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폐위된 황후 (1/148)


#1화 폐위된 황후
2023.04.01.


#프롤로그

파라디움 제국의 건국제를 맞아 한껏 치장한 귀족들로 즐비한 황궁의 그레이트 홀.

“바슈케르 제국의 황제 폐하 드십니다!”

소란스러운 가운데 시종이 외쳤다.

적국 황제의 등장에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입구로 향했다.

당당하게 걸어 들어오는 한 쌍의 남녀를 보며 귀족들이 소리 죽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남자는 바슈케르 제국의 냉혈한 젊은 황제 이카르였고, 그의 팔짱을 낀 채 미소 짓고 있는 여자는 다름 아닌 파라디움의 세이렌 후작 영애였기 때문이다.

3년 전, 그녀는 제국 간 평화 협정의 희생양이 되어 바슈케르로 떠났었다. 그런 그녀와 적국 황제는 어쩐지 연인처럼 다정해 보였다.

두 남녀가 홀 중앙에 도착했을 즈음이었다.

“……르네브?”

팔짱을 끼고 나란히 선 두 사람의 모습에 파라디움의 제3황자, 루시우스의 표정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그 뒤로 걸어오던 황비 또한 두 사람을 보고는 미간을 모았다.

“세이렌 후작 영애?”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자 전하, 황비 전하.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르네브는 이카르의 팔을 살살 쓰다듬으며 옅게 미소 지었다.

“르네브,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루시우스가 험악한 표정으로 따져 물었다. 그 사이로 황비가 끼어들었다.

“세이렌 후작 영애?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이 필요할 것 같군요.”

“설명이라…….”

이쪽을 주목 중인 귀족들 틈에서 르네브는 익숙한 얼굴을 발견해 냈다.

루시우스의 정부, 에시카.

그녀의 입매가 살짝 비틀렸을 때였다.

“바슈케르 제국의 황후가 되실 분이니, 부디 그에 맞는 예우를 갖추길 권하지. 황비. 그리고 황자.”

이카르가 싸늘하게 경고했다.

“마, 말도 안 돼! 그게 무슨……!”

너무 당황한 나머지 황비는 말을 더듬었고,

“지난 3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래…… 우리 사이에 대화가 필요할 것 같다. 그렇지, 르네브?”

루시우스는 꽉 쥔 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전 생에서 지속적인 가스라이팅을 하며 르네브를 멋대로 휘두른 시어머니 황비.

그리고 평생 헌신했지만 결국 자신을 죽여 버린 남편, 루시우스.

마지막으로 그가 사랑해 마지않는 아름다운 정부, 에시카까지.

“황제 폐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저와 황제 폐하는 결혼을 약속한 사이니까요.”

르네브는 경악하는 그들의 표정 하나하나를 눈에 담으며 달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번 생엔 너희가 당할 차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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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폐위된 황후

넓고 높은 천장에는 수십 개의 촛대로 이루어진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크림색 벽면은 명화와 조각상들이 자리 잡은 응접실.

르네브는 폭신한 크림색 소파에 앉아 티타임을 가지고 있었다. 하루 중 황후에게 주어지는 얼마 안 되는 귀중한 휴식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테이블 위에는 오전 시간에 미처 보지 못한 서류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찻잔을 내려놓은 르네브가 막 서류를 집었을 때, 노크 없이 응접실 문이 열렸다.

그 틈으로 금빛 작은 머리통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잠시 눈을 깜빡인 르네브의 입가에 금세 미소가 드리웠다.

“카엘.”

“어머니!”

짧은 다리를 도도도 놀려 응접실로 뛰어 들어온 카엘이 르네브의 드레스 자락에 폭 안겨 들었다.

르네브는 어린 아들의 응석이 기꺼우면서도 황자가 마땅히 받아야 할 수업을 빼먹고 찾아왔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카엘, 지금은 수업 시간이 아니었나요?”

짐짓 엄한 르네브의 목소리에 카엘의 자그마한 어깨가 시무룩하게 처졌다.

“네에…….”

그게 너무 귀엽고도 안쓰러웠다.

어릴 때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는 귀족 아이들도 카엘 나이 때에는 바깥에서 뛰어놀았다.

쉴 틈 없이 이어지는 교육이 버거울 만도 하다.

물론 지치는 건 르네브도 마찬가지였다. 바쁜 업무를 마치고, 잠든 아들의 얼굴을 잠깐 들여다보는 게 하루의 전부였으니까.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었는데……. 잠깐 여기 있다 가면 안 돼요?”

고사리 같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카엘이 입술을 뚜하게 내민 채로 고개를 들었다.

어머니의 따뜻한 품을 그리워한 모양이었다.

르네브는 카엘을 안아 올리고는 잠시 등을 토닥였다. 카엘이 금세 르네브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보러 와도 괜찮아요. 그렇지만 정당한 이유 없이 수업을 빼먹는 건…….”

순간 복도 너머로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복도에서 예의 없이 누가…….’

르네브는 미간을 찡그렸다. 이내 교육 담당이 카엘을 찾으러 온 것이라 여기며 말을 이었다.

“옳지 않아요.”

“네에…….”

주눅이 들었는지 금세 카엘의 동그란 눈꼬리가 시무룩하게 내려갔다.

“그럼 잠깐 여기 있다가 다시 수업을 들으러 간다고 약속해요.”

“정말 그래도 돼요?”

허락이 떨어지자 카엘의 얼굴이 밝아졌다. 르네브의 얼굴에도 미소가 깃들었다.

그때.

갑자기 응접실 안으로 황제 직속 기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예사롭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것이라 직감한 르네브는 카엘을 등 뒤로 숨기고는 근엄하게 말했다.

“뭣들 하는 겁니까? 내가 황후라는 사실을 잊은 건 아니겠죠? 그리고 여기가 내 휴식처라는 것도.”

황후의 위엄에 맨 앞에 서 있던 기사 둘이 주춤 뒤로 물러났다.

“주저할 것 없다! 반역자를 속히 연행하라는 황제 폐하의 명이 있었으니.”

기사들의 가장 뒤편에 서 있던 기사 단장이 지지 않고 받아치자, 다시금 기사들이 르네브 쪽으로 다가왔다.

“황제 폐하의 명이라니, 대체 무슨 일인가요?”

내심 당황했지만, 르네브는 태연하게 전후 사정을 따져 물으려 했다.

하지만 기사들이 우악스러운 손길로 르네브의 양팔을 붙잡았다.

“이게 무슨 무엄한 짓이냐! 이분은 황후 폐하시다!”

예고 없이 들이닥친 기사들 때문에 잔뜩 움츠러들었던 카엘이 버럭 소리쳤다.

“카엘 황자, 걱정하지 마세요. 뭔가 오해가 있었을 겁니다.”

그렇게 르네브가 아들을 다독이는데, 기사 단장이 무감한 표정으로 기사에게 명령했다.

“황후와 황자, 둘 다 연행한다!”

“……!”

***

수도 중심지에 자리한 광장에는 황후의 처형을 보러 온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모여 있었다.

“반역자를 처단하라!”

“적국과 내통한 황후를 화형하라!”

군중 틈 사이로 끌려가던 르네브는 고막을 때리는 함성에 미간을 모았다.

‘반역자라니? 적국과 내통이라니?’

전부 르네브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성난 사람들의 반응이 제게 쏠려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해 보였다.

“이건, 뭔가…… 잘못됐어.”

르네브가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리는데,

퍽!

뒤통수에 아릿한 통증이 일었다. 그것도 잠시, 이번에는 이마로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고통을 호소하기도 전, 사방에서 뻗어 나온 손들이 르네브의 머리카락과 드레스를 쥐어뜯었다.

곱게 틀어 올린 부드러운 은발은 산발이 되었고, 주름 하나 없이 단정하던 드레스도 엉망이 돼 버렸다.

그렇게 혼비백산한 채로 떠밀리다 보니 어느새 단두대 앞이었다.

“패트릭……? 어째서?”

단두대 앞에는 르네브의 오빠 세이렌 후작이 양 무릎을 꿇은 굴욕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르네브의 처참한 몰골에 패트릭의 얼굴에 패색이 짙어졌다.

“르네브, 지켜 주지 못해 미안하다…….”

르네브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패트릭을 쳐다보고 있는데, 곁에 있던 기사가 그녀의 오금을 걷어찼다.

너무 아픈 나머지 비명도 내지르지 못하고 르네브는 패트릭의 옆에 꿇어앉혀졌다.

이내 등 뒤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적국과 내통한 죄로 황후 르네브 파라디움을 폐위한다! 그에 가담한 세이렌 후작은 파면. 세이렌 후작가의 재산과 영토를 몰수해 파라디움 황가에 귀속…….”

모여든 군중의 함성이 높아졌다. 르네브 또한 힘껏 소리쳤다.

“사실이 아니야! 이건 누군가의 모함이라고!”

하지만 그녀의 간절한 호소에 관심을 기울일 이는 아무도 없었다.

“황제! 루시우스를 불러 주게. 그라면 내 결백을 증명…….”

르네브는 가까이 있는 기사에게 간청했다.

“감히 그분의 존함을 함부로 입에 올리다니. 아직도 네가 황후인 줄 아느냐?”

하지만 돌아온 건 비난과 주먹질이었다.

“아아악!”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으로 나자빠진 르네브의 시야에 단두대 앞으로 끌려가는 패트릭의 모습이 보였다.

“아, 안 돼! 패트릭!”

순간 서슬 퍼렇게 날을 벼린 칼날이 태양 빛에 반사되어 시야를 가렸다. 르네브가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버둥거렸을 때였다.

“와아아아아!”

군중의 함성이 거세지더니,

쿵!

나무 바닥 위로 묵직한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뒤이어 무언가가 르네브의 앞으로 데구루루 굴러왔다.

르네브는 감았던 눈꺼풀을 살며시 들었다.

“……!”

반쯤 감긴 패트릭의 자안과 그녀의 눈이 마주쳤다. 르네브의 입에서 발작하듯 비명이 튀어나왔다.

“으아아아!”

하지만 그녀의 불행은, 보는 이들의 여흥을 돋을 뿐이었다.

“폐후를 처형한다!”

조금 전 그녀의 오빠가 그러했듯이, 단두대 앞에 꿇어앉혀진 르네브는 곁에선 기사에게 소리쳤다.

“황자! 황제 폐하의 핏줄인 카엘 황자는 어찌 되는가?”

“가시는 마당에 알려는 드리지, 아마도 타국으로 유배를 가게 될 모양이던데.”

“유배라니……! 그 아이에게는 죄가 없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일 뿐이라고!”

르네브가 몸부림치며 소리쳤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에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자기 일을 수행할 뿐.

그녀는 남편인 루시우스가 황위에 오르기 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평생 헌신했다. 그런 그녀에게 남편은 차가운 냉대로 보답했다.

어디 그뿐인가.

결혼하고 몇 년이나 아이를 낳지 못한다며 시어머니인 황비의 핍박을 받았을 때도, 유산하자마자 그가 에시카를 정부로 들였을 때도 인내하고 감내했다.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 또 황실의 안정과 황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

그 결과가 이거라니, 참 덧없다.

잘 벼린 칼날이 바닥으로 내리꽂히기 바로 직전,

‘곧 재밌는 일이 벌어질 거야. 기대해도 좋아, 황후.’

며칠 전 들뜬 목소리로 르네브의 귓가에 속삭이던 루시우스의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스며들었다.

“……이거였구나.”

눈물로 얼룩진 르네브의 입가에 조소가 어렸다. 그 표정이 상당히 기이해 보였다.

스치듯 지하철에서 잠깐 읽었던 소설 속 악녀의 몸에 빙의한 지 수년.

아무리 발버둥 쳐도 악역의 엔딩은 달라지지 않았다.

***

형이 집행되던 시각, 황제의 집무실에는 황제 루시우스와 정부 에시카가 얽혀 있었다.

그 모습이 익숙하다는 듯 기사단장이 상황을 보고했다.

“폐하, 예정대로 형을 집행했습니다.”

“그렇군…….”

생각에 잠긴 루시우스가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의 무릎 위에 앉은 에시카가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루시우스의 뺨을 쓸어내렸다.

“폐하, 결정을 후회하시나요?”

루시우스가 고개를 저었다.

“설마, 그럴 리가. 죽기 전의 황후는 어땠지? 살려 달라고 애원이라도 하던가?”

“아닙니다.”

루시우스의 한쪽 눈썹이 비죽 솟았다.

“아니다……. 그럼?”

“웃고 계셨습니다.”

“하, 웃었다?”

헛웃음을 뱉은 루시우스의 입매가 떨떠름히 꾹 다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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