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의문이 남는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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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의문이 남는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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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의문이 남는 죽음
2023.04.06.
바슈케르의 황제 이카르는 과거에도 결혼은커녕, 그쪽 방면으로는 소문이 아주 깔끔했으니까.
그뿐이 아니었다.
황녀는 강제 유학길에 오른 타국의 왕녀 및 유력 귀족과 친분을 쌓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막대한 보상금까지 챙겨서 귀환한다.
그러니 금의환향이 맞았다.
하지만 내밀한 속사정을 알지 못하는 보수적인 귀족들 사이에서는 1황녀와의 혼담을 꺼리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그 때문에 황녀의 혼삿길이 막히기는 했다.
하지만 르네브에겐 그마저도 상황이 매우 바람직한 미래로 가는 지표처럼 느껴졌다.
이번 생에는 비혼으로, 돈 펑펑 쓰며 잘 살아 주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착실히 힘을 모아 황비와 루시우스, 에시카를 몰락시킨 뒤에.
그렇기에 르네브로선 세이렌 후작가의 두 남자가 저리 죽상을 쓰는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설득은 필요해 보였다.
“걱정 마세요. 제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바슈케르 제국은 기회의 땅이니까요.”
“……?”
세이렌가의 두 남자가 동시에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어차피 말 한마디로 설득할 수 없을 거란 예상을 했던 터라, 르네브는 침착하게 바슈케르행의 이점을 조목조목 열거했다.
“첫째로, 오늘 황비 전하께선 저와 루시우스의 혼담을 공론화하려 했었어요.”
“뭐?”
“뭐라?”
이번엔 다른 이유로 인해 세이렌가 두 남자의 미간이 잔뜩 좁아졌다.
“우리 세이렌 후작가와는 일말의 상의조차 없었던 일이죠.”
르네브의 말이 끝나자마자 두 남자가 분통을 터뜨렸다.
“미친 거 아니야?”
“그건 우리 가문을 무시하는 처사가 아니냐!”
과거에도 두 남자는 황비 좋을 대로의 행동에 이를 갈았다.
하지만 루시우스의 유혹에 풍덩 넘어가 있던 르네브는 가족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었다.
결국, 두 남자는 르네브의 뜻을 꺾지 못했다.
사랑한다는데 어쩌겠는가.
“아버지 말씀이 맞아요. 황비 전하께서는 저와 루시우스 황자 전하 사이에 어떠한 기류가 흐른다고 착각해서 벌인 일이었을 거예요.”
원작에서의 세이렌가 두 남자는 상당히 이성적이고 냉철한 성격으로 그려졌다.
회귀 전에는 두 남자와의 접점이 적어서 잘 몰랐는데, 지금 보니 둘 다 상당한 다혈질 같았다.
원작과는 약간 달라진 둘의 면모에 조금 당황했지만, 르네브는 현 상황에 집중했다.
황후에 버금가는 권력을 누리는 황비와 대놓고 대적하는 건 옳지 않았다.
세이렌 후작가의 권세가 강한 것은 맞으나, 황비와 전쟁을 한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세이렌 후작령의 사람들에게 돌아갈 테니.
“그…… 르네브. 3황자 전하를 마음에 둔 게 아니었어?”
패트릭이 조금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와 같은 생각인지 세이렌 후작도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르네브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머, 오빠도 참. 그게 무슨, 소리야.”
르네브는 거친 말이 튀어나오려는 걸 간신히 억누르고 옅게 미소 지었다.
“당연히 아니지. 구두도 짝이 있다고 하잖아. 그분께 어울리는 짝이 있겠지. 하지만 그게 난 아니야.”
패트릭이 르네브의 눈치를 살피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 그랬어? 그것도 모르고…… 미안. 난 좀 오해하고 있었네.”
“사실 이 아비도 르네브 네가 3황자 전하께 마음이 있다고 오해하고 있었단다. 다행이구나.”
묘하게 안도하는 두 사람에게 르네브가 물었다.
“다행이라니요?”
“이 아비는 네 짝으로 3황자 전하가 성에 차진 않았단다.”
“나도 말은 안 했지만. 같은 생각이었어. 르네브.”
“두 분은 왜 그렇게 생각하셨어요?”
차분히 묻는 르네브에게 패트릭이 말했다.
“뾰족하게 이렇다고 이유를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내 감이 그래.”
세이렌 후작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르네브는 두 남자가 사람 보는 눈이 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3황자 전하와의 결혼을 피하기 위한 목적이었다면 다른 방법도 있었을 게 아니냐.”
세이렌 후작의 말에 르네브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3황자 전하와 결혼 시기를 미룰 수는 있겠지만, 피하는 건 어려울 거예요.”
“…….”
“임시방편으로 다른 귀족과 약혼한다 해도 황비 쪽에서 손을 써 파혼시키려 들겠죠.”
“흠…….”
르네브의 생각에 동의하는 듯 두 남자의 얼굴에 근심이 드리웠다.
“그리고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인데요. 떠도는 소문과 달리 바슈케르 황제께서는 상당히 신실한 분이세요.”
두 남자가 눈빛을 교환했다.
유서 깊은 세이렌 후작가의 영애는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라 왔다. 그런 그녀가 먼 타국의 상황을 자세히 알 리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물론 바슈케르의 황제, 이카르가 신실하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세이렌 후작가의 두 남자가 걱정할 만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거라는 건 확실했다.
“그건 그렇고, 르네브. 황비 전하께서 약혼 발표를 하려던 것과 바슈케르 제국에서 황녀 전하를 초청했다는 걸, 넌 어떻게 알게 된 거야?”
르네브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로 입안 여린 살을 깨물었다.
패트릭, 예리한데?
“그래, 맞다. 왜 이 아비에게 진즉 도움을 청하지 않았느냐.”
패트릭의 말에 힘입어 후작까지 르네브를 채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뱉은 말과 달리 르네브 혼자서 문제를 해결하게 둔 것이 미안한 눈치였다.
최근까지 서쪽 변방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르느라, 황궁 소식에 다소 느렸던 것도.
“그건 말이죠…….”
르네브는 황궁에서 길을 잃었고, 그때 우연히 황후가 곤란한 처지라는 걸 알게 되었다고 둘러댔다.
“연인이라 공표하려 했던 건 루시우스 황자 전하께서 제게 미리 언질을 주셨어요.”
“…….”
“이전에 황비 전하께서 따로 저를 황궁에 불러들인 적도 있으셨고요.”
설명을 마치자, 세이렌가 두 남자의 입매가 꾹 다물렸다.
두 사람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형형한 눈빛으로 보아, 둘 다 속으로 이를 가는 게 틀림없는 것 같았다.
***
“르네브, 내가 밤새 생각을 해 봤는데 말이야.”
핏물이 흐르는 토마호크 스테이크를 우걱우걱 씹어 삼킨 패트릭이 말했다.
마찬가지로 사람 얼굴만 한 토마호크 스테이크를 나이프로 가르던 세이렌 후작이 르네브를 쳐다봤다.
반면 그녀의 앞에는 신선한 토마토 카프레제와 홍차 정도만이 간소하게 차려져 있었다.
“무슨 생각을 했는데?”
“유학 기간이 3년이라고 했잖아. 너와 닮은 다른 사람을 보내고 그 기간 동안만 세이렌 후작령의 시골 마을에서 몸을 보신하고 있는 게 어때?”
“그래. 다소 혼기를 넘기게 되겠지만, 이 아비가 세이렌 후작령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네게 좋은 남편감을 꼭 찾아 주마.”
밤늦게까지 무슨 대화를 그리 나누나 했더니, 이거였던 모양이다.
“바슈케르 황제께서 그렇게 허술한 분은 아니실 거예요.”
접시에 담긴 음식을 반도 비우지 않은 채로 르네브는 입가를 닦았다.
“만약 저를 대신한 사람이 가짜라는 게 들통이라도 난다면, 양국 간에 큰 불화로 번질 가능성도 있고요.”
르네브가 단칼에 거절하자 세이렌 후작은 와인으로 마른 목을 축였고, 패트릭 또한 초조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은발에 자색 눈을 가진 제 또래의 여자를 찾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겠죠.”
르네브가 자리를 털고 일어서려 하자, 세이렌 후작이 덧붙였다.
“이 아비가 다른 방법을 찾아보마. 르네브 너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르네브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감사해요. 아버지. 식욕이 없어서 먼저 일어날게요.”
떠나기로 마음은 먹었지만, 딸을 보호하려 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마음이 쓰였다.
이전 생에 세이렌 후작은 전장에서 죽었다. 그의 검 실력은 소드마스터에 버금갈 정도라고 원작에 기술되어 있었다.
‘그런 그가 전장에서 죽다니?’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이었지만, 그때의 르네브는 자기 일만으로도 벅찼다.
그래서 세이렌 후작의 죽음에 대해 제대로 파헤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날 제거하기 전에 세이렌 후작부터 해치운 건가…….’
하지만 이번 생에서는 그녀가 유학을 마치고 돌아올 동안은 두 사람도 안전할 터였다.
***
곧 세이렌 후작저를 떠날 거란 르네브의 한마디에 이른 아침부터 하녀들은 그녀의 짐을 챙기느라 분주히 움직였다.
꺼내 놓은 짐이 한가득인 걸로 보아 그녀들은 르네브가 이민이라도 떠난다 생각한 모양이었다.
“가는 동안에 입을 드레스 몇 벌 정도만 챙기면 돼.”
그것만으로 되겠냐는 시선으로 르네브를 쳐다보던 하녀들이 마지못해 꾸벅 허리를 숙였다.
“네, 아가씨.”
르네브는 잠시 그녀들을 바라보다 정원으로 향했다. 산책이 뇌의 생각 회로를 자극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로 여기도 마지막이겠구나.”
르네브가 불어오는 바람결에 흩날리는 은발을 쓸어 넘겼을 때였다. 멀리서부터 달려온 하녀가 다급하게 말을 쏟아 냈다.
“아가씨! 화, 황자 전하께서 저택에 방문을…….”
그러나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쪽으로 걸어오는 루시우스가 보였다.
푸른 제복에 흰색 크라바트를 단정히 맨 루시우스가 건치를 드러내며 환히 미소 지었다. 루시우스의 백색 치아가 태양 빛을 머금고 반짝였다.
그 모습을 바라본 르네브는 콩깍지가 벗겨졌음을 확신했다. 이전 생에는 저걸 멋있다고 생각했다니, 자신이 단단히 미쳐 있었구나 싶었다.
“아침 산책이라도 하는 모양이군.”
그렇게 말하며 루시우스가 또다시 미소 지었다.
웃어? 웃음이 나와?
르네브가 루시우스의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손을 살짝 들어 올렸을 때였다.
“황자 전하.”
황실 기사 한 명이 다가왔다. 그는 품에 가득 찰 만큼의 꽃을 안고 있었다.
르네브의 눈에 저만치 떨어진 거리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황실 기사들이 들어왔다.
그중에는 죽기 전 르네브를 호송했던 기사도 섞여 있었다.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나자, 르네브의 양 뺨이 분노로 상기됐다.
“아름다운 레이디에게는 꽃이 어울리지.”
루시우스가 꽃을 들고 있는 기사에게 턱짓했다. 기사가 르네브에게 꽃다발을 내밀었다.
“황자 전하께서 직접 준비하셨습니다.”
르네브는 신선해 보이는 핑크 백합을 흘끗 내려다봤다.
‘루시우스가 직접? 아니겠지.’
황비가 챙겨 가라고 떠안겼을 가능성이 다분했다.
르네브는 픽 코웃음 쳐 버렸다.
그걸 기쁨의 미소라 착각이라도 한 듯 루시우스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드리웠다.
“역시, 예상대로 그대와 매우 잘 어울리는군.”
르네브는 꽃다발을 받지 않고 쳐다만 봤다. 그러자 루시우스가 덧붙였다.
“레이디의 가녀린 팔로 들기에는 꽃다발이 다소 무거워 보이는군. 저기 있는 하녀에게 건네주도록.”
“예, 전하.”
기사가 멀어지고, 둘만 남게 되자 루시우스가 한 손을 내밀며 물었다.
“산책 중이었다면, 동행해도 괜찮겠나?”
태어난 순간부터 고귀한 신분을 타고난 루시우스의 동작에는 우아한 기품이 배어 나왔다.
그리고 책 속에 막 빙의했던 이전 삶에서 르네브는 그런 모습을 조금 멋지다고 생각했었다.
등신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