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487화 (487/489)

◈ 487화. 밑거름 (3)

이거 호락호락하지 않겠군.

‘이래선 남아나는 게 없겠어.’

융합지성체, 유그위드 뤼펭.

거대한 골렘이 꿈틀거릴 때마다 지진이 일어나는 듯했다.

엎드려 뒤집힌 상태로 움찔거리는 것만으로도 이런 위력인데.

만약, 저런 게 두 발로 일어서기라도 한다면?

내가 끔찍한 상상을 하고 있던 순간이었다. 화염의 정령왕, 피닉스가 홍염의 날개를 펼쳤다. 그러고는 움찔거리는 손가락을 향해 거센 불길을 일으켰다.

화르르륵.

마법도 스킬도 아닌 {자연}.

그 자체의 화염.

위력은 언뜻 보기에도 대단했다.

피닉스의 부리가 분노로 파르르 떨렸다.

“오리에드, 그대의 추태가 심히 부끄럽다.”

같은 정령왕으로서 체면을 구겼다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같이 묶이기조차 싫다는 걸까?

피닉스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려는 듯.

쉴 새 없이 홍염을 발산했다.

다만.

“그쯤 해도 좋다, 피닉스.”

거짓말을 하지 않는 시스템 메시지가 공언했듯 피닉스, 그리고 휘하 화염의 정령들의 [지휘권]은 내게 있었다. 따라서 나의 말 한마디에 피닉스는 행동을 멈췄다.

나는 골렘의 손가락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감정적인 대응은 역효과를 내는 법.”

작은 돌덩이도 아니고, 저건 살아 움직이는 바위산이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우리가 상대하고 있는 건 팔 하나, 그중에서도 다섯 손가락에 불과하단 말이다.

치이이익.

피닉스의 열기로 새빨갛게 달아오른 손가락은 우릴 적으로 인식한 모양이었다. 행동은 느릿했지만, 그 동작에 담긴 위력은 감히 가늠할 수 없었다.

쿠쿠쿠쿵.

내려치는 손바닥의 모양대로.

주르르륵.

땅이 녹아내린다.

이거, 일찌감치 텔레포트로 피하길 잘했군.

저런 건 건축 마법으로도 막기 힘든, 말 그대로 자연재해니까.

피닉스는 그제야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다.

“단순히 오리에드 수준이라 예상했거늘…….”

오리에드와 유그위드.

둘 사이에 어떤 사연이 있는지, 저게 유그위드인지 오리에드인지도 아직은 모르겠다만. 확실한 건 정령왕인 피닉스조차 감히 대적할 수 없는 체급으로 거듭났다는 거겠지.

피닉스가 머리를 조아렸다.

“송구합니다.”

그렇다고 사과할 것까진 없는데.

사과를 받아들이기 전에 일단.

한껏 달아오른 손가락부터 어떻게 해야 하지 않을까.

‘역시 절대영도뿐인가.’

기이, [『절대영도』].

절대영도라면 달아오른 녀석의 손가락을 식히는 걸 넘어서 움직임까지 봉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렇게 광범위한 범위에 기이를 발현하는 건 처음이라 걱정이 된다만.

‘뭐든 해야지, 별수 있겠냐.’

내가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스오오오.

문득, 전장에 한기가 휘몰아쳤다.

물론, [온기] 버프가 없어서 추위에 벌벌 떨던 이호열은 없다.

[첫 세계수의 축복] 효과는 상당히 광범위하거든.

[첫 세계수의 축복이 상태이상, ‘동상’을 거절합니다.]

……그래도 이건 좀 서늘한데? 어쨌든, 나는 눈살을 찌푸리지 않고 한기의 주인공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 냉혈한 같은 생김새만 봐도 짐작이 가는군.

“얼음의 정령왕, 프린셔가 축복자를 뵙습니다.”

급박한 상황에 인사는 생략해도 되거늘.

굳이 비교해보자면 빙룡, 프로즈낙스와 비교해도 절대 밀리지 않을 정도의 냉기였다. 덕분에 뜨겁게 달아올랐던 골렘의 손가락이 급속도로 냉각.

파직.

급격한 온도 변화로 손상을 일으키고 있었다.

물론, 유의미한 피해는 아니었다.

골렘의 육체에 이상이 생기기 무섭게.

스스스.

어느샌가 모습을 드러낸 대지의 정령들이 골렘을 회복시키고 있었으니까. 그 상황을 우려스럽게 지켜보던 화염과 얼음의 정령들이 웅성거렸다.

“정말 우릴 배신한 건가?”

“단순하게 오리에드 님의 명령에 따른 거겠죠?”

“……다들 가엾어요.”

정령들 가운데엔 익숙한 도마뱀도 있었다.

정령학파 선임, 페이얀의 계약 정령 파이어 드레이크. 상위 화염의 정령답게, 그리고 나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마탑의 계약 정령답게, 파이어 드레이크는 소란을 잠재웠다.

“우려할 건 없다. 합당한 처분이 내려질 테니.”

……합당한 처분?

그 처분이란 거 설마, 내가 내리는 거냐?

페이얀 선임, 계약 정령에게 무슨 소리를 한 거야?

저런 신뢰 가득한 눈은 상당히 부담스러운데.

그야 나는 이 순간에도 확신이 서질 않았거든.

‘이 레이드가 몇 페이즈까지 존재하는지.’

점멸하는 메시지를 확인한다.

[히든 퀘스트 : 대지의 증명]

대지의 정령왕, 오리에드.

오리에드는 세계수의 축복을 증명하길 원한다.

대지의 시련을 극복하고 세계수의 존재를 증명하라.

-자연계 : 대지의 영토에 진입하라. (실패)

-융합지성체 : 유그위드 뤼펭을 처치하라. (진행 중)

●융합지성체의 손가락을 무력화하라. (진행 중)

보스 몬스터의 가장 큰 특징.

보다시피 페이즈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퀘스트 목표에 맞게 지금은 손가락만 움직이고 있는 융합지성체였다만. 그다음엔 어떤 부위가, 어떤 패턴이 몇 개나 남았는지 알 수 없었다.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해볼까?

‘그 바람에 난 이미 죽을 각오까지 했거든.’

아르카나 대륙이기에 유효한 [최후의 모험가] 효과.

따라서 나는 최소 한목숨 정도는 내던질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왜, 이번엔 마냥 쿨타임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잖아?

‘현실에도 똑같은 녀석이 출현했을 테니까.’

그러니까 나는 이 순간.

최대한 효율적이게 죽을 수 있는 동선을 떠올리고 있었다. 물론, 아르카나 대륙에 출현 메시지를 출력한 융합지성체는 나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날뛰고 있었다만.

“늦었군, 에어리얼.”

“제우스, 아들 걱정에 행차하셨나?”

“다물어라, 나이아스.”

“오셨군요, 드라이어드님.”

이쪽도 오리에드를 제외한 정령왕 전원이 집결해왔거든.

다시금 감사하고, 감탄하게 되는구나, 하이엘.

나는 하이엘을 힐끗 쳐다보며 안도를 삼켰다.

‘진짜 너 없었으면 어쩔 뻔했냐?’

나 혼자서 저걸 막기 위해서 온갖 억지를 다 부렸을지도 모른다. 그 억지 중에는 폭주할 위험이 있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사용도 있었겠지.

‘만약, 폭주한다면.’

상황이 어떠한 전개로 흘러갈지 나도 확신할 수가 없었으니.

나의 분신, 하이엘 덕분에 최악의 상황은 면한 셈이겠군.

그쯤에서.

“전왕은 들어라.”

나는 그럴싸하게 입을 열었다.

“자연계의 왕인 그대들에겐 능력이 있다. 날뛰는 대지를 잠재울 능력이. 그것이 바로 자연의 섭리이니까.”

자연의 섭리라.

그랑펠식 화법을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한마디로 가위바위보라는 것이다.

‘물고 물리는 속성의 성질이지.’

대지의 정령들이 필사적으로 융합지성체 유그위드.

골렘을 수호하고 있다만 명확한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골렘의 손가락은 급격한 온도 변화에 손상되었었다는 것.

차가운 인상의 얼음의 정령왕, 프린셔.

그가 정중하게 말을 잇는다.

“축복자의 말씀을 기꺼이 받들겠습니다. 그러나 저 존재는 대지의 정령왕인 오리에드를 뛰어넘는 미지의 존재인바. 저희가 전력을 기울인다고 한들…….”

조금 전 합을 겨뤄봤기에.

견적이 나온 거겠지.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느낀 것이리라.

프린셔의 말엔 피닉스도 별다른 반박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그럼에도 우려할 것 없다.”

“……!!!”

나의 말에 내게 뭔가 비책이라도 있는 건가, 싶어서 놀란 표정들이신데……. 유감스럽게도 그런 건 없다. 말했다시피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가 그대들을 위해 길을 열겠다.”

이 한목숨을 바쳐서 융합지성체, 유그위드의 힘을 빼놓는 게 전부였으니까. 물론, 뒷일을 떠넘기고 정령왕들만 개고생을 시키겠단 뜻은 아니다.

고오오오.

문득, 하늘에서 일렁이는 마력 반응.

마법이 아니요, 마력석 특유의 마력 방출 패턴.

그래, 아이언 캐슬 호였다.

‘생각보다 더 빠른데?’

성전 연합군.

대괴수와 사투를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만 출현 메시지를 목격한 플레이어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던 거겠지. 아르카나인들 또한 플레이어들을 통해 소식을 접했을 터.

‘나보다 든든한 지원군일걸.’

그런 나의 생각에 확신을 더해 준 건 숲의 정령왕, 드라이어드였다. 아마도 숲의 정령들이 전해온 소식일 터. 이런 상황에서도 온화함을 잃지 않았던 드라이어드의 얼굴에 변화가 일었다.

“……엘프들이 상황을 인지한 모양입니다.”

지도자 하이엘프, 아젠트레스의 지휘에 따라 세계수의 적 태초의 악을 추적하며 대륙을 떠돌던 이들이었다. 그런 엘프 중 하나쯤은 거대한 융합지성체를 목격했을 터.

‘그 정보를 바탕으로 몰려들고 있는 거겠지.’

문득, 궁금해졌다.

‘정령들도 세계수를 어머니라고 불렀지?’

그러나 오해를 품을 정도로.

정령들은 세계수에게 관심도, 애정도 받지 못했다.

그런 정령들의 항렬을 따지고 있자 하니…….

‘……우리 집안이랑 비슷하잖아, 이거?’

왜, 사이가 좋은 1, 2호는 제쳐놓고 생각해보자.

이씨 집안에서도.

세계수 족보에서도 막내는 나였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스스로 소외당한다고 여기는 게.

바로 중간에 낀 셋째.

‘이예림이 딱 이러는데, 관종처럼.’

뒤통수를 친 오리에드를 웬수라고 생각하니까…….

어째 더더욱 빠르게 소란을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치솟는구만.

그때였다.

“이런.”

정령왕, 그리고 정령들 사이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골렘을 향해 공격이 쏟아질 걸 알아차린 걸까.

대지의 정령들이 방패가 되어 골렘의 앞을 막아섰다.

“오리에드, 당신은 정말 잔인하군요.”

바람의 정령왕, 에어리얼이 치를 떨었다. 대지의 정령들이 오리에드의 명령으로 고기 방패로 내세워진 것이었다. 두려움에 질린 대지의 정령들의 표정이 그 증거.

“저희가 뭘 어떻게 해야……?”

정령왕들을 포함한 모든 정령이 멈칫했다.

아직 순수를 잃지 않았다는 말이 단번에 이해가 됐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서로에게 이빨을 겨눌 수 없는 존재들이겠지.

정령들은.

‘그러니까 자연계에서 얌전히 참아왔던 거고.’

……웬수랑 비교한 게 미안해지는구만.

당연한 이야기지만.

나는 정령들이 애써 지켜온 순수를 헛되게 할 생각은 없었다.

더욱이 말했잖냐?

이것 또한 세계수의 계획이었다고.

‘그게 얼마나 대단한 계획인지 지켜봐야 하니까.’

나는 입을 열었다.

“피는 물보다 진한 법.”

“……?”

“대지의 정령들이여, 그릇된 왕의 명령엔 따르지 않아도 된다.”

대지의 정령에게 주군, 오리에드의 명령은 절대적이겠지. 그러나 프로즈낙스를 떠올리고, 엘프에 관한 소식까지 접하며 확신하게 된 나였다.

‘정령들이 세계수의 세 번째 자식이라면.’

[축복의 위계질서].

그 효과는 정령들에게도 유효할 것이라고.

그런 나의 예상은 적중했다.

시야가 점멸한다.

[대지의 정령들에게 ‘축복의 위계질서’가 발생합니다.]

두려움에 떨던 대지의 정령들이 흩어지기 시작한다.

골렘에게서 다급하게 떨어진다.

오히려 아군 측으로 합류하고 있다.

정령왕들이 경악을 뱉는다.

“왕명조차 뛰어넘었다는 건가?”

“……그런!”

“그러한 권능을 가지고 계시면서 어찌 괜한 수고를……!”

단순하게 생각하지 못했던 것뿐이거늘.

내가 정령왕인 자신들의 체면을 배려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경악 뒤에 나를 향한 경탄이 쏟아졌다.

……그래, 어찌 됐든.

‘이래야 나답지.’

온갖 착각으로 쌓아 올린 게 현재 나의 모습이었으니까.

지금 와서 굳이 부정하지는 않겠다.

여기선 그럴싸하게 증명해내는 게 나의 최선.

과소평가엔 증명을, 과대평가는 실현해내는 것.

그게 바로 이호열과 그랑펠이 함께 나아가는 행보 아니겠냐? 나는 그런 의미에서 걸음을 내디뎠다. 목표는 첫 번째 퀘스트 목표인 다섯 손가락.

머릿속에서.

오만가지 수단과 방법을 떠올린다.

그중에서 가장 최선의 수를 선택한다.

순수한 마력과 속성의 결합.

그를 통해 증폭하는 게 바로 속성 마법의 성질.

자연이라고 예외는 아닐 터.

나는 순수마력마법을 발현했다.

뭣보다 내 마력은 그냥 마력이 아니거든.

‘격’이 다른 마력이란 말이다.

나는 정령왕들에게 말했다.

“이 순간만큼은, 나의 위세를 빌어 날뛰어도 좋다.”

“……!!!”

나의 말에 정령왕들이 곧이어 일격을 준비한다.

이윽고, 나의 마력을 매개체로 폭발하는 갖가지 자연의 속성들.

나는 점멸하는 메시지를 바라봤다.

●융합지성체의 손가락을 무력화하라. (성공)

당연한 이야기지만.

지금의 행동엔 나, 이호열이 머릿속에서 휘갈긴.

소심한 계산서도 포함되어 있었으니.

[처치 기여도를 획득하셨습니다.]

나는 무너지는 손가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최대한 그럴싸하게.

1페이즈는 넘겼구만.

‘그나저나…….’

현실은 이런 괴물을 어떻게 처치하고 있으려나.

‘그래도 마탑이 있으니까 걱정할 건…….’

그러다가 생각이 닿았다.

내가 ‘누구’에게 수석 임시 대행 업무를 맡기고.

아르카나 대륙으로 향했는지를.

‘아뿔싸, 벤쉬 윌리엄……!!’

.

.

.

박휘강은 두 눈을 의심했다.

“어라?”

별안간 출현 메시지가 떠오른 것이었다.

[풀려난 염제, ‘벤쉬 윌리엄’이 출현합니다.]

“벤쉬라면 선임 마법사……? 그런데, 풀려난 염제……? 뭐죠, 이 엄청난 수식어는?!”

그와 동시에 겁화가 느껴졌다.

다름 아닌.

마탑의 계단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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