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작은 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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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작은 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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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작은 배려
2023.04.14.
“제게 할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뇨. 그건 아니에요. 그저 고생이 많으시겠다, 싶어서요.”
그때 먼저 다이닝 룸을 나섰던 이카르의 딱딱한 음성이 들려왔다.
“갈 길이 머니, 그만 가도록 하지.”
“예.”
르네브는 이카르와 드한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아프다는 말과 달리 셀마가 성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는 은발로 머리를 물들인 채였다.
“식사는 잘하셨나요?”
“네, 덕분에요. 몸이 좋지 않으시다 들었는데, 이렇게 나와계셔도 괜찮은 건가요?”
르네브가 걱정스레 묻자, 셀마가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그리 대단한 건 아니에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어제와 달리 묘하게 날이 선 반응이었다. 그때 옆에 서 있던 집사가 끼어들었다.
“주인님께 두 분의 방문 소식을 전했습니다만, 오늘 중으로 돌아오시기는 어려운 모양입니다…….”
베인과 드한은 황제의 최측근이다.
그런 그들이 우연히도 자작령에 방문했다. 쥘베른 자작에겐 절호의 기회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황제의 최측근과 친분을 쌓아 두면 상당한 이점이 많을 테니.
수도 정계 진출을 노린다거나, 사업에 유리한 청탁을 넣는다거나. 정작 자신을 드한이라 소개했던 사람이, 황제 본인인 줄도 모르고.
그 때문에 이카르가 하루빨리 이곳을 떠나려는 건지도 몰랐다.
“폐하께는 쥘베른 자작가에서 충분한 도움을 받았다고 전해 두지.”
이카르가 무심히 한마디 건네자, 셀마가 안도한 표정으로 꾸벅 허리를 숙였다.
***
쥘베른 자작령을 떠나 한참 더 말을 달리자, 저 멀리 성벽이 보이기 시작했다.
견고한 성벽 주위로 인가들이 늘어서 있었다.
“앞으로 서너 시간 정도면 황궁에 도착합니다.”
말에게 물을 먹이고 돌아온 드한이 말했다.
“참으로 기쁜 소식이네요.”
말 안장 위에서 혹사당한 엉덩이와 허리, 그리고 허벅지를 살살 문지르며 르네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드한과 르네브를 이카르가 빤히 응시했다.
“왜 그러십니까? 드한 경.”
드한이 넉살 좋게 묻자, 이카르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지요?”
드한이 곧장 양손을 공손히 모으고는 물었다.
이카르가 잠시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르네브와 드한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러고는 말했다.
“나는 따로 들를 곳이 있으니, 여기서 이만 헤어지는 게 좋겠군. 베인 경. 세이렌 후작 영애를 황궁까지 안전히 모시도록.”
“네, 걱정 마십시오.”
드한이 굽실거리며 대답했다.
그런 드한을 가만히 응시하던 이카르가 말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다시 만날 때까지 평안하시길.”
“호위를 맡아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드한 경.”
고개를 까딱인 이카르가 말 머리를 돌렸다. 빠르게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르네브는 고개를 돌렸다.
“베인 경, 저희도 이제 출발할까요?”
“그러시죠. 해가 지기 전에는 황궁에 도착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요.”
드한의 말대로 서너 시간쯤 더 말을 달려서야 바슈케르의 황궁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보석 생산량이 많다더니…….’
바슈케르 황궁 복도를 둘러보던 르네브의 입이 떡 벌어졌다.
소문은 한 치의 거짓 없는 사실이었다.
규모는 파라디움 황궁에 조금 못 미칠 정도이나, 화려한 정도는 파라디움 황궁과 비교할 것이 못 됐다.
르네브가 바슈케르 황궁 내부에 압도당해 있는데, 드한이 연신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영애께서 도착하시기 전까지 귀빈실 공사를 마무리 지을 예정이었으나, 자재 수급에 차질이 빚어지는 바람에…….”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앞으로 한동안은 화원에서 지내야 한다는 것을.
“정말 죄송하시다면, 얼른 공사가 끝나길 바라야겠네요.”
르네브의 옆에서 걷고 있는 드한은 황궁에 들어서기 전부터 로브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게 무지 수상해 보일 만도 하다.
하지만 그를 저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드한은 자신을 알아본 누군가가 말이라도 걸면 이카르의 거짓말이 탄로 날까 노심초사하는 것 같았다.
르네브는 다시 한번 동정 어린 시선으로 드한을 쳐다봤다.
“베인 경도 피곤하실 텐데, 여기까지 안내해 주셔서 감사해요.”
“별말씀을. 귀빈께 편안한 여행길이 되지 못한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송구합니다.”
공식적인 방법을 택했다면 확실히 바슈케르까지 오는 길이 훨씬 더 편안했을 것이다.
하지만 공식 일정에 맞춰 움직였다면 세이렌가의 두 남자, 그리고 루시우스와 황비가 어떻게 훼방을 놓았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 말씀 마세요. 공사는 금방 끝날 테고, 저도 무사히 도착했으니까요.”
르네브는 옅은 미소와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드한이 곁에선 하녀에게 영애를 잘 모시라 당부하고는 꾸벅 허리를 숙였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베인 경도, 고생 많으셨어요.”
몸을 돌리는 드한을 잠시 바라보던 르네브는 배정받은 침실 문을 열었다.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넓은 창과 화이트 톤의 벽과 천장, 그에 맞춘 가구들.
황후로 살며 값진 물건을 많이 접했음에도 르네브는 놀라고 말았다.
미안해하던 드한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침실 안은 넓고도 호화로웠다.
이전에 살던 황후의 침실과 견줄 정도니, 귀빈들을 홀대하지 않겠다는 이카르의 말을 뒷받침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침실 안을 둘러보던 르네브의 눈에 너른 창가 바로 앞에 놓인 소파가 들어왔다.
르네브가 폭신한 소파에 앉아 눈을 감았을 때 침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문을 열자 꾸벅 허리를 숙인 하녀가 르네브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황제 폐하께서 레이디께 이걸 전해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녀가 내민 동그란 틴 케이스를 바라보며 르네브가 물었다.
“이게 뭐죠?”
“저는 그저 심부름을 왔을 뿐이라 내용물이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르네브가 틴 케이스를 받아들지 않고 쳐다만 보자, 하녀가 말을 이었다.
“아, 혹시 내용물이 뭔지 걱정하시는 거라면, 제가 열어 봐도 될까요?”
“그래 주면 고맙겠네요.”
하녀가 틴 케이스 뚜껑을 열자, 화한 민트 향이 올라왔다.
‘연고인가?’
상쾌한 아로마 향이 어쩐지 기분을 좋게 만들었지만, 완전히 경계의 끈을 놓을 순 없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일이 나비 효과가 되어 돌아오는 곳이 바로 황궁이다.
이 물건과 하녀를 보낸 사람이 정말로 이카르인지 정확히 모르는 상황에서 건네는 물건을 덥석 받는 건 상책이 아니었다.
실상 이 화원에 머무는 귀빈들 대다수가 평화 협정을 위한 타국의 인질이니, 황궁 안에서 안전을 보장받을 수는 있을 거다.
그러나 바깥, 그러니까 바슈케르의 귀족들에겐 다를 것이었다.
선대 바슈케르 황제들은 정부들을 이 화원에 모아 놓았다.
이카르가 그들과는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긴 하나, 바슈케르 귀족들은 엄한 의심을 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한마디로 이 연고를 보낸 사람이 이카르가 아니라면, 독이 들어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오만가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을 때 하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어……. 혹시 향이 레이디 마음에 들지 않으시나요?”
르네브는 뜬금없이 향을 운운하는 하녀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하녀가 재차 입을 열었다.
“오래 말을 타셨다고 들었어요. 근육통이 있을 레이디를 위해 폐하께서 보내신 선물 같은데……. 거기다 이 향은 심신 안정 효과도 있거든요.”
이후에도 하녀가 우리 황제 폐하께선 이런 세심함을 갖추셨다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폐하께는 제가 직접 감사하다 전해 드릴게요. 가져다줘서 고마워요.”
“레이디께서 기뻐하셨다고 전하겠습니다.”
하녀가 꾸벅 고개를 숙인 뒤 침실을 나섰다. 르네브는 조금 멍해졌다.
……자신이 언제 기뻐했었나?
***
이후에도 하녀들이 목욕 시중을 들러 르네브의 침실을 방문했다.
하지만 르네브는 그녀들을 전부 물렸다.
3년간의 평화 협정을 깨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카르는 르네브의 안전에 힘쓸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카리스마 넘치고 냉철한 군주라고 해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
이카르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다른 마음을 먹은 자도 있을 수 있다.
황궁 안에서 타국의 귀빈이 살해당하면 평화 협정은 물 건너간다.
물론 화원 주변이 꽤나 삼엄하게 지켜지고 있는 것 같았지만, 안심은 금물이었다.
욕실에서 나와 젖은 머리카락을 털던 르네브는 소파 위에 놓인 드레스를 내려다봤다.
‘씻는 동안 가져다 놓은 건가.’
파라디움보다 조금 높은 기온 때문인지, 드레스의 두께가 꽤 얇았다.
시중들 사람 없이도 혼자서 입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르네브는 준비되어 있던 드레스로 갈아입고 거울 앞에 섰다.
어깨는 조금 가려지고, 쇄골과 가슴께가 드러나는 형태의 푸른 드레스는 맞춤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르네브의 몸에 꼭 맞았다.
디자인이 조금 독특할 뿐 파라디움에서 봄, 여름에 입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예쁘긴 하네.”
그때 노크 소리에 이어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이디. 실례합니다.”
침실 밖에는 이카르의 선물을 전해 주러 왔던 하녀가 서 있었다.
“무슨 일인 가요?”
“폐하께서 저녁을 함께 들자고 하셨습니다.”
르네브의 눈빛이 조금 날카로워졌다. 그녀는 폐하라는 말에 처음엔 당연히 이카르를 떠올렸다.
그러나 곧바로 자신이 현재 바슈케르 황가의 구성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과거 르네브가 카엘을 낳고 한참 지났을 무렵에도 이카르에게는 반려가 없었다.
일찍이 명운을 달리한 마음에 두었던 여자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문에 쭉 결혼하지 않았던 거라고. 물론 지금껏 지켜본 이카르가 그렇게 사랑꾼처럼 보이진 않았다.
“황제 폐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레이디.”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던 하녀가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덧붙였다.
“현재 바슈케르 황가에 폐하라 부를 분은 황제 폐하가 유일하십니다.”
르네브는 조금 놀랐다. 황궁에서 오래 일한 건지 하녀의 눈치가 보통이 아니었다.
“친절한 설명 감사해요. 폐하께 저녁 초대에 가겠다고 전해 드리세요.”
르네브는 허리를 꾸벅 숙이고 침실을 떠나려는 하녀를 다시 불러 세웠다.
“잠깐만요. 이름이 뭔지 알려 주겠어요?”
“키어넨이라 합니다.”
“그럼 앞으로 키어넨이 제 전담이 되는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