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486화 (486/489)

◈ 486화. 밑거름 (2)

융합지성체 유그위드 뤼펭.

절반의 존재감만으로도 현실에 지대한 피해를 속출시키기에 충분했다. AAU는 쏟아지는 영상 정보들을 확인했다.

굳이 어나더 스페이스 호까지 들먹일 필요는 없었다.

“뭐가 이렇게 큰 거야, 대체?!”

“공홈에 업데이트 내역은 아직인가?”

“네……! 아직까지 아무것도요.”

“갑자기 이런 튀어나오는 건 반칙이잖아, 레이먼 새끼야!!”

AAU 대한민국 지부.

서울에 자리 잡고 있기에. 그것도 융합지성체가 출현한 위치에 가까이 있기에. 굳이 모니터를 바라보지 않아도 상황의 심각성이 와닿았다.

“미친 개자식.”

쿠구구궁.

창 너머로 피어오르는 흙먼지가 보인다. 지반이 격하게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부실하게 지었을 리가 없는 AAU의 사옥이 휘청거릴 정도로.

속속들이 피해가 보고되어 온다.

“정확한 인명 피해는 아직 추산되지 않았습니다만. 그래도 긍정적인 건 주말, 그것도 이른 시간이라 유동 인구가 적어 신속히 대피한다면……!”

그딴 걸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순 없었다.

빠득.

이가 갈린다.

“다들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냐?”

“……!”

……타다닥.

멈추는 손가락.

박민재가 쉴 새 없이 키보드를 두들기던 이들에게 물었다.

지부장의 권위를 떠나서 진심으로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레이먼 션. 그 미친 자식은 대체 우리한테 원하는 게 뭐길래. 그동안 유지되어 오던 암묵적인 룰까지 어겨가면서 이런 빅엿을 던져주는 걸까?”

레이먼 션.

그 속내를 알 순 없었지만, 분명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 예상했었다. 하지만 예상을 벗어난 첫 행보부터 현실을 쑥대밭으로 만들 줄이야.

“…….”

모두가 침묵하고 있던 순간.

윤수겸은 쉴 새 없이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건.

게임에 불과했던 아르카나 대륙 전기의 지식뿐.

대격변 이후의 상식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현재 상황을.

과거의 지식만으로 추론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러나 그것이 계륵의 최선.

이내, 윤수겸이 입을 열었다.

“형태로는 골렘으로 추정됩니다.”

“골렘? 그래, 확실히 그렇게 보이네. 바위로 구성된 육체부터 인간을 모방한 생김새까지. 물론,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덩치 때문인지. 균열을 절반만 뚫고 나온 상태라 그런 건지. 자빠져서 버둥거리고 있지만.”

그게 두려운 점이었다.

“저 새낀, 그것만으로 전례 없던 피해를 입히고 있어.”

만약, 나머지 절반이 현실에 나타나거나 두 다리로 바로 서게 된다면? 출현 지역은 물론, AAU 대한민국 지부도 역사 속으로 사라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박민재가 물었다.

“그래서 골렘이란 단서에서 뭘 본 거냐, 수겸아?”

“골렘이라면 저건 어디까지나 마법이란 겁니다.”

“……마법?”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데이터베이스를 뒤져본다.

그래, 플레이어가 사냥할 수 있는 몬스터 중 거인은 존재했어도.

골렘은 존재하지 않았다.

“골렘이 마법으로 불러낸 소환수라면…….”

저것도 누군가 발현한 『마법』이라는 건가?

생각하는 도중 생각이 닿았다.

그래, 마탑의 원로 마법사 온순한 거인 유그위드에게.

“분명, 유그위드도 저런 걸……?”

“네, 제로 산맥에서 골렘을 소환했었습니다.”

“저, 저것보다는 훨씬 작았잖아요 선배?!”

성현준의 말에 윤수겸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출현한 골렘의 크기는 천하의 이호열 유스라 총책임자님께서도 발현할 수 있으실까, 생각될 정도로 차원이 달랐으니까.

성현준이 부정하듯 말을 이어간다.

“그리고 아무리 유그위드 원로 마법사가 자신의 발로 마탑을 떠났다고 해도……. 그건 마탑에 악감정이 있어서가 아니었잖아요? 그저 책임을 지고 마탑을 떠난 걸로 알고 있는데…….”

“내부사정이다. 총책임자님이 하셨던 말씀 기억해?”

“!”

“말 그대로 마냥 확신할 수 없다는 뜻이야.”

박민재가 묻는다.

“유그위드가 아닌 다른 마법사 짓일 가능성은?”

……슥.

이어지는 박민재의 질문에 윤수겸은 안경을 고쳐 썼다.

마른침을 삼켰다.

결심한 듯 답했다.

“아니요. 확실히 저건 유그위드의 소행일 겁니다.”

“……!!!”

“방금, 정확한 출현 위치를 파악했습니다.’

딸깍.

윤수겸이 마우스를 클릭하자 관제 모니터에 정확한 좌표가 떠오른다. 그러자 필사적으로 반박하고자 했던 성현준의 얼굴에 허탈함이 깃들었다.

“……마, 마탑이잖아요?”

그렇다.

골렘을 뱉어낸 균열은 마탑과 동일한 좌표에 출현한 것이었다.

박민재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다.

그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마탑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마르셀로 탑주?”

그러나 의문에 답해줄 수 있는 마르셀로, 마탑의 수석이신 이호열 총책임자님, 고위 선임 마법사들은 대괴수의 진격을 막기 위해 아르카나 대륙으로 향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그보다 마탑은 무사한 건가?”

AAU는 천하의 마탑을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대격변 이후, 대한민국의 국력이 급상승하게 된 이유.

그건 마탑이 서울에 출현했다는 이유 하나 덕분이었으니까.

하지만 박민재는 단순하게 대한민국의 국익을 생각해 마탑의 안위를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만약, 이번 사태로 마탑이 무너지거나 흔들리기라도 한다면…….

‘아르카나 대륙의 범람으로 현실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거다.’

그래서 마탑의 정확한 상황은?

박민재는 어나더 스페이스 호의 촬영기록을 샅샅이 살펴봤지만, 마탑의 형체는 보이지 않았다. 일대를 뒤덮은 골렘에 완전히 파묻히다시피 했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플레이어들을 통해서.

구체적인 출현 메시지 내용이 AAU로 전해진 건.

박민재를 비롯한 모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유그위드 짓이 아니라……. 저게 유그위드, 자체라고……?”

*

우려와 달리 마탑은 무사했다.

마탑의 지하.

마탑의 근간이 되는 건 무간(無間).

시공간을 초월한 뼈대는 외부의 충격으로부터 마탑을 굳건하게 지키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러한 무간의 존재를 알고 있는 건 마탑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했다.

“저, 저 어떻게 해야 하죠?”

클래스 탐험가, 플레이어 박휘강.

“어쩐지 재수가 좋더라니.”

“휘강아 그동안 고마웠다.”

“형님들, 진짜 부정타는 소리하실래요?!”

그는 연맹 탐험가들과 함께 아르카나 대륙으로 진압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대괴수를 사냥하는 데에 탐험가는 도움이 되기는커녕 발목만 붙잡을 테지만.

프로토타입 균열의 존재에 관해 알게 된 이상.

탐험가 플레이어들에겐 밥값을 하게 될 기회가 온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하지만 아르카나 대륙으로 향하기 위해 마탑 포탈로 집결한 지금.

“호랑이굴은 아니지만, 그래도 정신부터 차리자고요!”

전례가 없던 일.

전례가 없던 몬스터 출현으로.

마탑 내부에 완전히 고립되어 버린 것이었다.

“파비앙 연맹장님, 마탑 출입구가 막혔습니다.”

“포탈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데, 어떡해야 하죠?”

“우선 정확한 사태부터 파악하지.”

그러한 탐험가 연맹장, 파비앙 들롱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에.

박휘강은 스트리밍 시작 버튼을 눌렀다.

외부의 시청자들이라면 자신보다 마탑의 상황을 잘 알고 있을 터.

방송 시작과 동시에 갱신되는 채팅창.

-휘강아 살아있었구나ㅠㅠㅠㅠㅠㅠㅠ

-ㅁㅊ 서울 완전 초토화됐음;;;;

-근데 휘강이 어디임??

-어째 배경이 낯이 익다?

-뭐야, 진짜 마탑이잖아? 제목 어그로인줄 알았는데ㄷㄷ

“하…….”

그러나 쉽사리 멘트를 칠 수 없을 정도로 부정적인 소식의 연속이었다. 마탑 내부 상황이 궁금해 방송에 들어온 시청자들의 숫자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박휘강은 안타까움을 삼키고 애써 답했다.

“마탑이요? 조금씩 흔들리기는 하는데 무너질 것 같진 않습니다. 마법사님들은 뭐하고 계시냐고요? 글쎄요, 몇 분 보이시기는 하는데, 사실 저희랑 크게 다른 상태인 것 같지는 않아서…….”

언뜻 보이는 견습, 숙련 마법사들의 반응.

아르카나 최강의 무력 집단이기에 누구의 위협도 받지 않아 왔던 마탑이다. 그런 마탑이 미지의 적에게 포위되어 고립된 지금. 마법사들의 표정엔 우려가 그대로 나타났다.

“지브릴 양……! 저희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까요?”

“호들갑 좀 떨지 말아요, 린느.”

“아니, 아무리 그래도 확실하지 않습니까?!”

숙련 마법사, 린느 아르뎀.

그가 간만에 전문적인 지식을 발휘했다. 린느의 전공 마법은 대지마법학이었으니, 그의 떨리는 손가락이 창 너머 요동치는 암석을 가리켰다.

“저건 아무리 봐도 골렘이란 말입니다!”

지브릴이 린느에게 쏘아붙였다.

“린느, 그렇다면 당신은 골렘을 발현할 수 있는 이 시대 유일한 마법사이신 유그위드 님 때문에 지금 사태가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그, 그런 말은 아니지만……!”

“그럼, 좀 조용히 기다리세요.”

“흡.”

지브릴, 그녀의 곁으로 인파가 몰려드는 건 우연이 아니었다.

지브릴은 숙련 마법사답지 않은 침착성을 가지고 있었다.

마탑에 입성하기 전.

가문에서 길러진 성질 중 하나였다.

지브릴의 시선이 마탑의 계단 위쪽을 향했다.

“분명, 가만히 있지 않으실 테니까.”

그러나 현재 마탑의 전력은 온전하지 않았다.

아르카나 대륙으로 출탑한 건 마르셀로 탑주와 이호열 수석.

그리고 몇 분의 선임 마법사뿐이었지만.

‘……이 수석님이 부재중이신 것만으로.’

현재 마탑의 전력은 절반이라고 해도.

후하게 쳐준 것일 테니까.

지브릴이 진지하게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기척과 함께 멀리서 반가운 얼굴, 클레가 보였다.

“클레 양……?”

그런데 지브릴은 말꼬리를 흐렸다.

복도 끝.

치유학파 별실에서 모습을 드러낸 클레의 모습이 낯설었다.

평상시 걸치고 다니던 수수한 로브는 어디로 가고…….

“어째서 그런 화려한 복장을 차려입은 건가요, 클레?”

호사가.

지브릴의 눈이 반짝거렸다.

덕분에 클레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다들 그렇게 쳐다보지 말아 주세요. 그리고 왜 다들 여기에 계신 건가요? 복장은 왜 아직도 로브, 그대로 입고 있으신 거고요?”

“……네?”

“클레 양,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그 소리에 어리둥절한 지브릴과 린느.

두 사람은 보다 자세히 클레의 모습을 살폈다.

아니, 이제 보니 단순하게 화려하기만 한 복장이 아니잖아?

특히나 허리의 이건 스태프……!

지브릴의 동공이 확대됐다.

마탑의 호사가로서 어찌 모를 수 있으랴.

“결전용 마도구……? 클레, 설마……?”

클레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조금 전 결전용 마도구의 사용이 승인되었잖아요?”

“결전용 마도구가 사용 승인……? 그런 전례 없는 중대사가 승인되었다고요?! 선임 마법사님들도 함부로 다룰 수 없는 게 결전용 마도구인데, 저희 숙련 마법사에게도 사용이 승인되었단 말씀입니까?”

“호들갑 떨지 마세요, 린느.”

“흡.”

지브릴은 지그시 고개를 끄덕였다.

전례가 없는 상황이니 전례가 없는 결정을 내릴 법도 하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이라는 게 문제였다.

지브릴은 불현듯 떠올렸다.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건 오직…….’

마르셀로 탑주님 혹은 이호열 수석님뿐.

그러나 두 분은 현재.

아르카나 대륙 출탑으로 부재중이셨다.

‘두 분의 공백을 메꿀 수 있으신 분은…….’

흑마도학 선임, 마티스 딘 카를 선임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마티스 선임께서도 아르카나 대륙으로 출탑을 나섰으니, 현재 마탑에 남아있는 선임 마법사 중 한 명이 그들의 대행으로서 이러한 결정을 내렸을 터.

지브릴이 중얼거렸다.

“……설마?”

그리고 그 설마는 역시나였다.

현시점에서 마탑의 수석 대행은 어찌하여 결전용 마도구의 사용을 전면 허가했는가? 그건 공정한 절차에 따라서. 자신이 결전용 마도구를 사용하기 위함이었으니.

가넷 홀.

마법부여학 선임, 키코 아르민.

그녀는 우려스러운 눈길로 자신의 동료를 바라봤다.

“으흐흐흐.”

소형 마력 태양과 유사하면서도 다른.

정확하게는 상위호환이라 불러도 무방한 결전용 마도구, [아나토쉬의 불꽃]. 흡족한 웃음을 흘리며 마도구를 손에 쥔 임시 수석 대행, 벤쉬 윌리엄을 보며 키코가 중얼거렸다.

“이 수석님께선 대체 무엇을 보셨길래…….”

이딴 걸 임시 수석 대행으로 임명하신 건가요……?

*

탑주.

마르셀로는 텔레파시로 소식을 접했다.

현실의 마탑이 위협에 처했다라.

그러나 걱정이 되진 않았다.

“우리에겐 염제가 있으니까.”

마르셀로는 감탄했다.

벤쉬 윌리엄 선임을 임시 수석으로 임명하신 그 판단을.

비로소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또 한 번 당신께 배우게 됩니다,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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