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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왜죠? (13/148)


#13화 왜죠?
2023.04.13.


심지어 르네브를 빤히 쳐다보기까지 했다.

“……?”

르네브는 이카르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하며 셀마 옆에 앉았다.

테이블의 상석은 비어 있었고, 셀마의 맞은편에는 이카르가, 르네브의 맞은편에는 드한이 앉았다.

“정말, 몰라보겠어요!”

사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조금…… 아니, 많이 꾀죄죄했던 탓에 씻고 광을 냈더니 신수가 훤해진 건 맞았다.

르네브는 빠르게 셀마를 스캔했다. 그 결과 반짝이는 그녀의 머리 장식이 오늘 패션의 포인트라는 걸 눈치챘다.

“영애의 흰 피부에 은 장신구가 무척 잘 어울리네요.”

정답이었는지 셀마의 표정이 밝아졌다.

드르륵.

때마침 하녀들이 다이닝 룸 안으로 트롤리를 밀고 들어왔다.

이후에는 간간이 대화가 오가는 편안한 식사가 이어졌는데, 대체로 셀마가 질문을 던지면 이카르가 성가시다는 듯 짧게 대꾸하는 게 다였다.

바로 지금처럼.

“드한 경께서는 뭘 하면서 여가 시간을 보내시나요?”

“여가라……. 그럴 틈이 없더군.”

핏물이 흐르는 송아지 스테이크를 썰며 이카르가 짧게 대답했다. 또다시 대화 단절을 예감한 듯 셀마가 낮게 신음성을 흘렸다.

“아…… 그러시구나.”

그러더니 금세 새로운 질문거리를 생각해 낸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아 참! 드한 경께 제 또래의 여동생이 있으시다고 들었어요.”

“그렇지. 그것도 아주 귀여운 여동생이 있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린 이카르의 눈매가 조금 휘어졌다.

줄곧 시큰둥하던 그의 반응이 조금 괜찮았기 때문일까?

셀마가 빠르게 질문했다.

“데뷔탕트도 치를 겸 제가 이번 건국제는 꼭 참여할 예정이거든요. 그때 제게 드한 경의 여동생분을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켁…….”

조용히 식사를 이어 나가던 드한이 사레에 걸린 듯 헛기침을 토했다. 근처에 선 하녀에게 물을 따라 주라 손짓한 셀마가 걱정스레 물었다.

“베인 경, 괜찮으세요?”

“그럼요. 물론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영애. 남의 여동생을 두고 이런 말씀드리는 건 조금 조심스럽습니다만.”

“…….”

“영애께 드한 경의 여동생을 소개해 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드한의 말에 셀마가 이카르를 쳐다보며 물었다.

“왜죠, 드한 경?”

“아마도, 여동생은 건국제에 참석하지 않을 테니까?”

드한에게 시선을 둔 채로 이카르가 대답했다.

“맞습니다. 제, 아니, 드한 경의 여동생은 우아하신 영애들과는 결이 맞지 않을 겁니다.”

“……그런가요?”

셀마가 한쪽 뺨을 감싼 채로 아쉬운 표정을 지었고, 르네브는 드한에게 동정 어린 시선을 보냈다.

이카르 때문에 곤란한 상황에 처한 그에게 일종의 동병상련을 느꼈다.

자신 또한 황후로 살면서 황제 루시우스의 눈치를 보느라 하루하루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위태로이 살았다.

드한 역시 처음 만났을 때보다 지금 더 피곤해 보였다.

“…….”

르네브를 빤히 응시하던 이카르의 시선이 드한에게 향했다.

조금 섬뜩해 보일 정도로 서늘한 그의 눈빛에 드한이 흠칫 놀라며 물었다.

“왜, 왜 저를 그렇게 빤히 보십니까? 드한 경.”

이카르가 대답 없이 와인을 벌컥 들이켰다. 르네브는 눈꼬리를 내려뜨린 채로 드한을 쳐다봤다.

그리고 속으로만 되뇌었다.

‘힘내! 드한. 지지 마.’

그런 르네브의 속마음을 알 길 없는 드한이 고개를 갸웃거렸고, 셀마가 또다시 입을 열었다.

“맞아, 요즘 파라디움 제국에선 머리를 물들이는 게 유행이라면서요? 그럼 영애의 이 은발도 물들인 건가요?”

르네브는 이카르가 둘러댔던 변명을 떠올렸다.

“그럼요. 제 머리도 염색한 거예요. 요즘 파라디움 귀족들 사이에서 대유행이거든요.”

그래서 되지도 않는 말을 내뱉고는 이카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뜻밖에 이카르가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그럼 원래는 무슨 색이었지?”

이카르의 거짓말이 탄로 나지 않도록 둘러댄 것인데, 이렇게 나올 줄이야?

“갈색. 갈색이었어요.”

약간 귀찮았지만, 르네브는 또 한 번 장단을 맞췄다.

그러자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셀마가 말했다.

“갈색도 예뻤겠지만, 확실히 영애께는 이 진주 같은 은발이 잘 어울리세요. 이참에 저도 머리 염색을 해 볼까요?”

“감사해요. 하지만 저는 영애의 예쁜 갈색 머리를 보니, 염색한 게 조금 후회되는걸요.”

“그, 런가요?”

르네브의 칭찬에 셀마의 얼굴이 붉어졌다.

반면 르네브는 빨리 식사 시간이 끝나길 바랐다.

더는 셀마가 제게 질문하지 않길 바라며 접시 쪽으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드한 또한 셀마와 시선을 맞추지 않으려는 듯 접시에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그럼에도 셀마는 계속해서 이것저것 물어봤다.

그리고 왜인지 이카르의 심기가 조금 불편해 보였다.

***

식사를 마치자마자 드한은 제 방으로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등 뒤에서 들려온 저음이 드한의 발걸음을 우뚝 멈춰 세웠다.

“베인.”

드한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고는 빙글 몸을 돌렸다.

“예, 드한 경. 말씀하십시오.”

이카르가 위압적인 아우라를 풍기며 드한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드한은 저절로 공손해지는 양손을 가지런히 모으고는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은 폐하의 뜻대로 이 거지 같은 연극에 어울려 준 죄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카르의 시선 한 번에 목구멍이 버석거리는 건 제 의지가 아니었다.

“……됐다.”

이카르가 쯧, 혀를 차더니 앞서 걷기 시작했다.

드한은 조심히 안도의 한숨을 내뱉고는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드한은 이카르의 뒤로 따라붙으며 속삭였다.

“폐하.”

“뭐지.”

“어째서 폐하께서 제 행세를 하시고, 파라디움의 영애께 저를 베인이라 소개하신 겁니까?”

“어쩌다 보니?”

이어진 이카르의 대답에 드한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왜, 불만이라도 있나?”

“아닙니다. 전혀 없습니다.”

드한이 고개를 붕붕 저으며 즉답했다. 배정받은 침실로 걸음을 옮기던 이카르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베인에게서 따로 들어온 소식은?”

“그렇지 않아도 말씀드릴 것이 있었습니다.”

“들어와.”

“예, 페하.”

침실에 들어서자마자, 드한이 전령 새를 통해 전달받은 것들을 보고했다.

“세이렌 후작이 파라디움 황실에 탄원서를 넣었다고 합니다.”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이카르가 엄지로 느리게 아랫입술을 쓸며 물었다.

“황실 쪽 반응은?”

“황비 쪽에서도 거센 반발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황후는?”

“침실에 틀어박혀서 아무도 만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딱히 상황이 달라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

소파 팔걸이에 턱을 괴고 고개를 끄덕이던 이카르의 적안이 유독 날카롭게 빛났다.

“세이렌 후작 영애에 대한 조사는?”

“베인이 알아보고 있습니다.”

“서둘러.”

“예! 폐하.”

***

상황 보고를 마친 드한이 이카르의 침실을 떠난 것은 한밤중이 다 되어서였다.

이카르는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댄 채로 눈을 감았다.

‘드한이 동굴 가까이에 올 때까지 잠들어 있었다니.’

이전에도 그렇게 달게 잤던 적이 있던가?

72시간이 넘도록 제대로 눈을 붙이지 못했던 전장에서조차 지속되어 오던 불면이었다.

르네브와 함께 잠든 밤 이후로 갑자기 오래된 불면이 해소된 줄만 알았으나, 지금은 여느 때와 같이 잠이 오지 않았다.

황궁에서는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은 만큼, 잠 못 드는 밤이 그리 괴롭지 않았건만.

‘폐하께서는 일과 연애하십니까?’

과거 베인이 했던 말에 공감하며 이카르가 자조하듯 중얼거렸다.

“그게 정말이었군.”

***

타닥타닥.

르네브는 벽난로 앞에 앉아 타오르는 불꽃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러다 과거 이맘때쯤의 일들을 떠올렸다.

이번에 바슈케르로 떠나던 날은 사실 루시우스에게 청혼을 받았던 날이었다. 그날 이후 결혼까지는 순식간이었다.

그렇게 황자비로 살다 루시우스가 황위에 올랐고, 그녀는 황후가 되었다.

그리고 첫아이를 잉태했을 무렵엔 세이렌 후작의 전사 소식이 들려왔었다.

이제는 일어나지 않을 미래의 일이지만, 불안이 올라왔다.

“먼 미래의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

옅은 한숨과 함께 걱정을 한편으로 미뤄 둔 르네브는 침대에 누웠다.

“으음…….”

생각하다 선잠이 들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아침이었다.

챙길 짐도 딱히 없었지만, 방 안을 한 번 더 둘러본 뒤에야 르네브는 침실을 나섰다.

마찬가지로 막 침실 문을 열고 나오는 이카르와 마주쳤다.

조금 헝클어진 앞머리를 쓸어 넘기는 이카르에게 르네브는 가볍게 인사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잠은 잘 주무셨나요?”

“확실히, 편안한 밤은 아니었지.”

르네브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이카르가 성큼성큼 앞서 걸었다. 르네브도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다이닝 룸으로 들어가자, 먼저 와 있던 드한이 아침 인사를 건네 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영애.”

“좋은 아침이에요. 베인 경.”

의자에 앉으려던 르네브는 셀마의 자리가 비어 있는 걸 보고는 물었다.

“쥘베른 자작 영애께서는 늦으시는 걸까요?”

“아가씨께서는 오늘 몸이 좋지 않으십니다. 세 분이서만 식사하시게 해서 죄송하다고 하셨습니다.”

르네브 앞에 놓인 컵에 물을 따라 주며 집사가 대답했다.

“그렇군요……. 괜찮으신 건가요?”

“아가씨께선 이따금 열병을 앓으십니다. 수프와 해열제를 챙겨 드셨으니, 세 분이 떠나기 전에는 얼굴을 비추실 겁니다.”

르네브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쾌차하시길 바랄게요.”

“감사합니다. 레이디께서 걱정하셨다고 아가씨께 전해 드리겠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쥘베른가의 집사가 떠나고 어제와 달리 조용한 식사 시간이 이어졌다.

원체 둘 다 과묵한 성격인 건지 이카르도 드한도 별말 없이 식사에만 집중했다.

“…….”

황후로서 늘 분위기를 주도해야 한다는 습관적인 강박에 입을 떼려던 르네브는 곧 마음을 바꿔 먹었다.

지금의 자신은 황후가 아니다.

이 성의 주인도 아니고. 그러니 굳이 어색한 분위기를 타파하고자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묘한 해방감과 함께 약간의 상실감이 찾아왔다.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두자.’

자조하던 르네브는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쳐다보는 이카르의 시선이 어쩐지 뜨거웠다.

“……?”

르네브는 눈을 깜빡이며 이카르를 응시했다.

할 말이 있어서라고 생각했는데, 이카르는 별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식사를 마쳤으면 이제 출발하도록 하지.”

스테이크 접시를 싹 비우고, 빵을 집으려던 드한의 손이 우뚝 멈췄다.

여기 아직 식사하고 있는 분이 계신데요?

르네브가 그런 눈으로 쳐다봤지만, 이카르는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이카르의 무심함에 익숙한 건지, 드한 또한 아쉬움 없이 바로 일어났다.

르네브는 또 한 번 동정 어린 시선으로 드한을 쳐다봤다.

무심한 황제 폐하를 모시느라 고생이 많아 보이시네요.

그런 르네브의 마음을 모르고 드한이 백치처럼 고개를 갸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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