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제가, 자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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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제가, 자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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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제가, 자원하겠습니다
2023.04.05.
르네브는 결의를 다진 표정으로 황후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따뜻했다.
‘이 사람이 루시우스의 어머니였다면…….’
잠시 그런 생각을 한 르네브는 곧 고개를 저었다.
이번엔 서로의 수지 타산이 맞아떨어졌을 뿐이다.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물론 혼자 짊어져야 할 무거운 관을 잘 버티고 있는 황후에게 약간의 동질감을 느낀 것도 한몫했지만.
***
그레이트 홀로 접어드는 복도.
그 앞에서 눈을 가늘게 뜬 황비가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잠깐 자리를 비울 거라고 하더니, 황후 폐하와 함께이실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네요. 세이렌 후작 영애.”
어디 입이 있으면 설명을 해 보라는 듯 황비가 비아냥거렸다.
황비와 황후 두 사람 다 표면상으로는 크게 문제없는 듯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그들이 서로를 얼마나 죽이고 싶어 하는지를.
편이 되겠다 했던 적도 없었거늘, 혼자서 르네브를 자신의 편이라 생각하고 있던 황비에게 지금 이 상황은 완전한 배신이었다.
“파우더 룸으로 가려다 길을 잃었던 모양이에요. 눈물까지 글썽이고, 얼마나 가엽던지…….”
황후가 르네브를 측은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너스레를 떨었고, 르네브 또한 이 하찮은 연극에 가담했다.
“곤란한 상황에서 손을 내밀어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황후 폐하.”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미간을 모으고 있던 황비가 르네브의 손을 덥석 잡았다.
“하긴, 서쪽 변방에만 처박혀 지냈으니 호위라고 있어도 황궁 안을 제대로 안내할 수가 없었겠군요.”
불똥이 르네브의 뒤에선 기사 젠에게 튀었다.
난데없이 비난을 들은 젠이 조금 가여워 르네브는 그를 향해 살짝 눈인사를 건넸다.
세이렌 후작가를 모욕하는 듯한 황비의 발언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던 젠이 르네브의 눈짓을 보고는 빠르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황비 전하.”
황후가 잡고 있던 르네브의 손을 살며시 놓으며 옅게 미소 지었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요, 영애.”
르네브도 살짝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황후 폐하께서도 즐거운 시간 되시기를.”
그러자 못마땅한 시선으로 두 사람을 보고 있던 황비가 르네브의 손을 잡아당겼다.
르네브는 목줄에 묶인 개처럼 황비의 손에 끌려가며 조금 전의 대화를 복기했다.
‘때가 되면 제가 신호를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황후 폐하.’
‘좋아요. 어떤 방식일지는 모르겠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겠어요.’
“어디 멀리 다녀오셨나 보죠?”
그레이트 홀로 들어서자, 황비의 측근 시녀들이 다가왔다.
“그러게요. 잠깐 자리를 비운다고 하시더니, 한참 보이지를 않으셔서 황궁 안을 죄다 들쑤실 뻔했지 뭐예요.”
황비의 비위를 맞추려는 듯 측근 시녀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르네브는 옅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녀들에게도 과거에 맺힌 한이 많았기에, 말조차 섞고 싶지 않아서였다.
“파우더 룸으로 가던 중에 길을 잃었다고 하시네요. 우리 세이렌 후작 영애께서요.”
“앞으로는 그레이트 홀에서 파우더 룸으로 향하는 길은 이쪽이라고 푯말이라도 세워 두는 게 좋을까요?”
황비의 말을 시녀 중 한 명이 받았다.
이내 그녀들 사이에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르네브는 그저 인내했다. 잠시 후에 있을 복수의 짜릿함을 기대하며.
“아, 참 귀부인들을 모아 주겠어요? 아까 전하지 못한 소식을 이제 전하려고 하는데.”
황비의 명령에 시녀들이 그레이트 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사이 르네브를 이끌고 그레이트 홀 중앙으로 향하던 황비가 두리번거렸다.
“그건 그렇고, 루시우스 황자께서 보이질 않으시네. 주인공께서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건지.”
“그러게요. 황궁 안에서 길을 잃으셨을 리는 없으실 테고…….”
지나가듯 건넨 말에 황비가 르네브를 돌아봤다.
아무리 넓다고 한들, 제집인 황궁 안에서 루시우스가 길을 잃는 것이 가당키나 하냐는 표정이었다.
“어릴 적에는 황자 전하께서도 가끔 길을 잃으셨다고 하셨거든요.”
르네브는 조금 전 들었던 핀잔을 그대로 돌려주고는 배시시 웃었다.
“내가 말을 말아야지.”
대화가 안 통한다는 듯 황비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고는 근처에 있는 하녀에게 지시했다.
“황자 전하를 모셔 오렴.”
“황자 전하라 하시면, 3황자 전하를 말씀하시는 게 맞으십니까?”
하녀의 물음에 황비의 입매가 비틀려 올라갔다. 이건 화를 내기 직전의 황비가 자주 보이던 반응이었다.
3황자.
그러니까 루시우스를 지칭하는 것 중 황비가 가장 싫어하는 호칭이었다. 그걸 황위와의 먼 거리를 나타내는 척도쯤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황비 전하, 저기 귀부인들께서 오시네요.”
르네브는 부러 이쪽으로 걸어오는 귀부인 무리를 가리켰다.
“루시우스 황자 전하를 찾아오렴. 냉큼!”
하녀에게 일갈한 황비가 굳었던 표정을 풀고 귀부인들을 맞이했다.
“황비 전하께서 저희에게 전할 말씀이 있으시다고요? 어떤 좋은 소식인지 정말 궁금하네요.”
몇몇 귀부인들의 시선이 맞잡은 황비와 르네브의 손으로 내려갔다.
그녀들도 황비가 대충 무슨 소리를 할지 이미 짐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황비가 먼저 이야기를 꺼낼 때까지 잠자코 기다릴 모양이었다.
“다들 알고 계시겠지만. 루시우스 황자 전하께서 성년식을 치르신 지도 한참이 지났잖아요?”
황비가 서두를 꺼내자, 귀부인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르네브는 속눈썹을 드리운 채로 가만히 황비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척했다.
빌드업 속에 아들 자랑을 곁들이던 황비가 마침내 중요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서 너무 늦어지기 전에 약혼을 진행하려고 하는데, 그 상대 아가씨가 바로…….”
그렇게 말하며 황비가 르네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조금 전부터 몸을 흐느적거리던 르네브가 돌연 쓰러졌다.
“……!”
“어머, 세상에! 영애, 괜찮으세요?”
“멀쩡히 계시다가 왜 갑자기……. 평소에 지병이라도 앓으셨던 걸까요?”
“누가 황궁의 좀 불러오세요!”
갑작스러운 상황에 귀부인들이 혼비백산하는 사이.
“영애! 정신 좀 차려요. 세이렌 영애.”
르네브는 제 뺨을 찰싹찰싹 내려치는 황비의 매서운 손길에도 감은 눈을 뜨지 않고 버텼다.
“……르네브?”
그때 소란을 듣고 이쪽으로 다가오던 패트릭이 르네브를 발견했다.
“르네브! 정신 좀 차려 봐.”
당황해 목소리를 높이던 패트릭이 우연인 척 은근히 황비를 밀치고는 르네브를 안아 올렸다.
약간 실눈을 뜨고 있던 르네브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꾹 참았다.
“대체 무슨 소란이죠?”
그리고 드디어 황후께서 행차하셨다. 그녀가 르네브를 안아 든 패트릭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세이렌 후작 영애께서 쓰러진 건가요?”
다급한 상황에서 황후가 길을 막자, 패트릭의 목소리에 조금 짜증이 섞였다.
“한시가 급하니 비켜 주십시오.”
“제 아들의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황후 폐하.”
세이렌 후작과 소후작이 르네브를 챙겨 서둘러 황후를 스쳐 지나가려는 순간이었다.
“으음…….”
르네브는 몸을 바르작거리며 슬며시 눈을 떴다.
“르네브! 괜찮아?”
“딸아, 괜찮은 거냐!”
르네브는 소리치는 가족들을 뒤로하고 황후를 쳐다보며 눈을 살짝 찡긋했다.
‘지금이에요. 황후 폐하.’
“별일 아닌 것처럼 말씀하시더니……. 그래도 후작 영애께서 여간 신경이 쓰이셨나 보군요.”
다행히 르네브의 눈 사인을 알아챈 황후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황후 폐하, 저희 딸아이가 신경 쓰는 일이란 게 무엇입니까?”
세이렌 후작이 의아한 눈으로 묻자, 황후가 실수했다는 듯이 입을 가렸다.
“이런……. 세이렌 후작께서는 아직 듣지 못하신 모양이군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는 표정으로 세이렌 후작이 르네브를 쳐다봤다.
르네브는 패트릭의 품에서 내려와 바닥에 두 발로 선 채 대답했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갑작스러운 르네브의 실신으로 모여들었던 귀족들을 흘끗 바라보며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바슈케르 제국의 황제께서 황녀 전하께 바슈케르로 유학을 권하셨다더군요.”
세이렌 후작과 패트릭을 비롯해서 모여 있던 귀족들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바슈케르 제국군이 남쪽과 북쪽에 은밀히 주둔해 있는 지금 상황을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몸이 약하신 황녀 전하께서 먼 길 떠나다 몸이라도 축날까 걱정하시는 황후 폐하의 속사정을 우연히 알게 되어…….”
르네브가 거기까지 말하고는 황비의 안색을 살폈다.
황비는 지금 저게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려는 건가 하며 노심초사하는 표정이었다.
르네브는 조소가 나오려는 걸 꾹 참으며 지금 하는 중요한 이야기를 들어야 할 또 다른 사람을 눈으로 좇았다.
때마침 이쪽으로 걸어오는 루시우스와 눈이 마주쳤다. 르네브는 그를 향해 아련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말을 이었다.
“황녀 전하 대신 유학길에 오르겠다고 제가, 자원했습니다.”
“……!”
세이렌 후작과 소후작의 입이 떡 벌어졌다.
황비 또한 어깨를 딱딱하게 경직시킨 채로 눈을 부릅떴다.
앞의 상황을 잘 모를 루시우스의 미간도 보기 좋게 구겨졌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황비와 루시우스는 어쩌면…….’
황녀가 바슈케르의 볼모로 끌려갈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건가?
황비라면 황후 곁에 측근 하나쯤은 심고도 남았다.
르네브는 속으로만 고개를 끄덕이며 빠르게 셈을 했다.
물론 겉으로는 공양미 삼백 석에, 인당수로 몸을 던진 심청이처럼 가련한 표정을 유지한 채였다.
“르네브 세이렌. 그대가 몸이 약한 황녀를 위해 애써 주었다는 것. 파라디움 황후로서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황후가 르네브를 살짝 끌어안는 것으로 이 연극의 화룡점정을 찍었다.
르네브는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매섭게 자신을 노려보는 황비를 힐끗 봤다.
자신의 계획대로 일이 돌아가지 않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황비다.
그런 그녀의 계획을 엉망으로 만든 것만으로도 약간의 복수는 성공한 셈이었다.
그러나, 아직 멀었다. 받은 것을 대갚음해 주기에는.
그리고 이 상황은 바슈케르의 제안에 급히 대책 회의를 하던 황제의 귀에도 들어갔다.
***
세이렌 후작저로 돌아가는 마차 안, 르네브는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을 맛보고 있었다.
왜냐면 맞은편에 나란히 앉은 세이렌가의 두 남자가 매섭게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르네브. 그런 건 너 혼자서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고.”
“르네브. 어째서냐.”
원작에서도 회귀 전에도 1황녀는 3년의 유학 기간이 지나 파라디움 제국으로 금의환향했다.
물론 대다수의 귀족은 그녀의 귀환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가 역대 바슈케르 황제들의 후궁들이 머물던 화원에서 지낸 적이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황녀가 난봉꾼이란 소문이 무성한 황제의 밤 시중을 들었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다.
하지만 진실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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