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488화 (488/489)

◈ 488화. 밑거름 (4)

벤쉬 윌리엄.

내가 벤쉬에게 막중하디 막중한 마탑의 임시 수석 대행을 맡긴 이유는 간단하다. 솔직하게 떠넘긴 거다. 역지사지, 나의 입장을 좀 생각해 보라고!

-‘웬만한 스팸 문자보다 심하다니까, 당신.’

뭐든 처음이 중요한 법이거늘.

얼마 전 출탑의 맛을 알지 못하던 벤쉬가 출탑의 맛을, 그것도 제대로 맛보지 않았던가? 그렇지 않아도 불꽃처럼 강렬했던 그 욕망이 어디로 갔으랴.

그렇다, 전부 내게, 출탑 신청서로 돌아왔다.

하나, 둘, 셋…….

이젠 하루에 하나가 아니라 최소 서너 장이었다.

차라리 그 사유라도 여전히 터무니없었다면 불합격 서명이라도 휘갈겼을 텐데. 예전처럼 말도 안 되는 게 아니라 묘하게 그럴싸해졌다는 게 더더욱 문제였다.

‘……그랑펠의 성질머리를 파악한 건가, 싶었지.’

상대방의 속이 아무리 뻔히 보인다고 한들.

격식과 절차에 따라 공정하게 일 처리를 하지 않으면.

온몸에 가시가 돋아나는 성격의 소유자.

그랑펠의 고집 덕분에 나는 벤쉬의 출탑 신청서, 그리고 대륙 원정 신청서를 마냥 간과할 수 없었다.

입술에 침을 바르듯 번지르르했던 요청 사유를 보고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비로소 깨달은 것인가, 벤쉬 윌리엄. 그대의 긍지를.”

그쯤에선 나도 생각을 바꿔먹었다.

그래. 출탑을 통해서 벤쉬의 욕망을 감질나게 자극하기보다는. 차라리 마침 나와 마르셀로, 마티스까지 마탑에서 자리를 비우게 되는 상황이 아니던가?

-‘어디 내 고충을 한번 느껴봐라.’

교훈을 위해 수석 업무를 떠넘기자고.

그런 이호열다운 치졸한 사유로 벤쉬에게 임시 수석 대행을 맡긴 것뿐이었거늘. 하필이면 벤쉬에게 마탑의 전권을 맡겼을 때 이런 전례에 없는 대사건이 터질 줄이야.

나의 입술이 변명하듯 움직인다.

“벤쉬 윌리엄, 그대라면 능히 대응하겠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 그랑펠?

다른 사람은 다 속여도 내 눈은 못 속인다, 너?

거울만 있었어도 내뱉은 말의 진의를 파악할 수 있었을 텐데…….

“그대의 본능은 실로 예리한 구석이 있으니.”

……뭐야, 진심인가?

뭣보다 빈말은 또 할 수 없는 입방정이었다. 벤쉬에게 후한 평가가 나왔다는 건. 나, 이호열의 편견과는 무관하게 그랑펠은 벤쉬를 고평가하고 있었다는 것.

‘……네가 그런 거면 차라리 다행이다.’

쿠쿠쿠궁.

나는 무너지는 손가락을 바라보며 가늠했다. 아마도 융합지성체 유그위드는 현실에서 대격변 이후, 역사에 없던 피해를 끼치고 있으리라고.

‘당연히 현실이 아르카나 대륙 이상으로 위험하다.’

그런 의미에서.

“탐색전은 끝이다. 진심을 보여라.”

신속하게 페이즈를 진행하는 게 최선이겠군.

반짝.

이윽고, 새로운 퀘스트 목표가 점멸했다.

-융합지성체 : 유그위드 뤼펭을 처치하라. (진행 중)

●융합지성체의 손가락을 무력화하라. (성공)

●융합지성체의 오른팔을 무력화하라. (진행 중)

손가락 다음엔 오른팔인가?

메시지가 점멸하기 무섭게,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돌무더기가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유그위드의 거대한 팔이 하늘을 향해 직각으로 치솟고 있었다.

쿠드드득.

크기에서 파괴량을 짐작한다면…….

어쩌면 저건 최상위 마법, 메테오 스트라이크를 능가하는 파괴력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단순하게 피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바람의 정령왕, 에어리얼이 말꼬리를 흐렸다.

“이래선 아르카나 대륙, 축이 흔들릴 거예요……!”

그렇다면 해결책은 하나뿐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나는 마력을 급격하게 끌어올렸다.

[천적관계]가 발동되지 않은 지금, 나의 마력 스탯은 대략 일천(一千) 정도. 통상적으로 일천 정도의 마력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마탑에 발현되어 있던 환각 마법.

정기 학회에서 불청객을 가로막던 탑주의 환각 마법을, 나는 마력 일천의 경지라 평가했었지. 직관적으로 가늠할 수 있었던 이유야 당연히 그랑펠의 재능 덕분.

그런 그랑펠이 말하고 있었다.

“하이엘, 그리고 모두 명심하도록.”

어쩌면 지금의 나는 저 일격을 막아내는 것만으로 마력 탈진에 빠지거나, 그 이상의 후유증으로 아르카나 대륙에서 눈을 감을지도 모른다고.

고오오오.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마력을 끌어올렸다. 격이 다른 마력에 기이까지 더해졌다고는 하나, 저쪽도 기이의 영역에 진입한 존재인 건 마찬가지.

‘뭐, 나보다 훨씬 앞서있을지도 모르지.’

무려 마탑의 원로 마법사인 유그위드와 정령왕 오리에드가 융합됐을지도 모르는 존재였으니까, 저건. 그러니까 이쪽도 전력을 다해야만 한다.

[스탯, ‘집념’이 ‘마력’으로 환산됩니다.]

그런 나의 집념을.

결의를.

마력으로 환산하여 더더욱 방대한 마력으로 뒤바꾼다.

건축마법의 마력 효율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저런 걸 견뎌내기 위해선.

실로 방대한 마력이 요구될 테니까.

스스스.

시야에 길게 늘어진 은발의 머리칼이 흩날린다.

급격하게 마력을 끌어올린 탓이다.

육체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마력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다.

[※주의 : 마력이 역류합니다.]

[상태이상, ‘마력 중독’이 발생합니다.]

[상태이상, ‘마력화’가 발생합니다.]…….

마력 중독.

마력화라.

마탑 서적에서만 봤던 현상인데, 이거?

‘직접 경험하게 될 줄이야.’

뒤이어 떠오르는 [첫 세계수의 축복]이 상태이상을 거절했다는 메시지들. 그러나 수고스럽게 거절할 필요는 없다. 말했다시피 이 또한 나의 계획의 일부였으니까.

“……!!!”

그쯤에선 모두 알아차렸겠지.

내게 이상이 생겼음을.

그럴 수밖에 없을 거다.

상태이상, 마력화.

머릿속에 집어넣었던 서적의 지식을 떠올린다.

──────

순수마력학의 입문자가 경계해야 하는 건 ‘마력화’다. 높은 마력 감응도는 양날의 검과 같다. 도리어 마력에게 육체와 정신이 집어삼켜질 가능성이 있으니…….

──────

마력화란.

쉽게 말하자면 흑마도학의 ‘흑화’와 비슷한 상태이상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마력화 쪽이 흑화보다 훨씬 위험하다는 거였지만.

──────

그러니 경계하라, 마력화한 마법사는 반드시 죽는다.

──────

그런 문구를 읽으면서 나는 코웃음을 뱉었었지.

-‘나는 마력화보다 흑화가 무섭다.’

물론, 그 생각엔 지금도 변함은 없다.

[최후의 모험가] 효과 덕분. 아르카나 대륙에선 죽어도 부활할 수 있는 내게는, 지금의 한목숨보다 흑역사를 내 입으로 떠벌릴지도 모르는 [흑화]가 더 두려운 게 당연하니까……!

그러니까.

[상태이상, ‘마력화’가 발생합니다.]

[상태이상, ‘마력화’가 발생합니다.]

[상태이상, ‘마력화’가 발생합니다.]…….

나는 죽음을 앞둔 지금에도 꼿꼿할 수 있었다.

“축복자시여, 당신의 육신이……?”

나 또한 보고 느끼고 있어서 알 수 있었다.

마력화, 말 그대로.

나의 육체가 정순한 마력 덩어리로 변해가고 있었다.

우려 가득한 물음에 나는 말을 이었다.

“그대들은 해낼 수 있다.”

사망 페널티로 내가 아르카나 대륙에 24시간 동안 진입할 수 없다고 한들. 이 순간, 전장에 있는 이들의 전력이라면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을 거다.

‘거창한 희생이 아니야.’

그저 이들의 등을 떠밀어주는 역할일 뿐.

비유하자면 나는 매개체였다.

말했다시피 정령왕들의 {자연} 능력을 증폭시켜 줄 마력, 그 자체.

증폭된 자연 능력이라면 반드시.

“이 모든 건 자연의 섭리니까.”

……그래, 그놈의 거창한 자연의 섭리에 따라서.

몇 페이즈가 남아있든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거다. 걸림돌이 됐던 대지의 정령들도 [촉복의 위계질서] 효과로 더는 오리에드에게 충성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섭리라니, 그게 무슨?”

아무래도 다들 ‘자연의 섭리’라는 걸 다르게 받아들인 모양인데? 물론, 사람이 죽는 것도 자연 섭리고. 내가 지금 여기서 죽는 것도 맞기는 하는데…….

“설마, 그런……!!”

그렇게 요란을 떨 필요는 없다니까?

어차피 하루 뒤.

아르카나 대륙 시간으로 나흘 뒤엔 멀쩡히 살아서 돌아올 테니까.

슥.

그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는 걸까.

오직 하이엘만이 나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런 이들의 모습을 확인하면서 최후의 마법을 발현했다.

이런 상황에서 잊지 않는 심미적 요소.

[심미]를 가미한 건축마법을 발현.

이윽고, 솟구치는 조각상.

쿠쿠구구궁.

충돌 속에서 마력화한 나의 육체가 허공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자연으로, 화염으로, 바람으로, 얼음으로, 숲으로, 벼락으로, 정령들에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거짓말을 하지 않은 시스템 메시지가 점멸한다.

[당신의 마력이 일대에 넘실거립니다.]

이어서 점멸하는 메시지.

[사망하셨습니다.]

[사망 페널티가 적용됩니다.]

[획득한 경험치가 하락합니다.]

[아르카나 대륙에 당신의 업적이 울려 퍼집니다.]

[아르카나 대륙의 생명들이 당신의 희생을 이야기합니다.]

[칭호, ‘숭고’가 변화합니다.]

[칭호, ‘존귀’를 습득했습니다.]

[칭호, ‘최후의 모험가’ 효과가 발동됩니다.]

[즉시 현실로 귀환합니다.]

[쿨타임 : 23시간 59분]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나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말했다시피 아르카나 대륙은 조금도 걱정되지 않았으니.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제발.

당신도 현실에서 잘하고 있는 거 맞지.

그치, 벤쉬 윌리엄 선임……?

*

어나더 스페이스 호.

“미쳤군.”

마탑의 전 원로 마법사와 같은 이름을 가진 몬스터가 출현했다는 것만으로도 경악할 일이거늘. 그 크기가 아득한 우주에서도 포착될 정도였다.

“마탑은? 여전히 오리무중인가?”

“넵! 암석에 파묻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젠장할. 별수 없나, 슬슬 앵글을 돌리지.”

“넵!”

타타타다닥.

계기판을 만지자 어나더 스페이스 호의 앵글이 옮겨가기 시작했다.

저런 말도 안 되는 녀석을 뱉어낸 정체불명의 균열.

프로토타입 균열을 향해서.

“불완전한 균열이라.”

아르카나 대륙, 프로토타입 균열에 휘말렸던 성전 연합군 소속 플레이어들. 그 내부에서 아르카나 대륙과 현실의 연결 가능성을 엿보았다고 생각했건만.

“……그래서 그런가, 더더욱 불길해.”

융합지성체 유그위드는 오직 그 절반만을 현실에 모습을 드러낸 상태였다.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의 연결 가능성을 고려했을 때. 그 나머지는 아르카나 대륙에 출현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일반적인 균열과 달라. 이 순간, 아르카나 대륙도 우리와 똑같은 녀석을 상대하고 있을 수 있다는 거지. 그렇다면……. 아르카나 대륙 측의 도움은 기대할 수 없다는 뜻이고.”

실로 암울한 추측이었지만, 정확한 확인이 필요했다.

어나더 스페이스 호의 카메라가 균열을 향해 줌을 확대했다.

그러자.

“……보, 보입니다!”

“보여? 뭐가? 마탑이?”

“아, 아뇨. 균열 내부 풍경이 보입니다!!”

균열 내부 풍경이.

정확하게는 예상했던 대로 아르카나 대륙의 풍경이 보였다.

어째서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는 건지.

역시나, 저쪽도 고군분투 중이지 않은가?

“빌어먹을.”

애써 욕지거리를 참아내던 순간이었다.

찬란한 빛 속에서.

이번엔 보여선 안 될 장면이 보였다.

그렇다.

“?!!”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의 광경이.

-어나더 스페이스 호. 응답 바란다.

다급한 교신조차 잊게 할 정도의 광경이.

“…….”

침묵 끝에 사내가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여기는 어나더 스페이스 호.”

믿기지 않아도.

“프로토타입 균열 너머 아르카나 대륙에서…….”

모든 촬영기록이 말해주고 있었다.

“플레이어, 이호열의 사망이 포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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