도 잘 통했었다.

그런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자, 르네브의 얼굴에 자연스러운 미소가 돌았다.

“아직 식전이시라면 동석해도 괜찮을까요?”

그러자 레이첼의 뒤에 선 하녀가 빠르게 레이첼에게 귀엣말을 건넸다.

“물론이에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갑자기 이루어진 만남에도 레이첼의 붙임성 좋은 성격 때문인지, 식사 내내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서로가 묵고 있는 거처에 대한 이야기와 바슈케르의 문화 같은 것들이 주된 화제로 올랐다.

식사를 마치고 르네브와 레이첼은 황궁 정원으로 자리를 옮겨 티타임을 가졌다.

한참 대화를 나누던 중, 레이첼이 꺼낸 말에 르네브는 흠칫 놀랐다.

“그런데 저희가 이전에도 뵌 적이 있었나요?”

르네브는 찻잔으로 시선을 떨어뜨린 채로 생각했다.

‘왜 저런 질문을 하는 거지? 어쩌면…….’

회귀자가 자신 혼자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시 올라왔지만, 르네브는 이내 그 생각을 떨쳐 냈다.

“오늘 처음 뵙는 것으로 알아요. 왜 그러시는지 여쭤도 될까요?”

“뭐라 설명하긴 어렵지만, 묘하게 익숙한 기분이 들어서요.”

“저도 그래요. 왕녀님과는 대화가 잘 통하는 것 같고요.”

“어머, 저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었군요! 어쩐지 기쁜데요.”

원래 큰 눈을 더 동그랗게 뜨고 레이첼이 기뻐할 때였다. 하녀가 다가와 그녀에게 속삭였다.

“……알겠어. 곧 간다고 전해 드리렴.”

“예, 왕녀님.”

난처한 표정으로 레이첼이 말했다.

“이걸 어쩌죠. 라이나에서 손님이 찾아온 모양이에요.”

“아, 제 걱정은 마시고, 먼저 일어나세요.”

“죄송해요. 영애. 또 뵐게요.”

레이첼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비어 버린 찻잔을 내려다본 르네브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햇살이 따사로웠다. 황궁 정원을 조금 걸으면 딱 좋을 것 같았다.

천천히 걸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이어 나가던 끝에 르네브는 한 가지 의문에 집중했다.

원작은 루시우스와 에시카가 역경을 헤치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뒤에 끝났다.

하지만 회귀 전에도, 회귀 후에도 르네브가 보인 다른 행보 때문인지 원작과 다른 상황이 벌어졌다.

분명 원작의 이카르는 어린 나이에 죽는 엑스트라 조연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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