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꽃은 죄가 없다, 꽃을 가져온 이에게 죄가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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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꽃은 죄가 없다, 꽃을 가져온 이에게 죄가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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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꽃은 죄가 없다, 꽃을 가져온 이에게 죄가 있을 뿐
2023.04.07.
“아침부터 세이렌 후작저에 걸음 하시다니, 굉장히 급한 일이라도 있으셨던 걸까요?”
르네브는 루시우스의 손을 못 본 척 시선을 돌렸다.
내밀었던 손이 민망할 법도 하다. 자신의 친절을 거절하는 이도 없다시피 할 것이고. 그럼에도 루시우스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뒷짐을 지고는 반보 앞서 걷기 시작했다.
“황궁 정원을 산책하는데, 저 꽃이 눈에 밟히더군. 그대 생각이 나서 달려왔지.”
지랄도 풍년이다.
르네브는 익숙한 등짝과 뒤통수를 바라보며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당장이라도 루시우스의 뒤통수를 뚝배기로 깨고 싶은 마음이 올라왔다.
그때 루시우스가 살짝 고개를 돌려 르네브를 쳐다봤다.
“영애?”
“꽃 감사합니다. 황자 전하. 침실에 장식해 두겠어요.”
“별것 아닌 약소한 선물일 뿐이니, 그리 귀히 여기지 않아도 괜찮아.”
루시우스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깃들었다.
그는 얼마간 세이렌 후작저의 정원을 거닐며 이런저런 말들을 늘어놓았다. 황녀 대신 바슈케르행을 택한 르네브를 설득하러 온 게 틀림없으면서.
그렇게 걷다 보니,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작은 별장이 나왔다.
동화 속에 등장할 법한 아기자기한 외관 앞에서 루시우스의 걸음이 멈췄다.
세이렌 후작이 돌아가신 르네브의 어머니를 위해 지어 놓은 별장이었다.
“후작저에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군.”
이전 생에선 이 앞에서 루시우스와 첫 키스를 했었다. 그때의 르네브는 설레서 잠 못 이뤘었다. 솔직히 루시우스의 미모가 대단히 뛰어난 건 맞았으니까.
“영애?”
루시우스가 잠시 회상에 잠겨 있는 르네브를 일깨웠다.
“햇빛이 강해지고 있네요. 전하, 이만 돌아가는 게 어떠신가요?”
르네브는 별장에서 시선을 떼어 내고는 루시우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그리고 흠칫 놀랐다. 어느새 루시우스가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전하?”
눈이 마주치자 루시우스의 고개가 르네브 쪽으로 서서히 기울었다. 살짝 가늘어진 눈매 사이의 푸른 벽안이 르네브의 입술을 가만히 응시했다.
‘아, 몇 마디 말 대신 몸으로 설득을 하시겠다?’
르네브는 잠시 루시우스의 그윽한 눈을 바라봤다.
그리고,
“헷, 취!”
억지 재채기로 상황을 모면했다. 순식간에 망가진 분위기 때문인지 루시우스의 반듯한 미간이 좁아졌다.
“감기 기운이라도 있는 모양이군. 그만 저택으로 돌아가도록 하지.”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황자 전하.”
르네브는 안면 몰수하고 무릎을 살짝 굽혀 예를 갖췄다.
여전히 반보 앞서 저택 쪽으로 향하던 루시우스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살짝 그를 비켜 지나가려는데, 루시우스가 돌연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르네브…….”
“내 몸에 손대지 마!”
르네브는 반사적으로 언성을 높이며 붙잡힌 손목을 뿌리쳤다.
순간 아차 싶었다. 지금은 발톱을 숨겨야 할 때라는 사실도 잊고 속내를 드러내 버린 셈이니.
하지만 루시우스가 가까이에 있는 것도, 옆에서 숨을 쉬는 것도 시련처럼 다가왔기에 이제 한계였다.
“르네브.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루시우스가 약간 피곤하다는 표정으로 르네브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가했다.
“읏…….”
“3년.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너도 잘 알고 있을 텐데?”
“황자 전하께 제가 바슈케르로 떠나면 안 될 이유가 있나요?”
르네브는 루시우스의 물음에 질문으로 답했다.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루시우스가 말했다.
“르네브, 보통의 귀족과 달리 황가의 혼사가 이르다는 것쯤을 알고 있잖아. 내 입장을 좀 이해해 줄 수…… 하아.”
말을 뱉으면서 분노가 치밀었는지 루시우스가 르네브의 손목을 더욱 세게 쥐었다.
“아!”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참고 있었지만, 붙잡힌 손목이 너무 아팠다.
연약한 르네브의 몸과 달리 검술을 익힌 루시우스의 힘에는 극명한 차이가 있었으니.
“이거, 놓아주세요.”
“넌 날 절대 못 벗어나. 르네브.”
그 말과 동시에 루시우스가 르네브의 손목을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이, 미친, 새끼가.’
르네브는 거칠게 부딪혀 오는 루시우스에게 저항하려 몸을 비틀었다.
그러나 루시우스가 강하게 끌어안는 통에 쉽지 않았다.
그는 우악스럽게 르네브의 턱을 붙잡았다. 르네브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큭……!”
르네브는 틈을 놓치지 않고, 루시우스의 입술을 물어뜯었다.
뇌가 분노로 점철된 상태였음에도 나름 힘 조절은 했다. 이번 생엔 황족 상해죄로 죽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럼에도 루시우스의 입술에 붉은 피가 방울져 맺혔다.
“르네브. 이게 무슨……!”
일그러진 표정으로 루시우스가 손을 들어 올렸다. 르네브가 반사적으로 루시우스에게 고자 킥을 날리려던 순간이었다.
“……?”
르네브와 루시우스의 얼굴 사이로 무언가 날아들었다. 바닥을 나뒹구는 자그마한 돌멩이를 발견한 루시우스가 소리쳤다.
“르윈! 르윈!”
곧이어 황실 기사들이 달려왔다.
“부르셨습니까. 황자 전하!”
루시우스가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돌멩이를 주워 들었다. 그러고는 돌멩이가 날아든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변을 수색해.”
“예!”
황실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루시우스의 주위를 에워쌌다. 일부 기사들은 주변을 수색하러 흩어졌다.
“황자 전하. 마차로 모시겠습니다!”
위험 상황이라 판단한 기사들이 루시우스에게 황궁으로 돌아갈 것을 권했다.
“르네브.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이런 도를 넘은 무례를 참아 주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니까.”
붉게 맺힌 핏방울을 혀로 느리게 핥으며 루시우스가 낮게 경고했다.
속히 자리를 벗어나는 루시우스와 기사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르네브는 미간을 모았다.
“겁도 없이……. 대체 누가?”
***
르네브는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소리쳤다.
“패트릭! 패트릭?”
“아가씨. 도련님께서는 외출하셨습니다.”
르네브의 목소리를 듣고 달려온 집사가 패트릭의 행방을 알렸지만, 여전히 안심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어디 계셔?”
“패트릭 도련님과 함께 외출하셨습니다만…….”
둘 다 아니라면, 대체 누가 그런 위험한 짓을 한 거지?
황족의 몸에 상해를 입힐 뻔했으니 상대가 누구였든 발각됐다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었다.
“어디로 가셨는지 알아?”
“가주님께서는 황궁에 가셨고, 도련님께서는 살롱에 가신 것으로 압니다.”
“그래? 그럼 조금 전 자리를 비웠던 고용인이 있는지 알아봐 줘.”
“……예?”
“지금 당장.”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가씨.”
집사가 서둘러 떠나고 혼자 남겨진 르네브는 입술을 깨물었다.
패트릭과 아버지는 외출했다는 행적 증거가 남았으니 괜찮을 수 있다.
하지만 나중에 루시우스가 항의할 것을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아직은 이를 드러낼 때가 아닌데, 루시우스의 의심을 사 버렸으니…….
르네브는 창 너머로 후작저를 제집이라도 되는 양 들쑤시고 다니는 루시우스의 충실한 개들을 바라보며 입술을 잘근거렸다.
그때 꽃다발을 안은 하녀가 다가왔다.
“아가씨, 꽃이 참 싱그럽고 예뻐요. 황자 전하께서 직접 아가씨를 위해 준비하신 거라던데, 황자 전하께서는 참으로 로맨틱…….”
살짝 들뜬 듯 수다스럽게 떠들던 하녀가 르네브의 싸늘한 표정을 보고는 마른침을 삼켰다.
“……꽃병에 꽂아 둘까요?”
“아니야. 거기 둬.”
“네, 아가씨.”
하녀가 떠나자마자 르네브는 테이블 위에 놓인 꽃다발을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그러고는 구둣발로 마구 짓밟았다. 종내에는 꽃다발 위에서 아주 점프를 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꽃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다. 단지 꽃을 가져온 이에게 죄가 있을 뿐.
***
저택 고용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확인한 뒤에야 황실 기사들이 후작저를 떠났다.
다행히도 고용인들 모두 착실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던 터라 더 트집을 잡진 못했다.
기사들이 떠나고 나자 어느새 하늘이 저물고 있었다.
“패트릭도, 아버지도, 저택 고용인도 아니라면 대체 누구였을까…….”
르네브는 생각을 거듭하며 사건 현장으로 향했다.
어쩌면 단서를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반, 복잡한 마음을 달래려는 게 반이었다.
르네브가 별장 근처에 도착했을 때쯤. 어디선가 중저음의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하녀도 없이 혼자 산책이라니, 정말 겁이 없는 아가씨로군.”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르네브는 침착하게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몸을 돌렸다.
“……거기, 누구죠?”
그러자 저만치 떨어진 거리의 나무 위에서 검은 인영이 훌쩍 뛰어내렸다.
르네브보다 족히 두 뼘은 더 커 보이는 장신의 남자였다. 밝은 곳으로 걸어 나오자 이내 그의 얼굴이 완전히 드러났다.
“……!”
남자의 얼굴을 본 순간 르네브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바슈케르의 황제!’
르네브는 하녀나 호위 기사 없이 혼자 나온 것을 후회했다.
하지만 곧 그것들에 별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철통 보안이라 불리는 세이렌 후작저에 무단으로 침입했다면, 호위 몇 데리고 나왔다고 한들 하등 도움이 되지 못했으리라.
‘어째서 이 사람이 세이렌 후작저에 있는 거지?’
혼란스러웠다.
두려움을 느낀 르네브가 살짝 뒷걸음질 치자, 이카르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렇게 떨 것 없어. 해를 끼칠 생각 따윈 없으니까.”
르네브는 마른침을 삼키며 남자를 훑어봤다.
아무렇게나 흐트러뜨린 검은 머리.
노을빛처럼 붉은 눈동자, 완벽한 비율을 자랑하는 이목구비.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길고도 두툼한 목.
검은 셔츠로는 미처 감춰지지 않는 넓고 단단한 어깨와 두꺼운 팔뚝.
전쟁광이란 소문 그대로 가까이서 마주한 그의 위압감은 대단했다.
“마물을 맞닥뜨려도 그렇게 떨지는 않을 것 같군. 기세 좋게 유학에 자원하던 패기는 다 어디로 간 거야.”
팔짱을 낀 이카르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물었다.
그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었지만, 면식도 없는데 대뜸 아는 척을 할 수는 없다.
그래서 르네브는 그를 모르는 척했다.
“……누구신지, 신분을 밝히세요.”
겁을 잔뜩 집어먹은 티를 내고 싶지는 않았으나, 양처럼 떨려 나오는 목소리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나? 나는…… 바슈케르에 도착할 때까지 그대의 안전을 담당할, 호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