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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489화 (489/489)

◈ 489화. 밑거름 (5)

염제.

마탑에서 누구보다 벤쉬 윌리엄이란 사내를 잘 알고 있는 건.

같은 선임 마법사로서.

동등한 시선에서 그를 지켜봐 왔던 순수마력학 선임, 뱅그릿이었다.

하지만 그런 뱅그릿조차도 고뇌 중이었다.

“벤쉬 선임님, 제가 당신을 어디까지 신뢰해야 하는 걸까요?”

저절로 흘러나오는 한숨.

뱅그릿은 호열 못지않게 벤쉬에게 시달려 왔다.

덕분에 얻게 된 노이로제라고 해야 할까?

그럴 리가 없는데.

당장에라도 집무실의 문이 벌컥 열리고.

벤쉬가 양피지를 흩날리며 들이닥칠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뱅그릿 선임, 혹시 오늘은 대필 가능합니까?”

……다시금 내젓게 되는 머리.

모든 걸 꿰뚫어보시는 이 수석님이 계시는데, 대필이라뇨. 괜한 불똥이 튀는 건 사양이었다. 덕분에 뱅그릿은 단 한 번도 벤쉬를 대신해 깃털펜을 잡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진짜로, 벤쉬 선임이 임시 수석 대행이라는 거죠……?”

물론, 염제의 진가야 더없이 잘 알고 있었다. 스무 명의 마탑 선임 중에서도 흑마도학 선임, 마티스님과 함께 두각을 나타내는 게 바로 벤쉬 선임이었으니까.

마티스 선임께서 이전 세대의 마법사라는 걸 고려하면…….

벤쉬 선임의 잠재력은.

그 이상이라는 소리와도 같았다.

다만.

슬그머니.

자신의 집무실.

곳곳에 널브러진 벤쉬의 흔적을 쫓는 뱅그릿의 시선.

누구도 아닌 이 수석님께서 언젠가 말씀하셨던 것 같은데…….

“격식 있는 자는 머문 자리에도 격식이 묻어나야 한다고요.”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것도 모자라서 깃털펜의 깃털까지 뽑아놓으신 벤쉬 윌리엄 선임. 곳곳에 잉크를 뚝뚝 떨어뜨리신 것도 벤쉬 윌리엄 선임. 마지막으로 바닥에 양피지를 내던진 것 또한 벤쉬 윌리엄 선임……!

그가 펼친 난장판을 보고 있자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래서 맡기신 건가?”

어쩌면 이 수석님께서는 고된 수석의 업무를 통해서.

벤쉬 선임에게 교훈을 주려고 하셨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물론, 뱅그릿은 고개를 저었다.

“에이, 이 수석님이 그러실 리가 있나.”

나 같은 소인배의 생각으로 판단하실 분이 아니시지.

뱅그릿은 생각을 털어냈다.

집무실이 어지러워서 별생각이 다 드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곧 어깨를 으쓱였다.

“정리나 마저 할까.”

뱅그릿은 그렇게 하나둘 벤쉬의 흔적을 지워나갔다.

그런데, 이번엔 유달리도 심하셨네요.

어째, 평상시보다 널브러진 깃털과 양피지의 수가 많은 게…….

“어느 때보다 출탑이 간절하셨나 봅니…….”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뱅그릿.

“……!”

멈칫.

갑작스럽게 그의 손이 움찔거렸다. 불현듯 떠오른 것이다. 벤쉬 선임, 그가 유독 많은 출탑 신청서를 제출했을 때. 마탑 외부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꼭 이럴 때마다 큰 사건이 생기지 않았나……?’

그렇다.

그때마다 선임 마법사들이 출탑할 정도로 큰 사건이 발생했었다. 물론, 누군가는 마탑을 지켜야 했으니 벤쉬 선임은 동행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거늘.

그럼에도 뱅그릿은 간과하지 않았다.

“설마, 벤쉬 선임 당신은……?”

어떤 일이 벌어질지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그때마다 이렇게 많은 출탑 신청서를 작성하신 건가요? 그렇다면 뱅그릿은 우려할 수밖에 없었다.

전례가 없을 정도로.

벤쉬의 손으로 어질러진 자신의 집무실.

꼴깍, 뱅그릿이 마른침을 삼켰다.

“대체 어떤 사건이 터지길래요……?”

*

위대한 마법적 재능이라고 해도 방향성은 다를 수밖에 없다.

이론마법학의 창시자, 마르셀로의 재능이 마력 입자를 포함한 만물을 이성적이고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관찰력에 특화되어 있다고 한다면.

화염마법학 선임, 벤쉬 윌리엄의 경우는.

“……쨌든,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논리와 이성을 뛰어넘는 직감에 치중되어 있었다.

“결전용 마도구를 선임도 아니고, 숙련 마법사들에게까지 전면 사용 허가하다니. 웬만한 책임으로는 넘어가지 않을걸요? 상황에 따라서 며칠은 무간에 투옥될지도 몰라요.”

마법부여학 선임, 키코 아르민.

그녀는 결전용 마도구를 장비한 채 벤쉬와 함께 마탑 계단을 거닐었다. 마도구를 쥔 손에 땀이 배어 나왔다. 마탑을 비추는 햇빛을 가린 정체불명의 골렘 때문만은 아니었다.

“괜히 결전용이라 불리는 게 아니라고요!”

결전용 마도구에 담긴 힘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건 벤쉬도 마찬가지였다.

벤쉬가 변명하듯 말을 이었다.

“자, 보세요. 저게 뭔지는 몰라도 우리 마탑이 포위를 당한 거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마르셀로 탑주님도, 이 수석님도 계시지 않은 지금 마탑에 여유는 없습니다. 처음부터 기선제압을 해야 된다는 뜻이죠.”

“……말은 잘해.”

“네?”

“저도 몰라요. 나중에 제대로 처분이나 받으세요.”

처분, 그 단어에 벤쉬는 흠칫했다.

“크흠. 아무리 그래도 처분까지는…….”

아무리 기분이 찝찝했어도.

결전용 마도구 전면 사용 허가는 너무 심했나……?

뒤늦게 자신의 선택을 되돌아보았기 때문.

그러나 벤쉬의 반성은 오래가지 않았다.

“당신, 지금 뭐라고 했나?”

대화를 나누고 있던 견습 마법사 플레이어들.

그들의 대화에서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마탑의 전(前) 원로 마법사.

“이 마탑을 포위한 골렘이……. 유그위드 원로님이라고?”

유그위드 뤼펭의 이름이.

그때부터였다.

벤쉬의 기세가 달아오르기 시작한 건.

“융합지성체 유그위드 뤼펭이라니…….”

마탑을 떠나신 유그위드 님에게.

대체 어떤 일이 있으셨길래 이런 상황이…….

우려하던 키코는 뒤늦게 벤쉬의 판단을 납득하고 말았다.

‘저게 정말로 유그위드 님의 골렘이라면.’

모종의 이유로 폭주하는 유그위드 님의 소환수라면.

결전용 마도구의 사용 허가는 결코 지나친 대응이 아니었다.

마탑의 핵심 전력이 자리를 비운 지금에는 더더욱.

그런 키코의 판단은 더없이 옳았다.

.

.

.

다급한 부름이 들려온다.

“키코 선임!”

실전에 익숙하지 않은 마법부여학파 소속.

이 전장에서 나는 걱정덩어리겠지.

그러나 키코는 전장에서 제 몫을 해내고 있었다.

빛을 발하는 결전용 마도구, [간섭의 펜던트].

고오오오.

목격한 마법의 『간섭』 과정을 저장하여 발현할 수 있는 마도구를 활용, 키코는 자신의 몫을 다하고 있었다.

펜던트가 빛을 발하자 붕괴하던 빌딩이 다시금 복구되기 시작한다.

“반전마법.”

결전용 마도구의 힘을 빌려 발현하고 있었지만……. 발현하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체 이 수석님께선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마법을 자유자재로 발현하실 수 있는 걸까?

스스스스.

펜던트가 과부하로 진동할 정도로 복잡하고 현학적인 간섭 과정이었다. 그 과정에서 소모되는 마력량은 말할 것도 없었다. 벌써부터 마력 탈진의 조짐이 보이고 있었으니까.

물론.

“무리했군요, 키코.”

“앗. 벨리에 선임님……!”

“괜찮아요. 심호흡하세요.”

마찬가지로 결전용 마도구, [안식의 나뭇가지]를 활용.

벨리에는 키코를 마력 탈진 상태에서 신속히 회복시켰다.

그리고 전황을 바라봤다.

“그래도 이 정도면 합격점 아닐까요?”

마탑은 발생하는 피해를 최소화하며 융합지성체에 대응하고 있었다. 모든 건 임시 수석 대행, 벤쉬 윌리엄이 닥친 위협을 간과하지 않고 결전용 마도구의 사용까지 전면 허가하며 적극 대응한 덕분이었다.

키코가 반성하듯 내뱉었다.

“……솔직하게 벤쉬 선임의 판단을 의심했어요. 그런데 벤쉬 선임이 아니면 안 됐을 것 같아요. 선임 중 누구도, 이런 과감한 판단을 내리지 못했을 테니까요.”

벨리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수석님은 그마저도 내다보신 거겠죠.”

자신들조차 간과하고 있던 벤쉬의 잠재력까지도, 이 수석님께선 제대로 헤아리고 계신 듯했다. 이 순간, 벤쉬의 활약은 염제라는 이명이 부족할 정도였으니까.

오죽했으면.

“낯설잖아요, 벤쉬 선임님!”

뱅그릿의 눈에 일말의 존경이 깃들 정도였다.

직감이 극도로 발달한 벤쉬 윌리엄.

여태까지 결전용 마도구의 사용을 갈망한 것 또한.

마치 합당한 필요성 때문이었다는 것처럼.

화르르륵.

[아나토쉬의 불꽃]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벤쉬의 화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넋을 놓고 있던 뱅그릿에게 다급하게 외치는 환각마법학 선임, 나스로우.

“뱅그릿, 후폭풍이 옵니다!”

“넵!”

“내가 살다가 벤쉬 선임 뒤치다꺼리를 하게 될 줄이야.”

이윽고, 융합지성체의 손가락이 붉게 달아오르다 못해서 완전히 녹아내렸다. 벤쉬가 홀로 융합지성체를 맡고, 나머지 선임 마법사와 숙련 마법사들이 그 때문에 발생하는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에 집중했다.

물론.

“후우.”

플레이어들의 존재도 간과해선 안 됐다.

정확하게는 거대 연합이라 불러야 하지만.

가온이 없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영향력 큰 길드?

단연코 신화 길드였다.

길드 마스터, 백이설을 필두로.

신화 길드는 시민들의 구출에 집중했다.

백이설은 가쁜 숨을 고르고 전황을 살폈다.

‘이제야 1페이즈가 끝난 건가.’

그때였다.

허공을 날아다니던 마법사들이 백이설 주변에 착지했다.

수수한 로브를 입고 있던 평소와 다르게.

제대로 된 아이템을 장비한 마법사들.

‘역시, 마탑은 한 번도 전력을 내보인 적이 없었구나.’

확실히 저런 수준이 되어야 호열과 같은 선상에서 나아갈 수 있는 거겠지. 그에 비해서 나는……. 백이설이 자신의 부족함에 지그시 입술을 깨문 순간이었다.

꾸벅.

고개를 숙인 인사와 동시에 시작되는 자기소개.

“치유학파 소속 숙련 마법사, 클레 오디아라고 합니다! 저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모험가님에게 부탁할 게 있는데 괜찮으실까요?”

“부탁이요?”

“네, 부디 저희에게 빌려주세요!”

갑자기? 빌려달라니? 뭘?

제시 하인네스를 제외하면 날고 긴다는 랭커 중에서도 마탑의 숙련 마법사는 없었다. 숙련 마법사가 자신에게 부탁하는 것도 놀라운 일인데, 다짜고짜 무언가를 빌려달라니.

“…….”

굴지의 대기업.

신화 그룹 소속 신화 길드.

마탑엔 재계에 관한 정보도 있는 건가?

“얼마나 필요하신데요? 백억? 천억?”

백이설이 되묻자 클레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게 아니라 눈이요.”

“눈이라면……. 신화 그룹 소유 스키장?”

“스키장이요? 뭔지는 몰라도, 아뇨! 이 눈이요!”

척.

클레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눈망울을 가리키자 백이설은 그제야 알아들었다. 플레이어의 시야, 그러니까 시스템 메시지가 필요한 거구나.

백이설은 흔쾌히 답했다.

“물론, 그러죠.”

시민들의 대피 인도도 거의 끝나가던 참이었다.

내가 없다고 해도 충분히 사태를 마무리할 수 있겠지.

즉각적인 대답에 클레가 되려 놀라 물어왔다.

“협조에는 감사드리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모험가님의 안전은 보장해 드릴 수 없어서요. 보다시피 저희도 마냥 자신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라.”

“각오라면 됐어요.”

“……!”

백이설은 진심으로 말을 이었다.

“어차피 죽어도 최소 두 번은 죽었어야 했거든요, 저는.”

이 세상에 악마에게 빙의를 두 번씩이나 당한 인간은 나밖에 없지 않을까? 덕분인지는 몰라도 백이설은 딱히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 기회가 반가웠다.

‘마탑 소속 마법사를 돕는 거면…….’

그래도 조금은 빚을 갚는 거 아니겠어?

백이설은 빌딩 숲을 뛰어다니며 클레를 쫓았다.

동시에 시스템 메시지로 전해지는 정보를 클레에게 전했다.

“손가락, 그다음은 팔인 것 같네요.”

“팔이요?”

“네, 메시지에 따르면 왼팔이요.”

그 시점에서 백이설은 마탑의 마법사들에게 합류한 상태였다.

덕분에 백이설의 말은 선임 마법사들의 귀에도 훤히 들렸다.

그래서일까.

“잠깐만, 저 빛은 뭐죠?”

아르카나 대륙에서는 일어나지 않은 기현상도 마탑의 마법사들은 일찌감치 파악할 수 있었다. 융합지성체 유그위드의 왼손에서 일렁이는 빛.

“왼팔……. 왼손잡이……!”

벨리에가 외쳤다.

“마법의 발현이에요!”

그렇다.

생전의 유그위드는 왼손잡이로, 오직 왼손만을 움직여 마법을 발현해 왔으니. 단순하게 허우적거리기만 하던 아르카나 대륙의 오른손과 다르게.

현실에 출현한 왼손은 마법을 발현할 수 있었다.

마탑.

전원이 즉각적인 대응에 나선다.

“저 마력량이 대충이라도 파악이 됩니까, 뱅그릿?”

“모르겠습니다. 너무 방대해서……!”

“일단, 부딪혀 보는 수밖에 없겠군요.”

“펜던트로 반전마법 발현은 어려운가요, 키코?”

“저로서는 무너지는 건물 정도가 한계라……!!”

그러나 그 긴박한 상황 속에서.

“……미친 소리 하지 마.”

백이설의 동공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AAU를 통해서.

아니, 정확하게는.

신화 그룹의 정보원을 통해서 전해져 온 기밀정보 탓이었다.

“누가, 누가, 누가……!!”

물론.

“아르카나 대륙에서 사망했다고……?”

그건 세상을 뒤집을 ‘뻔’한 착각에 불과했지만.

또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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