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그 약속 꼭 지키세요, 적국의 황제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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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그 약속 꼭 지키세요, 적국의 황제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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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그 약속 꼭 지키세요, 적국의 황제 폐하
2023.04.08.
호위?
르네브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호위라면 바슈케르 황제 폐하의 명으로 말인가요?”
“당연히, 그렇겠지?”
황제라는 제 신분을 밝히지 않을 모양이었다. 르네브는 그의 장단에 맞춰 주기로 마음먹고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꽤 무례하시군요. 황제 폐하께서 호위를 맡긴 제게 하대를 하다니요?”
르네브가 따져 묻자, 이카르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영애도 말을 편하게 하든지.”
……그래도 돼?
르네브는 이후에 벌어질 수 있을 만한 경우의 수 몇 가지 떠올렸다.
가령 눈앞의 황제께서 언행일치가 되지 않는 타입이라면?
그가 만약 루시우스처럼 권위적인 성격일 경우, 황제라는 신분이 밝혀진 뒤의 후폭풍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건 그렇고. 당신의 주군께서는 분명, 1황녀 전하를 지목했을 거예요.”
“그랬지.”
“그런데 갑자기 제가 대신 가겠다고 자원했죠. 바슈케르의 황제께서도 이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그게 무슨 문제냐는 듯한 이카르의 표정에 르네브의 눈이 커졌다.
“……이미 다 알고 계셨군요.”
“물론. 아주 재미있기도 했고. 그날, 황비 쪽에서 그대와 3황자의 혼담을 꺼내려 했던 것 같던데.”
이건 그가 파라디움 황가의 사정을 아주 잘 안다는 뜻이었다.
느리게 턱을 매만지던 이카르가 말을 이었다.
“어지간히도 3황자가 싫었던 모양이야. 입술을 물어뜯을 정도면.”
설마…….
“그럼 아까 낮에도 여기 계셨던 거예요?”
이카르가 고개를 끄덕였고, 르네브의 눈이 더욱 커졌다.
“전부, 봤고요?”
“그 부분은 미안하게 됐군. 의도한 건 아니었어.”
이카르가 짧게 사과했다.
너무 할 말이 많은 나머지 르네브는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라 말문이 막혔다.
‘이전과는 상황이 달라진 건가……. 왜?’
이카르는 파라디움에 딱 두 번 방문했다. 공식적으로는.
첫 번째는 1황녀를 볼모로 평화 협정을 요구했을 때, 두 번째는 르네브가 황후일 적 건국제에.
그런 그가 후작저에 숨어들다니?
“바슈케르의 황제께선 파라디움 황가에 관심이 많으신 모양이네요.”
르네브가 핵심을 찌르자, 턱을 매만지던 이카르가 그녀 쪽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살짝 풀어진 검은 셔츠에 검은 바지. 그의 옷차림은 황제라기보다는 용병에 가깝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풍겨져 나오는 특유의 아우라 때문인지 르네브의 어깨가 굳고, 발가락이 절로 곱아들었다.
“물론이야. 서로에 대해 잘 알아야 큰 분란도 막을 수 있지 않겠어?”
이카르는 마치 평화주의자 같은 말을 하고 있지만, 르네브는 미래를 알고 있다. 그가 주변국을 야금야금 먹어 치우는 전쟁광, 살인귀라는 걸.
“그런데 말이야……. 원래 그런 편인가?”
이카르가 팔짱을 낀 채로 르네브를 빤히 응시했다.
“……?”
“영애께서는 일개 호위에게도 이렇게 공대를 하는지 궁금해서.”
르네브의 입이 꾹 다물렸다.
자신을 일개 호위라 소개했으니,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하는 게 맞았다. 그렇지만 그가 황제인 걸 알면서도 하대할 순 없는 노릇 아닌가.
“황제 폐하께서 직접 임명하신 호위 분을 홀대할 수는 없죠.”
“물론 국경을 넘으면 의지할 상대가 나뿐이긴 하겠지.”
의지를 해? 적국 황제 본인을?
르네브의 표정이 조금 이상하게 변하자 이카르가 말을 이었다.
“……영애? 표정이 왜 그러지?”
변명할 말을 찾아 빠르게 머리를 굴리던 르네브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약속했던 3년이 지나고 황녀를 온전하게 고국으로 돌려보냈기에, 그가 예상보다 폭군은 아닐 거라고 멋대로 추측한 건 오산이었던 모양이다.
“시간이 늦었네요. 저는 이제 저택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르네브는 자리를 피하기로 마음먹고 몸을 돌렸다.
“분위기를 봐서는 내일 떠날 모양이던데.”
옆을 스쳐 지나치려는 순간 뱉은 이카르의 말에 르네브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혹시, 저택 안으로도 들어왔던 거예요?”
이카르가 말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라는 듯.
반면 르네브는 속으로만 경악했다.
‘무단으로 가택 침입을 해 놓고 뭐가 저리 당당한 건데?’
하지만 그 당연한 말을 끝끝내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세이렌 후작저에 침입한 남자다. 그런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가 아무도 모르게 살해라도 당한다면?
자신만 손해였다. 바로 며칠 전에 죽어 보지 않았나.
지금은 몸을 사릴 때였다.
“해가 뜨기 전에 떠날 예정이에요.”
“그렇군.”
이카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택 쪽으로 걸어가던 르네브는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어디에 계셨던 거예요?”
그러자 이카르가 검지를 세워 위를 가리켰다.
‘설마 나무 위에 계속 있었다는 건가? 제국의 황제가?’
르네브는 고귀한 신분답지 않게 소탈하고도 매우 행동파 기질의 남자라 이카르를 정의했다.
***
르네브가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세이렌 후작이 물었다.
“이 늦은 시간에 혼자 어딜 다녀온 게냐, 르네브.”
이제 막 황궁에서 돌아온 듯 세이렌 후작은 제복 차림이었다.
“낮에 황자 전하께서 저택에 다녀가셨다면서?”
옆에 있던 패트릭도 언성을 높였다. 르네브는 옅은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대화를, 할까요?”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응접실로 향하는 도중에도, 도착해서도 패트릭이 계속 씩씩거렸다.
“네게 강제로 키스하려 들었다고!”
패트릭이 좋지 못한 욕지거리를 덧붙이자, 세이렌 후작이 미간을 좁히며 아들에게 눈치를 줬다.
패트릭은 전장에서 구르며 입이 걸어진 모양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사위로 둘 뻔했다니, 생각만으로도 끔찍하구나.”
“싹수가 노란 것 같다고 진즉 말씀드렸잖습니까, 아버지.”
두 사람이 한참이나 더 분통을 터트린 뒤에야 르네브는 중요한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황실에서 이 일로 세이렌가에 트집을 잡지는 않을지 걱정이에요.”
“그런 거라면 걱정 마라. 그들도 날아든 돌멩이 말고 별다른 증거를 찾지는 못했으니까.”
“그래. 미리 후작저에 방문하겠다는 언질도 없이 그쪽에서 멋대로 들이닥친 거잖아. 상해를 입은 것도 아니고.”
패트릭이 아쉽다는 투로 입을 삐죽였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그럼 저는 이만 들어가 볼게요. 오늘은 좀, 피곤하네요.”
눈가를 문지르는 르네브를 보며 두 남자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어, 그럴래?”
“그래, 피곤하겠구나. 들어가서 쉬려무나.”
“네, 안녕히 주무세요.”
르네브는 두 사람의 모습을 아로새기고는 뒤돌아섰다.
‘조심히 다녀올게요.’
***
완전히 해가 뜨기 전의 새벽.
짤막하게 적은 편지를 책상 위에 올려 둔 르네브는 로브를 깊게 눌러썼다.
이전 생에 루시우스와 결혼해서 황궁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르네브의 시중을 들던 하녀를 데리고 떠날까 하고 잠깐 고민했었다.
그러나 곧 고개를 저었다.
한 아이는 아픈 홀어머니와 어린 동생을 보살펴야 했고, 또 다른 하녀는 곧 있으면 대장간에서 일하는 고용인에게 청혼을 받을 예정이었다.
자신의 사정으로 둘을 떨어뜨려 놓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무나 곁에 두고 싶지는 않았기에, 르네브는 혼자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르네브는 창 너머로 후문에 대기 중인 마차를 확인한 뒤, 짐 가방을 들었다.
루시우스가 후작저로 찾아온 날.
세이렌 후작은 황궁에 찾아가 르네브의 바슈케르행을 막으려 갖은 애를 쓴 모양이었다.
그 때문에 일이 틀어질까 염려한 황후 쪽에서 늦은 밤 사람을 보내왔다.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면 바로 출발할 준비를 해 줘요.」
르네브는 황후의 편지를 벽난로에 던져 넣고는 침실을 나섰다.
끼익.
발소리도 죽이고 조심히 문을 밀고 나왔을 때였다.
“……?”
인기척을 느낀 르네브가 뒤를 돌아보려는 순간.
“쉬이.”
등 뒤에서 뻗어 나온 커다란 손이 르네브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전에도 맡아 본 적 있는 청량한 체향에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뒤늦게 후회하고 몰래 줄행랑칠 거라 의심이라도 한 걸까?
신뢰받지 못했다는 생각에 조금 불쾌해졌지만, 르네브는 애써 태연하게 남자의 손을 툭툭 두드렸다. 그제야 남자가 손을 풀었다.
“바슈케르의 황제께서 선택한 호위 분은 가택 침입이 취미이신가 봐요.”
르네브가 힐끗 쳐다보자, 이카르의 눈이 조금 커졌다.
“놀라지 않은 거야?”
“두 번 놀랐다가는 아주 저세상에 다녀올 지경인데요.”
르네브는 앞장서 걸으며 이카르 몰래 가슴께를 쓸어내렸다.
‘아, 놀래라.’
애는 없지만, 애가 떨어질 뻔했다.
“그런데 가족에게 떠난단 말도 없이 괜찮겠어? 3년은 지나야 다시 제국 땅을 밟을 텐데.”
르네브는 걸음을 멈추고 저택을 돌아봤다.
“만약…… 살아서 다시 파라디움 땅을 밟을 수 있게 되거든. 그때 사과해야죠.”
“참으로 냉정한 아가씨군.”
이카르가 마차 문을 열며 말했다.
“내가 보장하지. 3년 후, 그대는 무사히 파라디움 제국 땅을 다시 밟을 수 있을 거야.”
파라디움에 인질을 요구한 게 본인이면서?
르네브는 참으로 자상하신 황제 폐하라 비아냥거리려다 생각을 바꿨다.
“그 약속. 꼭 지키세요.”
적국의 황제 폐하.
뒷말은 속으로 삼켰다.
르네브가 다시 눈을 떴을 때도 그녀는 여전히 흔들리는 마차 안이었다.
“결코 승차감이 좋다고는 할 수 없을 텐데. 잘도 자더군.”
맞은편에 앉아 무심히 창밖을 바라보던 이카르가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르네브는 자는 동안 흐트러진 옷매무새 따위를 점검했다. 적국의 황제 앞에서 경계가 소홀했던 자신을 반성하면서.
“그러고 보니, 서로 통성명도 하지 않았네요.”
“세이렌 후작의 금지옥엽, 르네브. 맞나?”
이름 정도는 알고 있다는 듯 이카르가 르네브를 향해 살짝 턱짓했다.
“제 소개 감사합니다.”
이번엔 네 소개를 하라며 르네브도 똑같이 이카르에게 턱짓했다.
이카르가 자신을 호위라 소개했으니, 조금 격 없이 행동한대도 변명할 여지가 충분했기 때문이다.
“하, 드한이라고 부르면 돼.”
헛웃음을 터뜨리며 이카르가 자신을 드한이라 소개했다.
르네브는 흐린 눈으로 빤히 그를 응시했다. 분명 드한이란 이름을 들어 본 기억이 있었다.
가령, 적국 황제의 왼손이라 불리는 남자의 이름 같은 것 말이다.
“아, 드한. 그런데 바슈케르의 황제 폐하께서 지금 파라디움에 계시는 것으로 아는데요. 드한 경과 함께 돌아가지 않으시는 건가요?”
이카르가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파라디움에 아직 일정이 남아 있다고 하시더군.”
“아…….”
르네브는 감흥 없는 눈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카르가 그녀 쪽으로 몸을 살짝 틀며 물었다.
“왜, 영애도 이국의 황제께 관심이 있으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