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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이분이 드한 경이십니다 (12/148)


#12화 이분이 드한 경이십니다
2023.04.12.


르네브는 그를 바로 알아봤다.

황후였을 적에 그는 바슈케르의 사신으로 파라디움에 몇 번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를 응대한 사람이 르네브 본인이었다. 르네브는 흥미진진한 눈으로 이카르를 쳐다봤다.

이제 진짜 드한이 나타났으니, 이카르가 그를 뭐라고 소개하려나.

“이쪽은…… 베인. 황제 폐하의 비서라 할 수 있지.”

“아…….”

이를 어쩌나.

진짜 드한의 이름이 베인이 된 순간이었다. 당연하게도 진짜 드한의 표정이 해괴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아주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닌지, 드한이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이카르를 쳐다봤다.

이카르의 거짓말을 모른 척 눈감아 주기로 마음먹긴 했지만, 진실을 알기에 르네브의 입꼬리가 자꾸만 씰룩여졌다.

“반갑습니다, 베인 경. 세이렌의 르네브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황제 폐하의 비서…… 베인입니다.”

이러면 되겠냐는 눈으로 드한이 이카르를 쳐다봤다.

“가지.”

상당히 곤란해 보이는 드한을 무시하고 이카르가 앞장섰다.

르네브는 드한을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곤 걸음을 옮겼다.

***

수십의 장정들이 르네브가 타고 온 마차를 에워싸고 있었다.

르네브는 그들이 바슈케르의 최정예 전사들일 거라 추측했다.

이카르의 전투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한들 황제가 적국에 홀로 찾아왔을 리가 없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데서 오는 차이는 분명했다.

상대를 방심하게 만드니까.

눈에 띄지 않고 파라디움 군중 틈에 섞여 있었을 그들의 모습을 상상하자, 솜털이 쭈뼛 솟았다.

르네브가 그들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이카르가 드한에게 뭐라고 속삭였다.

고개를 끄덕인 드한이 기사들에게 지시를 내리곤 르네브에게 다가왔다.

“여기부터는 길이 험해 말을 타고 이동해야 합니다. 영애께서 타고 오신 마차는 후작가로 돌려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길이 험하다니?

르네브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전까지 달려오던 길과 앞으로 가야 할 길에 별다른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잠시 이걸 사용해 주셔야 합니다.”

드한이 길고 얇은 검은 천을 내밀었다. 르네브는 멈칫하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포박하려는 건가? 이제 와서?’

그런 르네브의 심리를 눈치챈 듯 드한이 머쓱한 미소와 함께 덧붙였다.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저 평범한 눈가리개입니다.”

르네브는 불안한 속내를 감추고 드한에게 받은 검은 천으로 눈을 가렸다.

“이러면 되나요?”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드한에게 의지해 얼마쯤 걸었을까.

르네브의 불안감이 고조되었음 즈음 드한이 말했다.

“이제 눈가리개를 벗으셔도 됩니다.”

“……!”

눈가리개를 벗자, 완전히 바뀐 눈앞 풍경에 르네브의 눈이 커졌다.

풀 한 포기 돋아나지 않은 메마른 대지는 언뜻 사막처럼 보였다.

르네브는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이동 마법을 사용한 건가요?”

이카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아는군.”

걷는 중에 약간의 기시감이 든 적이 있었는데, 그때가 공간이동을 했던 시점인 모양이었다.

‘마차로 달리면 보름 걸릴 거리를 단숨에 뛰어넘다니.’

르네브는 새삼 파라디움과 바슈케르의 격차를 느꼈다.

***

흑마 세 필이 갈기를 흩날리며 황량한 대지 위를 빠르게 달렸다.

바슈케르의 기사들이 탄 군마들이 희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그 뒤를 따랐다.

저 멀리 보이는 시가지를 가리키며 드한이 말했다.

“여기부터가 바슈케르 제국의 영토입니다.”

“바슈케르는 번화한 곳이군요.”

르네브의 감탄에 이카르가 오만하게 턱을 들었다. 자신이 구축한 도시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어찌 됐든 유학이니 파라디움보다 뛰어난 건 당연한 이치지.”

“그렇죠.”

표면상으로는.

르네브는 뒷말을 목구멍 깊숙이 삼키고 말고삐를 당겼다. 빨리 가까이서 도시를 직접 보고 싶었다.

“급하신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저희와 너무 떨어져 달리시는 건 위험합니다.”

바슈케르는 초행인 만큼, 가이드의 말을 따르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럴게요. 그런데 드한…….”

말의 속도를 줄이며 르네브는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뭐지?”

“예.”

이카르와 드한이 동시에 대답했다. 르네브는 웃지 않기 위해 입안 여린 살을 깨물었다.

이카르는 드한을 쳐다보며 미간을 살짝 모았고, 잠깐 곤란해하던 드한이 상황을 수습하려 빠르게 입을 열었다.

“왜 그러십니까?”

르네브는 자꾸만 터지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물었다.

“얼마나 더 달려야 황궁에 도착하나요.”

“이 속도로 달린다면, 저녁때쯤엔 바슈케르 동부에 위치한 쥘베른 자작령에 도착할 겁니다.”

“자작령에 방문할 거라고 전령 새를 보내 뒀으니, 오늘은 편히 잘 수 있겠군. 아주 따뜻하고, 편안하게.”

입매를 비틀어 올린 이카르가 르네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동굴에서의 일을 놀리려는 게 틀림없어 보였기에, 르네브는 모른 척 정면을 응시하며 대꾸했다.

“드한 경께서는 편히 못 주무셨나 보네요.”

“물론. 아침부터 남의 몸을 더듬어 대는 누군가 때문에.”

티격태격하는 르네브와 이카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드한은 고개를 갸웃했다.

위세 높은 가문의 아가씨라고는 하나, 제국의 황제께 지나치게 격이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폐하 또한 아무런 불만이 없어 보였고. 무엇보다 대체 왜 폐하께서는 남의 이름을 팔아먹으신 건지…….

드한은 주군의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대단히 중요한 이유가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세이렌 후작 영애에게 수상한 점을 발견하시고 직접 감시하시려는 건지도 모르지.’

***

쥘베른 자작 성에 도착하자, 르네브와 엇비슷한 나이의 여자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저는 쥘베른의 셀마라고 합니다. 전령 새로 소식을 전해 듣고, 두 분께서 오시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말에서 내리는 이카르와 드한에게 쥘베른 자작 영애가 꾸벅 허리를 숙였다.

“갑작스러운 방문 소식에 당황하셨을 텐데, 환대 감사합니다. 쥘베른 자작 영애.”

“편히 쉴 수 있도록 부족함 없이 잘 모시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쉬실 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르네브는 셀마의 안내를 받으며 쥘베른 자작 성을 둘러봤다.

색을 입히지 않은 회색빛의 석조 건물 안은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고, 복도에는 특별히 벽화나 장식품을 두지 않아 단출했다.

그러나 자작 신분에 성까지 소유한 것도 그렇고, 셀마가 입고 있는 드레스 또한 고가에 속했다.

쥘베른 자작가는 꽤 풍족한 모양이었다.

“드한 경이시죠? 어두운 금발을 보고 금방 알아뵀답니다.”

긴 복도를 걸으며 셀마가 드한에게 말했다.

“……저는 베인입니다. 이분이 드한 경이십니다.”

드한이 이카르를 가리키며 말하자, 셀마가 두 사람의 머리를 번갈아 쳐다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요즘 파라디움에선 머리에 물을 들이는 게 유행이라더군.”

태연한 이카르의 거짓말에 셀마가 눈을 빛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파라디움에 가셨을 때 염색을 하셨군요!”

대충 셀마가 두 사람을 최신 유행 트렌드에 밝은 편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부지런히 성 내부를 안내하는 내내 셀마의 시선이 흘끗흘끗 이카르에게로 향하는 것이 르네브의 눈에 띄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첫눈에 반했다, 그런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셀마를 훔쳐보는데 이카르와 눈이 딱 마주쳤다.

“뭐지?”

“네? 뭐가요?”

르네브는 물음에 물음으로 대답했다. 이카르가 슬쩍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

“할 말이 있어서 쳐다본 게 아니었나?”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르네브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때 걸음을 멈춘 셀마가 르네브에게 말했다.

“세이렌 후작 영애께서는 이곳을 사용하시면 됩니다.”

“안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애.”

르네브는 짧은 감사 인사를 건네며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가 황후일 적 거울 앞에서 수만 번 연습하고 또 했던 대외적인 미소였다.

“그럼.”

르네브는 가볍게 묵례한 뒤 빙글 몸을 돌려 침실로 들어갔다.

침실 문이 닫히자마자 셀마가 놀란 얼굴로 감탄했다.

“와…… 정말 우아한 분이시네요. 파라디움의 레이디들은 다 저분처럼 기품이 넘치시나요?”

이카르가 한쪽 눈썹을 치켜세운 채로 낮게 읊조렸다.

“저런 면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군.”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셀마가 눈을 깜빡이는데, 드한이 정중하게 끼어들었다.

“파라디움에서부터 쉬지 않고 달려온 탓에 휴식이 절실합니다만. 괜찮으시다면 영애, 제게도…… 드한 경께도 침실을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드한의 말에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짓던 셀마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아! 내 정신 좀 봐. 베인 경, 이쪽으로 모실게요.”

잠시 르네브가 있는 침실 문을 응시하던 이카르도 이내 걸음을 옮겼다.

***

회귀한 이후로 다른 사람의 평판 따위는 신경 쓰지 않겠다고 다짐한 르네브였으나, 황후의 오랜 습관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조금 전만 해도 귀족가의 영애에게 얕잡아 보이지 않으려 노력하지 않았나.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불러 주세요. 레이디.”

하녀가 르네브에게 꾸벅 허리를 숙였다. 르네브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멀어지는 하녀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어 낸 르네브는 침실 안을 둘러봤다.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침대와 약간의 가구들이 전부인 심플한 구조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제대로 쉬질 못했으니.

조금 딱딱하지만, 등허리를 충분히 받쳐 주는 소파에 몸을 묻은 르네브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원작에서 1황녀의 비중은 매우 작았지만, 그래도 알 수 있는 건 있었다.

‘첫 거처는 화원이 되겠지.’

화원.

빼어나게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거나, 탁월한 예술적 재능을 갖춘 여성들이 황궁에서 머무는 곳.

한마디로 바슈케르 황제를 위한 하렘.

화원에서 지냈다는 이유로 1황녀에겐 제대로 된 혼담이 들어오지 않았다. 적국 황제의 노리개였다는 편견이 팽배해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이카르가 황위에 오른 뒤의 화원은 살롱의 역할을 했다.

귀족이나 황궁을 방문한 귀빈들이 학문과 사업, 정치 및 사회 전반전인 부분을 교류하는 식으로 변화한 것이다.

이미 그런 상황을 알기에 르네브가 자원하겠다고 나선 것이기도 했다.

그 외에도 중요한 일들에 대해 생각해 보려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레이디, 목욕 시중을 들러 왔습니다.”

“들어오세요.”

상념을 끊어 낸 르네브는 하녀들에게 몸을 내맡겼다. 곧 하녀들의 손에 르네브는 씻겨지고 입혀졌다.

그 결과, 파라디움에 있을 때만큼은 아니어도 제법 귀족 영애다운 자태를 갖출 수 있었다.

“저기 오시네요.”

다이닝 룸에 먼저와 있던 셀마가 르네브를 발견하고는 미소 지었다.

셀마에게 눈인사를 건넨 르네브가 빈자리로 걸어가는데, 테이블에 턱을 괴고 따분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이카르의 붉은 눈이 조금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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