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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그대들이 보기에는 어떠한가? (15/148)


#15화 그대들이 보기에는 어떠한가?
2023.04.15.


르네브의 말에 당황한 듯 눈을 깜빡이던 키어넨의 뺨이 조금 붉어졌다.

“아, 그건……. 레이디께서 저를 원하시면 그렇게 되겠죠?”

르네브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폐하께는 제가 말씀드릴게요.”

“귀한 분을 모시게 되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레이디.”

키어넨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황궁에서 일하는 것 자체가 평민에게는 엄청난 기회였다.

그리고 어떤 분을 모시는지 또한 매우 중요했다. 모시는 분의 권력이 곧 하녀의 권력이 되니까.

“키어넨, 말을 전하고 나서 시간이 괜찮다면 말 상대를 해 줄 수 있나요?”

“무, 물론입니다! 레이디.”

예정된 이카르와의 식사 전까지 르네브는 키어넨과 티타임을 가졌다.

주로 현재 바슈케르 황궁 안의 실세는 누구인가, 같은 것이 주제로 올랐다.

오랜 기간 황후의 자리를 지켜 온 만큼 황궁에서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지 르네브는 잘 알았다.

그리고 지금에 안주하고 정보에 뒤처진 결과가 어떠한지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

다이닝 룸에 도착한 르네브는 기품 없이 입을 떡 벌리지 않게 단단히 주의해야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제국의 황후로서 온갖 귀한 것들을 많이 접해 온 르네브의 안목에도 다이닝 룸 안은 보기 드문 고가품들로 넘쳐 났다.

‘바슈케르의 국고가 차고 넘친다는 말이 사실이었구나.’

수십 명은 앉아도 될 만한 너른 테이블을 황금으로 두른 것은 물론이거니와,

‘……저거, 앙헬의 국보 아냐?’

르네브의 시선이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운 그림으로 향했다.

앙헬은 이미 한참이나 전에 멸망해 버린 나라였지만, 과거의 명성 때문인지 앙헬의 예술품을 수집하는 취미를 가진 황족이 꽤 있었다.

가까이에는 루시우스가 있었다.

한번은 루시우스가 앙헬의 명화를 사들인 적이 있었는데, 그 금액이 상상을 초월했다.

“폐하께서도 곧 도착하실 겁니다.”

예술품들을 감상하는 르네브에게 시종이 말했다.

“괜찮아요. 조금 기다리는 정도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그녀가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이르게 도착한 것이기에, 르네브는 다이닝 룸 내부를 찬찬히 구경했다.

장식된 색색의 보석들이 영롱한 빛을 뿜으며 홀 이곳저곳을 비췄다.

이제는 값비싼 보석들이 바닥을 굴러다니는 돌멩이로 보일 지경이었다.

‘그나저나, 어떤 얼굴을 하려나.’

바슈케르로 오는 내내 드한이라 자신을 소개한 이카르였다. 물론 그라면 얼마든지 구차하지 않은 변명을 만들어 낼 것 같다만.

르네브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다이닝 룸으로 이카르가 걸어 들어왔다.

“……!”

여행길에서와 달리 이카르는 완벽해 보였다.

검푸른 제복은 주름 하나 없이 빳빳했고, 곱게 넘긴 머리카락 때문에 그의 반듯한 이목구비가 훨씬 잘 드러났다.

이전에도 놀랍도록 잘생겼다고 생각했지만, 저리 꾸며 놓으니 확실히 눈이 부셨다.

르네브는 위풍당당하게 걸어 들어오는 이카르를 넋 놓고 바라보다 곧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이렌의 르네브. 바슈케르의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예를 갖춰 인사하자, 이카르의 한쪽 눈썹이 비죽 솟았다.

르네브는 그런 이카르를 힐끔 보고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눈을 빤히 쳐다보는 걸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황제도 있으니까.

이카르가 상석에 앉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자, 묘하게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앉지.”

“네, 폐하.”

태연하게 자리에 앉아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르네브를 보자, 이카르의 마음이 복잡해졌다.

르네브와 저녁 약속을 잡고, 이카르는 평소보다 오래 거울 앞에 머물렀다.

그 결과 한참 이카르의 머리를 매만지던 시종이 말했다.

“폐하, 다 됐습니다.”

“그대들이 보기에는 어떠한가?”

“평소에도 그랬지만, 오늘따라 폐하의 미모가 더욱더 빛을 발하십니다. 제 눈이 멀 것 같습니다.”

시종이 태양을 피하려는 것처럼 손차양을 만들며 너스레를 떨었다.

교차 검증을 위해 이카르는 의복 담당을 쳐다봤다.

“20년 경력의 제 안목으로 말씀드리관데, 무척 잘 어울리십니다. 어떤 색도 잘 받으시지만, 특히 이 검푸른 옷감이 폐하의 검은 머리와 찰떡입니다.”

“맞습니다. 맞습니다!”

시종들이 간신배처럼 고개를 주억거리며 연신 칭찬을 쏟아 냈다.

그 모습을 줄곧 지켜보고 있던 베인이 끼어들었다.

“폐하, 제가 잊어버린 듯하여 여쭤봅니다만, 오늘 황궁에서 무도회가 있습니까?”

이카르는 거울 속 제 모습을 점검하며 즉답했다.

“아니.”

“그럼 왜 평소답지 않게 외모를 가꾸는 데 열성이십니까?”

베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시종이 다가와 말했다.

“폐하. 세이렌 후작 영애께서 다이닝 룸으로 향하셨다고 합니다.”

“알겠다.”

이카르는 바로 몸을 돌려 복도로 걸음을 옮겼다. 장신인 덕에 원체 걸음이 빠른 이카르였지만, 오늘따라 걸음에 속도가 붙었다.

때마침 이쪽으로 걸어오던 드한에게 베인이 물었다.

“너는 그 레이디를 직접 뵀지?”

드한이 고개를 끄덕이자, 베인이 다시 물었다.

“예쁘시냐?”

“비켜.”

드한이 귀찮다는 듯 베인을 지나치려 했다.

“내가 물었잖아.”

“몰라 이 새끼야, 궁금하면 직접 가든가.”

무심코 그렇게 말했던 드한이 눈을 번쩍 뜨고는 외쳤다.

“아니야! 절대, 가지 마!”

그럼에도 베인이 드한의 팔을 잡아끌며 졸라댔다.

“같이 가자.”

“거기 가지 않는 편이 좋을 거야. 지금 가면 상당히 곤란해지거든.”

서로의 이름이 얽히고 얽힌 지금, 4자 대면은 결코 옳은 선택이 아니었다.

“누가?”

드한은 베인의 말을 무시하고 집무실로 향했다.

그리고 베인이 그 뒤를 귀찮게 따라붙었다.

“누가 곤란해진다는 건데. 어?”

***

이카르는 식사 내내 르네브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물론 자주 쳐다보면 티가 나니, 어쩌다 한 번 쳐다보는 것에 그쳤다.

“식사는 입에 맞았소?”

지금의 르네브는 파라디움에서 온 귀빈이며 평화의 상징이었다. 해서 이카르는 그녀에게 최대한의 예우를 갖추고 있었다.

“아주 만족스러웠습니다. 다시 한번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폐하.”

르네브가 미소를 머금은 채로 형식적인 인사를 건넸다.

우아한 귀부인의 표본이라 할 만큼 식사 예절에도 부족함이 없었다.

조금쯤은 놀라는 기색이라도 보여야 할 게 아닌가.

그녀에게서 마치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을 대하듯 눈에 보이지 않는 벽이 느껴졌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공식적인 식사 자리인 만큼 다이닝 룸에는 르네브와 이카르, 단둘뿐이 아니었다. 시종장과 시종 여럿이 함께였다.

첫날 황제가 귀빈에게 보이는 태도는 앞으로 황궁 안에서 그녀의 지위에 영향을 미친다.

황제가 홀대하면 중요하지 않은 손님으로 치부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카르는 르네브를 극진히 대접했다.

“이미 이야기를 들었겠지만, 공사에 차질이 생겨 당분간 임시 거처에 머물러 줘야겠소. 공사를 마치는 즉시 거처를 옮길 수 있도록 조치하겠소.”

“지금 지내는 곳도 무척 쾌적하니, 서두르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르네브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이카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영애는…….”

눈을 깜빡이는 르네브를 잠시 응시하던 이카르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 말씀하시오. 유학 기간 동안, 바슈케르는 그대에게 아낌없는 지원을 할 예정이니.”

“감사합니다. 폐하. 그리고 한 가지 여쭐 것이 있습니다.”

“말해 보시오.”

“폐하께서 어떤 물건을 제게 건네주라고 심부름을 시킨 하녀 말입니다.”

“그자가 왜?”

그제야 키어넨에 대한 경계를 한층 누그러뜨린 르네브는 보다 확실히 하기 위해 한마디 덧붙였다.

“보내 주신 연고는 잘 받았습니다. 덕분에 근육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요. 세심한 배려 감사합니다.”

르네브가 눈을 접어 웃자, 이카르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대에게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군.”

“편의를 봐주신다고 하셨으니,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폐하의 심부름을 맡았던 그 하녀를 제 전담 하녀로 삼아도 괜찮을까요?”

“그대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감사합니다.”

르네브는 그 말을 끝으로 무릎의 냅킨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이제 식사를 끝내겠다는 의미로.

“차후에 불편한 것이 있거든 언제든 이야기하시오. 그대는 중요한 손님이니.”

이카르 또한 테이블 위에 냅킨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사를 마치고 자연스럽게 집무실로 향하던 이카르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동시에 그의 뒤를 따르던 시종들의 걸음도 멎었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오늘은 이만 침소에 들 것이니, 그만 물러가도 좋아.”

“예, 폐하. 편안한 밤 되십시오.”

시종들을 물리고 이카르가 향한 곳은 침실이 아니었다.

황궁을 기점으로 정원은 네 갈래로 나뉘었는데, 이카르는 그때그때 마음이 내키는 곳을 걸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오늘 그가 향한 곳은 황궁 북쪽에 위치한 대정원이었다.

‘뭐지 이 찜찜함은?’

이카르는 불쾌한 기분의 원인을 찾고자 했다. 그렇게 얼마쯤 더 걸었을 때, 은발을 살랑이며 걸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마주할 수 있었다.

***

대정원을 거닐며 르네브는 키어넨과 담소를 나눴다.

“그럼 화원에는 저 외에 귀빈 두 분이 더 계시는 거군요.”

“네, 며칠 있으면 솔티의 왕녀님께서 도착하실 겁니다.”

걸음을 옮기며 르네브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표정은 온화했고, 걸음 속도는 늦다고도 빠르다고도 할 수 없이 여유가 느껴졌다. 하지만 머릿속은 바쁘게 돌아갔다.

‘이때부터 착실히 힘을 키우고 있었구나…….’

회귀 전에도 이카르는 주변국들을 대거 흡수했었다. 몇몇 제국을 빼면 전부 그에 손에 들어갔다 해도 무방했다.

하지만 그건 한참 후의 미래에 있을 일이었다.

“그럼 다른 귀빈들과 만나서 대화를 나눠 볼 기회도 있겠죠?”

“레이디께서 원하신다면 티 파티를 열어도 좋다고 폐하께서 허락하셨습니다.”

“티 파티라, 그것도 괜찮겠네요.”

르네브가 살짝 손바닥을 맞부딪혔을 때였다.

“산책 중이었나 보군.”

머리 위로 묵직한 저음이 울렸다.

상대의 정체를 먼저 파악한 키어넨이 한 발 뒤로 물러나 깊이 허리를 숙였다.

르네브 또한 살짝 무릎을 굽혀 이카르에게 인사했다.

“폐하께서도 산책을 나오셨나요?”

“그런 셈이지.”

뒷짐을 지고 선 이카르가 키어넨에게 물러나라는 듯 손짓했다.

꾸벅 허리를 숙인 키어넨이 황급히 멀어지자 이카르가 돌연 태도를 바꿨다.

“언제부터였지?”

뼈까지 싹싹 발라먹을 듯한 그의 시선에 르네브의 어깨가 살짝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겁먹었다는 티를 내고 싶지 않았기에, 부러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폐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언제부터 내 정체를 눈치채고 있었느냐고 물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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